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아메리카의 역사

해방자 호세 데 산 마르틴: 남아메리카 독립의 아버지

서론: 남아메리카 해방의 위대한 설계자

호세 데 산 마르틴(José de San Martín)은 시몬 볼리바르와 함께 남아메리카 스페인 식민지 독립 전쟁의 양대 영웅으로 추앙받는 인물이다. 아르헨티나, 칠레, 페루의 독립을 이끈 그의 생애는 군사적 천재성, 정치적 통찰력, 그리고 조국에 대한 헌신이 어떻게 역사를 바꾸는지 보여주는 위대한 서사시이다.

출생과 가문: 야페유에서 마드리드로

아르헨티나 북동부의 작은 마을에서 태어나다

1778년 2월 25일, 호세 프란시스코 데 산 마르틴은 아르헨티나 코리엔테스 주의 우루과이 강변에 위치한 야페유(Yapeyú)에서 태어났다. 당시 야페유는 1627년 예수회가 세운 선교도시로, 리오 데 라 플라타 지역 최대의 목축 중심지이자 예르바 마테 생산지, 조선소, 음악학교가 있던 번영한 도시였다. 하지만 1767년 예수회 추방 이후 경제가 쇠퇴했음에도 스페인의 전략적 요충지로 남아 있었다.

스페인 군인 아버지와 크리올로 어머니

아버지 후안 데 산 마르틴 이 고메스는 스페인 올드 카스티야의 세르바토스 데 라 쿠에사 출신으로 스페인 육군 대위였다. 어머니 그레고리아 마토라스는 세르바토스 인근 파레데스 데 나바 출신으로 1767년 부에노스아이레스 대성당에서 결혼했다. 부부 사이에는 다섯 자녀가 있었는데, 호세는 막내였다. 1783년 아버지가 전역을 청원해 가족은 스페인으로 이주했고, 마드리드를 거쳐 말라가의 포소스 둘세스 거리에 정착했다.

스페인에서의 군사적 성장

어린 나이에 사관학교 입교

1789년 7월 15일, 프랑스 혁명이 발발한 바로 다음 날, 11세의 산 마르틴은 무르시아 보병 연대 생도(cadet)로 입대했다. 그는 곧 스페인과 북아프리카 전장에서 실전 경험을 쌓았다. 1791~1795년 스페인-프랑스 전쟁 중 오랑, 피레네, 루시용 전투에서 두각을 나타냈고, 1808년 7월 19일 바옌 전투(Battle of Bailén)에서 영웅적인 활약으로 중령으로 진급하고 금메달을 수여받았다. 이 전투는 나폴레옹 군대가 야전에서 처음으로 패한 전투로, 산 마르틴의 명성을 스페인 전역에 알렸다.

안달루시아 억양과 예술적 감수성

그는 평생의 대부분을 스페인 남부에서 보냈기에 안달루시아 억양이 강했고, 기타 연주가 뛰어나며 칸테(flamenco 노래)를 즐겨 불렀다고 전해진다.

조국으로의 귀환: 독립운동의 시작

런던에서의 결정적 만남과 메이트랜드 플랜

1811년 9월, 5월 혁명 1년 후 산 마르틴은 스페인 군을 떠나 런던으로 향했다. 그곳에서 프란시스코 데 미란다의 '대미주 형제단', 제임스 더프와 찰스 스튜어트 경 등 영국 정치인들과 교류하며 '메이트랜드 플랜'을 접했다. 스코틀랜드 장군 토마스 메이트랜드가 1800년 작성한 이 계획은 부에노스아이레스 장악 → 멘도사 거점 확보 → 칠레군과 연계 → 안데스 횡단 → 칠레 해방 → 해상으로 페루 진격 → 리마 해방으로 이어지는 거대 전략이었다. 산 마르틴은 이 계획을 자신의 해방 전략의 뼈대로 삼았다.

부에노스아이레스 도착과 첫 임무

1812년 1월, 영국 프리깃함 조지 캐닝 호를 타고 부에노스아이레스에 도착했다. 당시 제1차 삼두정(펠리시아노 치클라나, 마누엘 데 사라테아, 후안 호세 파소)이 통치 중이었으나 실권은 베르나르디노 리바다비아 정부 비서관이 쥐고 있었다. 삼두정은 산 마르틴의 중령 계급을 인정하고, 몬테비데오에서 출격하는 스페인군의 파라나 강 연안 공격을 막기 위한 '기마 척탄병 연대(Regimiento de Granaderos a Caballo)' 창설을 명령했다. 부대는 레티로에 주둔했다.

비밀결사 라우타로 롯지와 첫 정치적 개입

산 마르틴은 도착 직후 카를로스 데 알베아르와 함께 '라우타로 롯지(La Logia Lautaro)'를 결성했다. 베르나르도 데 몬테아구도가 이끄는 '애국협회'와 연계한 이 비밀결사의 목표는 완전 독립과 공화제 헌법 수립이었다. 1812년 10월 8일, 산 마르틴은 척탄병들을 이끌고 빅토리아 광장(현 5월 광장)으로 행진해 삼두정의 사퇴를 요구했다. "군대는 언제나 폭정의 편에 설 필요는 없다"는 그의 일갈에 삼두정은 무너졌고, 롯지와 애국협회 인사들로 구성된 제2차 삼두정이 들어섰다.

레메디오스 에스칼라다와의 결혼

같은 해 9월 12일, 산 마르틴은 부에노스아이레스 사교계의 명문가 안토니오 에스칼라다의 딸 레메디오스와 결혼했다. 그는 34세, 그녀는 15세였다. 에스칼라다 가문의 짧은 반대에도 불구하고 '그 여자는 나를 평생 바라봤다'는 확신으로 결혼에 골인했다.

산 로렌초 전투: 아르헨티나 영토에서의 유일한 전투

1813년 2월 3일, 산 마르틴의 척탄병들은 산 카를로스 수도원(산 로렌초 포스트)에서 파라나 강을 건너 약탈과 공격을 일삼던 스페인군 300여 명을 포위 섬멸했다. 이 산 로렌초 전투는 산 마르틴이 아르헨티나 영토에서 치른 최초이자 마지막 전투였다. 척탄병들의 용맹과 산 마르틴의 전술적 천재성이 입증된 순간이었다.

안데스 횡단의 대장정: 불가능을 가능으로

북방군 사령관에서 쿠요 총독으로

1814년 벨그라노 장군을 이어 북방군 사령관이 된 산 마르틴은 알토 페루(볼리비아) 루트로는 승산이 없다고 판단, 위장 궤양 치료를 핑계로 코르도바에 머물며 안데스 횡단 계획을 완성했다. 계획이 승인되자 쿠요 총독에 임명되어 멘도사에서 본격적인 준비에 들어갔다.

쿠요 총독으로서의 치적: 와인 산업과 평등 과세

군사 준비와 병행해 교육, 농업, 산업 진흥에 힘썼다. 특히 멘도사와 산 후안의 와인 산업에 유럽 포도 품종과 전문가를 도입해 퀴요 와인의 품질을 획기적으로 높였다. 누진세제를 도입해 부유층이 더 많이 부담하게 하는 평등 과세 시스템도 구축했다.

딸 메르세데스의 탄생과 이별

1816년 8월 24일, 멘도사에서 딸 메르세데스 토마사가 태어났다. 산 마르틴은 생후 4개월 된 딸을 두고 안데스를 넘었고, 부인은 친정인 부에노스아이레스로 갔다. 부녀가 다시 만나기까지 7년이 걸렸다.

투쿠만 회의에 대한 지지와 독촉

1816년 투쿠만 회의에는 참석하지 못했으나, 쿠요 대표 토마스 고도이 크루스를 통해 벨그라노의 잉카 왕 옹립안을 지지했다. 독립 선언이 지연되자 고도이 크루스에게 "국기, 국가, 코카르다가 있는데 독립하지 않은 건 아주 우스운 일"이라며 독촉 서한을 보냈다.

안데스 군단의 자금: 귀족 부인들의 보석이 아닌 민초의 피땀

일설에는 멘도사 상류층 부인들의 보석 기부로 군자금이 마련됐다고 하나, 실제로는 216페소(당시 노새 50마리 값)에 불과했다. 진짜 재원은 퀴요 민중이 옷, 솥, 노새, 무기, 식량, 심지어 월급까지 바친 헌신이었다.

25일간의 죽음의 행군

1817년 1월 12일, 안데스 군단 5,400명이 멘도사를 출발해 2월 5일 칠레에 도착했다. 해발 4,000m가 넘는 고갯길을 주간 30도, 야간 영하 10도의 극한 기후 속에서 25일 만에 주파했다. 산 마르틴 본인도 궤양 통증이 심해 들것에 실려 여러 구간을 이동해야 했다.

칠레 해방: 차카부코와 마이푸

안데스 횡단 직후인 1817년 2월 12일, 차카부코 고개 전투에서 산 마르틴의 탁월한 전술로 스페인군을 격파했다. 아군 피해는 전사 12명, 부상 120명에 그쳤으나 스페인군은 전사 500명, 포로 600명의 대참패를 당했다. 이 승리로 칠레 독립이 사실상 확정되었고, 1818년 4월 5일 마이푸 전투에서의 결정적 승리로 완전 독립이 굳어졌다.

페루 원정: 해상 작전과 리마 입성

부에노스아이레스 정부의 미온적 지원

마이푸 승리 후 산 마르틴은 다시 안데스를 넘어 부에노스아이레스 관리정부에 페루 원정 지원을 요청했다. 50만 페소 지원을 약속받았으나 실제로는 30만 페소만 받았다. 칠레 정부 지원과 스코틀랜드 제독 토마스 코크런 휘하 함대를 확보해 독자적으로 원정대를 꾸렸다.

'찬란한 불복종': 내전 거부

출항 직전 관리정부는 산타페와 엔트레리오스 연방파 토벌을 명령했다. 산 마르틴은 "산 마르틴 장군은 동포와 싸우기 위해 칼을 뽑지 않을 것"이라며 명령을 거부하고 페루로 향했다. 이는 '찬란한 불복종(Desobediencia Brillante)'으로 불린다.

페루 상륙과 리마 봉쇄

1820년 8월 20일, 발파라이소에서 24척 함선, 4,800명 병력으로 출항했다. 9월 12일 페루 피스코에 상륙, 현지 주민과 노예들이 해방군에 합류했다. 아레날레스 장군 휘하 부대가 내륙으로 진격해 12월 6일 파스코 전투에서 대승을 거두었고, 산 마르틴은 리마 항구를 봉쇄해 총독 데 라 세르나를 사면초가에 빠뜨렸다. 1821년 7월 10일, 총독이 항복하고 산 마르틴이 리마에 입성했다.

코크런과의 갈등과 함대 이탈

코크런 제독은 산 마르틴의 지휘를 받기 싫어했고 항해 내내 마찰을 빚었다. 1821년 말, 밀린 급여를 핑계로 함선 여러 척을 이끌고 칠레로 도주해 칼라오 항 방어력을 크게 약화시켰다.

페루 보호령 수립과 개혁

1821년 7월 28일, 산 마르틴은 페루 독립을 선언하고 '페루 보호자(Protector del Perú)' 칭호를 받아 전권(全權)을 행사했다. 노예제와 미타·야나코나소(강제 노역) 폐지, 출판·신앙 자유 보장, 학교와 리마 공립도서관 설립 등 진보적 개혁을 단행했다. 재정난으로 민심이 동요했으나 남부와 중부 페루의 왕당파를 항복시키는 데 성공했다.

과야킬 회담: 두 해방자의 만남과 결별

남쪽에서 올라온 산 마르틴과 북쪽에서 내려온 시몬 볼리바르는 1822년 7월 26~27일 에콰도르 과야킬에서 회담했다. 정치적·군사적 견해차가 컸다. 산 마르틴은 각 해방 지역이 자율적으로 운명을 결정해야 한다고 본 반면, 볼리바르는 신생 공화국들을 직접 통제하려 했다. 통합군 사령관 문제에서도 산 마르틴이 볼리바르를 추천했으나, 볼리바르는 "산 마르틴 같은 장군을 부하로 둘 수 없다"고 거절했다. 산 마르틴은 모든 직에서 사퇴하고 병력을 볼리바르에게 넘긴 뒤 조국으로 돌아가기로 결단했다.

고국에서의 배신과 유럽 망명

리바다비아의 입국 거부와 아내의 죽음

과야킬 회담 후 리마로 돌아와 보호자직을 사임하고 칠레로 갔다. 1823년 1월 다시 안데스를 넘어 멘도사에 머물며 위독한 아내를 만나러 부에노스아이레스 입국을 요청했으나, 리바다비아 정부 장관은 '안전 보장 불가'를 핑계로 거절했다. 실제로는 연방파와 접촉할까 봐 두려워한 것이었다. 산타페 주지사 에스테니슬라오 로페스가 '부에노스아이레스 정부가 불복종 혐의로 재판하려 한다'고 경고했지만, 산 마르틴은 "더 이상의 피 흘림은 원치 않는다"고 거절했다. 불행히도 아내는 그가 도착하기 전 숨을 거뒀다.

명예훼손과 위협 속 유럽행

단일파 정부의 중상모략과 재판 위협 속에 1824년 어린 딸 메르세데스와 함께 유럽으로 떠났다. 런던을 거쳐 브뤼셀에 정착했고, 1824년 딸의 교육을 위해 파리로 이주했다.

두 번 다시 조국 땅을 밟지 못한 이유

1829년 브라질 전쟁 발발로 귀국을 결심했으나, 부에노스아이레스 항에 도착해 도레고 주지사가 라바예의 단일파에 의해 처형됐다는 소식을 들었다. 단일파와 연방파 양측에서 권좌를 권유받았으나 "어느 편을 들어도 아르헨티나인의 피를 흘리게 될 것"이라며 거절하고 유럽으로 되돌아갔다.

로사스와의 관계: 적대적이지 않은 거리

1838년 프랑스의 부에노스아이레스 봉쇄 때 후안 마누엘 데 로사스에게 군사적 복무를 제안했다. 로사스는 외교적 노력이 더 유용할 것이라며 정중히 사양했다. 1845년 11월 20일 앙글-프랑스 연합함대에 맞선 오블리가도 전투(Vuelta de Obligado)의 용전에 감동해 다시 찬사를 보냈다. 유언장에서 평생 애용한 군도(軍刀)를 로사스에게 남기며 "아르헨티나인으로서 부당한 외세의 굴욕 시도에 맞서 공화국의 명예를 굳건히 지킨 그에게 만족한다"고 적었다.

말년: 가난과 병마 속의 최후

유럽에서 산 마르틴은 극심한 경제난에 시달렸다. 아르헨티나 정부는 외면했고, 페루와 칠레의 퇴역 장군 연금도 불규칙했다. 부에노스아이레스 집세 수입과 은행가 알레한드로 아과도의 도움으로 그랑부르 저택을 마련해 살았다. 천식, 류머티즘, 궤양, 실명 위기 등 병마에 시달리다 1850년 8월 17일, 72세로 파리 불로뉴쉬르메르에서 생을 마감했다.

에필로그: 영원한 해방자의 유산

산 마르틴의 유해는 1880년 아르헨티나로 봉환되어 부에노스아이레스 대성당 영묘에 안치되었다. 그는 군사적 천재이자 도덕적 거인으로, '조국을 위해 칼을 뽑되 동포를 향하지 않는다'는 숭고한 원칙을 지켰다. 안데스 산맥을 넘어 자유를 심은 그의 발자취는 오늘날까지 아르헨티나, 칠레, 페루 삼국의 국부(國父)로 추앙받으며, 진정한 리더십의 표상으로 남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