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아메리카의 역사

리마 건국의 잊혀진 안데스 얼굴 – 역사가 마리아 로스트보로우스키가 본 타울리추스코

잊혀진 안데스의 기억

리마 건립 기념일이 돌아올 때마다 축하 연설과 신문 기사들은 거의 예외 없이 스페인인들이 세운 도시라는 사실만을 강조합니다. 그러나 고대 잉카 영토가 식민지화된 그 결정적 순간에는 분명한 안데스의 얼굴이 있었음에도 말입니다. 역사가 마리아 로스트보로우스키(María Rostworowski)는 1981년 1월 25일자 칼럼에서 바로 이렇게 지워진 역사를 조명했습니다.

리마 건국의 잊혀진 안데스 얼굴 – 역사가 마리아 로스트보로우스키가 본 타울리추스코

리마를 다스렸던 쿠라카, 타울리추스코(Taulichusco)

리마(Lima)라는 이름의 유래

흥미롭게도 쿠라카즈고(원주민 족장 지배 체제)와 그 땅을 가로질러 들을 기름지게 하는 강 모두 '리마' 혹은 '리막(Limac)'이라 불렸습니다. 중부 해안 지방의 케추아어는 쿠스코 방언보다 부드러웠고, 'r' 대신 'l' 소리를 사용했습니다. 그래서 중부 평야의 지명은 화자가 산악 민족인지, 해안의 융가(yunga) 민족인지에 따라 서로 다르게 발음되곤 했습니다.

이치마 영주권과 파차카막 신앙

당시 리마는 이치마(Ychma) 영주권에 속한 작은 쿠라카즈고였습니다. 이치마는 리막 강과 후린 강 유역의 하류 계곡 전체를 포괄했으며, 그 중심 거점은 잉카 정복자들이 같은 이름의 신을 기리며 '파차카막(Pachacámac)'이라 부른 의례 중심지였습니다. 이 신에 대한 숭배는 타완틴수유 중부 전역으로 뻗쳤고, 안데스 지역의 먼 곳까지 미쳤습니다. 사람들은 이 신이 내리는 징조를 귀하게 여겼을 뿐 아니라, 지진의 신으로서 깊이 경외했습니다. 그분의 진노는 흔들림의 강도, 즉 지진파의 파괴력으로 나타난다고 믿어졌습니다.

스페인인들이 마주한 노총수, 타울리추스코

스페인인들이 이 땅에 도착했을 당시 리마의 쿠라카(원주민 족장)는 늙은 타울리추스코였습니다. 그는 이 지역 옛 족장들의 혈통에 속하지 않은 인물로, 쿠스코 정복자들이 자신들에게 아부하는 인물로 갈아치운 자리였습니다. 또한 안데스 특유의 이원성에 따라 리마 쿠라카즈고는 아난(Anan)과 후린(Lurín) 두 파로 나뉘어 있었고, 각각에 자체적인 쿠라카가 존재했다는 점도 짚어둘 필요가 있습니다.

원주민의 어깨에 얹힌 도시 건설의 무게

히스패닉 창립자들을 부양하고 새 도시를 건설하는 데 든 비용은 자연스럽게 인디오들에게 전가되었습니다. 이 가혹한 부담은 리마 원주민 정착민들을 몰아붙였고, 그 수는 곧 경악할 만큼 급감했습니다. 스페인 문서 기록에 따르면 1535년 리마 영주권에는 약 4,000명의 노동 가능 연령 남성 납세자가 있었으나, 불과 9년도 지나지 않은 1544년에는 1,200명으로 줄었고, 1557년에는 단 250명만 남았습니다.

리마 건국의 잊혀진 안데스 얼굴 – 역사가 마리아 로스트보로우스키가 본 타울리추스코

세대를 이어간 마지막 저항

타울리추스코는 1541년 피사로 암살 사건 이전에 세상을 떠났습니다. 후계 과정은 큰 문제 없이 진행되었는데, 새 족장 과치아니아모(Guachianiamo)가 이미 아버지의 통치 기간 동안 공동 섭정으로 활동해 왔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의 통치는 짧게 끝났습니다. 이후 타울리추스코의 아들 고돈살로(Gonzalo)가 쿠라카로 임명되었으며, 우리는 그가 자기 민족의 권리와 땅을 필사적으로 지켜 왔음을 알고 있습니다.

산타 마리아 막달레나로의 강제 이주

세월이 흐르고 유럽인 인구가 늘어나면서 로스 레예스(리마)에서는 집과 과수원을 지을 땅이 점점 부족해졌습니다. 이에 카녜테 후작(Marqués de Cañete) 시대에 리마 원주민들을 더 먼 곳으로 옮겨 그들의 토지를 확보하기로 결정합니다. 그리하여 산타 마리아 막달레나(Santa María Magdalena)라는 마을이자 원주민 재정착촌(레두크시온)이 만들어졌고, 그곳에는 리마 출신뿐 아니라 마랑가, 과트카, 아만카에스, 과라 출신 원주민들까지 거주하게 되었습니다.

늦었지만 반드시 필요한 명예 회복

이처럼 수많은 부당함 끝에, 이제 리마 시는 돈 고돈살로에게, 그리고 그를 통해 리마의 옛 주민들에게 뒤늦은 명예 회복을 헌상할 때입니다.

— 마리아 로스트보로우스키, 『엘 도미니칼』 1981년 1월 25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