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아메리카의 역사

베크만의 반란: 브라질 마라냥에서 일어난 식민지 저항 운동

베크만의 반란(Revolta de Beckman)은 1684년부터 1685년까지 상루이스(São Luís) 시에서 일어난 반란으로, 당시 마라냥 주(현 마라냥, 세아라, 피아우이, 파라, 아마조나스 지역을 포괄하는 행정 구역)를 배경으로 하며, 마누엘 베크만과 토마스 베크만 형제가 주도했습니다.

이 반란은 포르투갈 본국의 지배에 정면으로 도전한 사건은 아니었고, 정착민들과 무능하다고 여겨진 본국 행정부 사이의 단순한 이해 충돌이라는 성격이 강해 고립된 역사적 사건으로 남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브라질 토착주의(nativismo) 운동의 하나로 평가받고 있습니다.

반란의 주요 원인

1650년경 네덜란드 세력이 브라질 북동부에서 축출된 이후, 노예 노동력의 부족과 물자 공급·유통망의 차질로 인한 경제 위기 속에 마라냥 주는 급속도로 쇠퇴하기 시작했습니다.

이러한 문제를 해결하고자 1682년 창설된 '마라냥 상업회사(Companhia do Comércio do Maranhão)'는 기대와 달리 실패했고, 오히려 주 경제 위기를 한층 더 악화시켰습니다.

그 결과 주민들은 극심한 빈곤에 시달렸으며, 식량과 공산품 등 생활 필수품의 공급 부족에 허덕였습니다. 특히 유통되던 공산품은 질이 극히 낮으면서도 값은 터무니없이 비싸 판매되었습니다.

당연히 현지 상인들은 회사의 독점 체제로 큰 타격을 입었고, 농촌 지주들 역시 자신들이 생산한 농산물에 대해 공정한 가격을 받지 못해 불만이 고조되었습니다.

여기에 예수회 선교사들의 저항으로 인해 지역 내 노예 노동력 확보마저 어려워지자, 정착민들은 마라냥 주 일반상업회사의 해체와 예수회 추방을 요구하며 마침내 들고일어났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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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적 배경과 전개 과정

1684년 2월, 총독 프란시스코 데 사 데 메네스(Francisco de Sá de Menezes)가 부재중인 틈을 타, 마누엘과 토마스 베크만 형제는 조르즈 드 삼파이우 드 카르발류(Jorge de Sampaio de Carvalho)와 함께 운동을 이끌었습니다. 이들은 현지 주민들과 상인, 농촌 지주들(무장 인원 약 70명)의 지원을 받아 상루이스의 경비대(10명 미만)를 무혈 항복시키고, 카피탄장 발타사르 페르난데스(Baltasar Fernandes)를 체포했습니다. 이어서 마라냥 상업회사 소유의 창고를 습격·약탈하며 반란의 서막을 열었습니다.

2월 25일까지 반군은 시 의회를 장악하고, 지주·상인·성직자로 구성된 '총독 평의회(Junta de Governo Geral)'를 수립했습니다. 평의회는 출범 즉시 카피탄장과 총독을 파면하고, 경제 침체의 종식과 함께 상업회사의 폐지를 선포했습니다.

이에 따라 평의회는 사절단을 벨렝두파라(Belém do Pará)로 보내 총독 파면 소식을 전달했고, 포르투갈 본국에는 마누엘의 친형제인 토마스 베크만을 리스본에 파견하여 국왕과 왕실에 대한 충성 맹세와 함께 상업회사에 대한 고발을 진행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상륙하자마자 체포령을 받아 마라냥으로 강제 송환되었고, 결국 유배형을 선고받았습니다.

한편 1685년 브라질에서는 반군들이 '마스카트 학교(Colégio dos Mascates)'를 점거하고 그곳에 거주하던 예수회 선교사들을 추방하는 사건이 벌어졌습니다. 약 1년 동안 마누엘 베크만은 혁명 정권을 장악하고 마라냥 주를 실질적으로 통치했습니다.

마침내 1685년 5월 15일, 신임 총독 고메스 프레이레 드 안드라데(Gomes Freire de Andrade)가 포르투갈 군대를 이끌고 상루이스에 상륙했지만, 어떠한 저항도 받지 않았습니다. 그는 기존 관리들을 복직시켰고, 마라냥 상업회사에 대한 고발 내용이 확인되자 해당 회사의 활동 중단을 요청했습니다.

반란의 지도자였던 마누엘 베크만과 조르즈 드 삼파이우는 체포되어 재판을 받은 끝에 교수형에 처했으며, 그 외 관련자들은 종신형을 선고받았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