남아메리카의 역사

파라과이 전쟁: 남미 최대의 무력 분쟁, 삼국 동맹 전쟁의 전말

파라과이 전쟁(삼국동맹 전쟁)은 1864년부터 1870년까지 약 6년간 지속된 남미 역사상 가장 격렬한 무력 충돌이었다.

전쟁에 참여한 국가는 브라질, 아르헨티나, 우루과이로, 이 세 국가가 '삼국 동맹(Triple Alliance)'을 결성하여 파라과이와 맞섰다.

이 전쟁은 파라과이의 독재자 솔라노 로페스(Solano López)가 브라질과 아르헨티나의 영토 병합을 노리고 발생했으며, 라플라타 강 유역에 대한 통제권도 핵심 쟁점이었다.

파라과이 전쟁은 최종적으로 삼국 동맹의 승리로 끝났으며, 패전국 파라과이에게는 참혹한 결과를 안겨주었다.

파라과이 전쟁의 원인

파라과이의 영토 확장 야욕

파라과이 전쟁의 직접적인 배경에는 독재자 솔라노 로페스가 꿈꾼 '대파라과이(Great Paraguay)' 건설 구상이 있었다. 그는 해양으로 나아갈 출구를 확보하기 위해 브라질과 아르헨티나의 일부 영토를 병합하려 했다.

라플라타 유역의 항해권 문제

브라질은 파라과이를 관통하는 하천의 자유 항해권을 요구했다. 당시 마투그로수 주(현 마투그로수두술 주)의 수도인 쿠이아바(Cuiabá)로 접근할 수 있는 유일한 경로가 강을 통해서였기 때문이다.

우루과이 정세

우루과이는 라플라타 강 기슭이라는 전략적 요충지에 위치해 있어 세 나라 모두 그 내정 상황에 큰 관심을 두고 있었다.

브라질과 아르헨티나는 우루과이의 콜로라도당(Colorados, 적색당)을 지원한 반면, 솔라노 로페스는 그들의 정적 블랑코당(Blancos, 백색당)을 지원했다.

전쟁 전의 파라과이 상황

전쟁 이전 파라과이는 농업 중심의 국가였으나, 솔라노 로페스의 영토 확장 계획에 따라 군수 산업 육성에 박차를 가하기 시작했다.

1811년 독립 이후 파라과이는 1825~1827년 시스플라티나 전쟁 등 역내 분쟁에서 거리를 두며 고립주의 노선을 유지해 왔다.

그러나 1862년 대통령직에 오른 솔라노 로페스(1827~1870)는 선대 지도자들의 민족주의 경제 정책을 계승하는 한편, 자신의 이익과 일치하는 아르헨티나와 우루과이 내 정치 세력에 개입하기 시작했다.

그중 하나가 우루과이의 블랑코당으로, 이들이 집권하면 몬테비데오 항구를 파라과이가 사용할 수 있게 되기 때문이었다. 또한 아르헨티나에서는 당시 대통령 바르톨로메 미트레(Bartolomeu Mitre)의 적대 세력인 연방주의자들과 동맹을 맺었다.

우루과이 정세와 전운

1825년 우루과이가 독립했을 때, 이 나라는 블랑코당(백색)과 콜로라도당(적색)이라는 두 정치 세력으로 갈라져 있었다. 브라질과 아르헨티나는 자신들的影响力을 유지하기 위해 콜로라도당을 후원했다.

1864년 양당 간 연합체가 붕괴되면서 콜로라도당은 연합을 주도하던 베르나르도 베로(Bernardo Berro) 정권을 축출할 음모를 꾸몄다.

결국 우루과이에서 내전이 발발했고, 콜로라도당은 브라질에 도움을 요청했고 브라질은 군대를 우루과이에 파병했다. 여기에 아르헨티나 대통령 바르톨로메 미트레의 지원까지 더해졌다. 반면 블랑코당은 솔라노 로페스와 미트레의 정적들로부터 지원을 받았다.

군사적 우위를 바탕으로 콜로라도당은 1864년 블랑코당을 물리치는 데 성공했다. 그러나 솔라노 로페스는 미트레 대통령의 허가 없이 아르헨티나 영토를 횡단하여 브라질군을 공격하기에 이른다.

바로 이 사건이 파라과이 전쟁의 도화선이 되었다.

파라과이 전쟁의 발발

1864년 11월, 솔라노 로페스는 파라과이 강에서 쿠이아바로 향하던 브라질 상선 '마르케스 데 올린다(Marquês de Olinda)'호를 나포하라고 명령했다.

상선임에도 불구하고 솔라노 로페스는 선창에 무기가 숨겨져 있다고 의심했다. 곧이어 그는 두라두스(Dourados) 시를 공격했다.

다음 해인 1865년, 파라과이군은 아르헨티나 당국의 허가 없이 아르헨티나 영토를 통과하여 히우그란지두술(Rio Grande do Sul)을 점령했다. 그러나 몇 달 뒤 리아슈엘루 해전(Battle of Riachuelo)에서 해당 지역은 탈환되었다.

삼국 동맹 조약

이러한 상황 속에서 브라질 정부는 인접국인 아르헨티나와 우루과이에 솔라노 로페스에 대항하는 상호 지원 조약을 제안했다.

1865년 5월 1일, 전쟁에 연루된 세 나라 간의 삼국 동맹 조약이 공식 체결되었고, 동맹군의 지휘관은 아르헨티나 대통령 바르톨로메 미트레가 맡았다.

파라과이 전쟁의 주요 전투

투위티 전투

1866년 5월 24일 벌어진 투위티(Tuiuti) 전투는 무려 1만 3천 명의 사망자를 낸 참전이었다. 파라과이군은 늪지대에서 동맹군을 공격하여 초기에는 우위를 점했으나, 작전 지연과 무기 배급 문제로 인해 삼국 동맹의 승리로 기울었다.

이 전투에서 승리했음에도 불구하고 오조리우(Osório) 장군은 브라질군 지휘권을 반납했고, 그의 후임으로 카시아스 후작(훗날 두케 드 카시아스)이 임명되었다.

투위티 전투는 남미 역사상 최대 규모의 정면 야외 전투로 평가받고 있다.

라과나 대철수

1867년, 브라질군은 파라과이에 점령된 마투그로수 지역 일부를 탈환하고자 시도했다.

미나스제라이스에서 출발한 부대가 마투그로수로 진격했지만, 질병과 보급 부족에 시달린 브라질군은 로페스의 부대에게 패배했는데, 이것이 바로 '라과나 대철수(Laguna Retreat)'로 알려진 사건이다.

우마이타 전투

카시아스는 브라질 육군에서 가장 경험 많은 군인 중 한 명으로 꼽혔으며, 제정 정부는 그를 소집해 전략을 수립하고 승리를 이끌어내도록 했다.

카시아스는 우마이타(Humaitá) 요새를 함락시키기 위한 일련의 군사적 승리를 거듭 거두었고, 마침내 1868년 2월 19일 요새를 점령하는 데 성공했다. 이로써 동맹군은 파라과이 영토 깊숙이 진격할 수 있게 되었다.

12월 전역

'12월 전역'은 1868년 12월 이토로로(Itororó), 아바이(Avaí), 앙고스투라(Angostura), 로마스발렌티나스(Lomas Valentinas)에서 벌어진 일련의 전투를 가리킨다.

이후 동맹군은 파라과이의 수도 아순시온(Asunción)으로 진군하여 전쟁의 승기를 완전히 장악했다.

파라과이 전쟁의 종결

1869년 1월 아순시온을 점령한 후, 카시아스는 전쟁 지휘권을 페드루 2세 황제의 사위인 루이스 가스탕 공작(외유 백작, Count d'Eu)에게 넘겼다.

새 지휘관은 황제로부터 솔라노 로페스를 생사불문하고 생포하라는 명백한 명령을 받았다. 이에 따라 파라과이군이 항복하지 않자 외유 백작은 솔라노 로페스와 그의 병사들을 추격했다.

전투는 1870년 3월 1일, 세루코라(Cerro Corá)에서 항복을 거부한 파라과이 독재자 솔라노 로페스가 사망하면서 비로소 종식되었다. 이로써 브라질과 파라과이 간의 전쟁도 막을 내렸다.

파라과이 전쟁의 결과

전쟁은 브라질과 파라과이 모두에게 엄청난 피해를 안겼으며, 특히 파라과이는 폐허가 되었다. 남성 인구의 약 80%가 목숨을 잃었고, 남은 것은 노인과 아이들, 그리고 전쟁으로 불구가 된 사람들뿐이었다.

이 전쟁으로 극소수 존재하던 산업 시설들은 파괴되었고 경작지는 방치되었으며, 국민 대다수는 자급자족 농업으로 연명하는 처지가 되었다.

또한 파라과이는 아르헨티나와 브라질에 영토 일부를 할양했고, 삼국 동맹국들에 대한 전쟁 배상금 채무를 떠안았다. 이 빚은 우루과이가 1885년, 아르헨티나가 1942년, 브라질이 1943년에야 면제해 주었다.

브라질 입장에서도 이 전쟁은 수천 명의 목숨을 앗아갔고 경제에 심각한 타격을 주어 재정 균형을 유지하기 위해 수차례 차관을 들여야 했다.

반면 전쟁이 끝난 후 브라질은 라플라타 유역의 자유 항해권을 확보했고, 승전의 영광과 함께 현대화된 군대를 갖추게 되었다.

아르헨티나는 코리엔테스 주와 그란차코 지방 등 솔라노 로페스가 영유권을 주장하던 영토를 확보했다.

영국은 전쟁에 직접 참전하지 않았지만, 이 분쟁에서 이익을 본 유일한 국가였다. 영국은 아메리카 대륙에서 시장을 확장했고, 파라과이의 재건과 브라질에 자금을 빌려줌으로써 이들의 부채를 더욱 증가시켰다.

파라과이 전쟁의 흥미로운 사실들

  • 전쟁 말기 솔라노 로페스는 12세 이상 아이들에게 가짜 수염을 붙여 전투에 투입하라고 명령했다. 이 때문에 대부분의 아동 병사들은 브라질군에게 살해되었다.
  • 병력을 확충하기 위해 브라질 정부는 1865년 '조국 자원병(Voluntários da Pátria)' 제도를 설립했다. 자유민에게는 토지, 돈, 과부 연금을 약속했고, 노예에게는 전쟁에서 귀환하면 자유를 부여하겠다고 제안했다.
  • 파라과이군은 아순시온 여러 교회의 종을 녹여 만든 대포를 운용했는데, 이는 '기독교 포(Cristiano Cannon)'로 알려져 있으며 전쟁 중 브라질군에 압수되었다. 현재 리우데자네이루의 국립 역사 박물관에 보관되어 있으며, 2014년에는 솔라노 로페스의 증손자가 브라질 정부에 반환을 요청하기도 했다.

함께 읽으면 좋은 글

  • 파라과이 강 유역
  • 파라과이
  • 브라질 제2제정기
  • 남미 근대사의 이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