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아메리카의 역사

브라질 독립의 원인: 식민지 체제의 위기에서 독립 선언까지

브라질 독립을 불러온 요인으로는 식민지 체제의 위기, 계몽주의 사상의 확산, 그리고 영미권·스페인령 아메리카에서 일어난 독립 운동의 파급 효과를 꼽을 수 있습니다.

또한 브라질의 농업 엘리트 역시 포르투갈과 브라질의 분리를 통해 상당한 이익을 얻을 수 있었습니다.

주요 원인 요약

브라질에서 식민지 협약(메트로폴리스 독점 체계)의 타파는 당시 지배 계급이었던 농업 귀족에게 절실한 과제였습니다.

그들은 이를 통해 본국의 독점 무역과 포르투갈 상인에 대한 종속에서 완전히 벗어날 수 있는 가능성을 보았습니다.

브라질 독립의 원인: 식민지 체제의 위기에서 독립 선언까지

1789년의 미나스 음모(Inconfidência Mineira)는 식민지 해방을 시도한 대표적인 운동 중 하나였습니다. 당시 중상주의 정책의 엄격한 규제는 지역 경제 발전을 가로막아, 식민지에 이익이 되는 어떠한 진보도 허용하지 않았습니다.

브라질 독립의 전조가 된 여러 반란 가운데 바이아 음모(Conjuração Baiana, 1798)는 가장 대중적인 성격을 띤 운동이었습니다. 노예, 흑인 자유민, 물라토, 백인, 빈민, 메스티소 등 다양한 계층으로 구성된 살바도르의 인구는 극심한 가난 속에 살았으며, 그 결과 사회적 차별이 없는 평등한 사회를 주창하게 되었습니다.

D. 조앙의 통치와 브라질 이양

1807년, 나폴레옹 보나파르트의 군사적 압박에 직면한 포르투갈 섭정 왕자 D. 조앙은 왕위를 지키기 위해 브라질로 피신하기로 결정합니다.

이 결정은 정치적 판도를 완전히 뒤바꾸었습니다. 포르투갈의 식민지였던 브라질이 포르투갈 정부의 소재지, 즉 제국의 중심지로 부상한 것입니다.

1808년 1월 28일, 살바도르 도착 단 6일 만에 브라질 항구 개항이 포고되었습니다. 이는 모든 우호국이 자유롭게 브라질과 무역할 수 있음을 의미하는 획기적인 조치였습니다.

이 덕분에 브라질 농촌 귀족들은 포르투갈 상인의 개입 없이 직접 무역을 할 수 있었고, 저렴한 가격에 공산품을 구입할 수 있게 되어 크게 환영했습니다.

항구 개방은 곧 식민지 협약의 사실상 종식을 의미했으며, 브라질 정치 독립으로 향하는 첫걸음으로 평가됩니다.

포르투갈-브라질-알가르브 연합왕국의 성립

1815년, 브라질은 포르투갈-브라질-알가르브 연합왕국의 일원으로 격상되었습니다. 이로써 브라질은 식민지 신분을 벗어나 본국과 동등한 법적 지위를 갖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이 변화는 D. 조앙이 브라질에 정착할 의도임을 드러내며 포르투갈 본토의 큰 불만을 샀고, 동시에 브라질이 포르투갈 제국의 실질적 중심지가 되었다는 사실을 확인시켜 주었습니다.

1816년 여왕 D. 마리아가 서거하자 D. 조앙은 D. 조앙 6세로 즉위하며 브라질에 계속 머물렀습니다.

하지만 같은 해를 전후해 정치적 해방을 요구하는 움직임이 거세졌고, 1817년에는 페르남부쿠 혁명이 일어났습니다. 이 투쟁의 배경에는 다음과 같은 요인들이 있었습니다.

  • 과중한 세금 징수에 대한 불만
  • 행정의 남용과 부패
  • 자의적이고 억압적인 군사 통치
  • 대중의 누적된 불만
  • 토착주의(내셔널리즘) 이념의 확산

포르투 자유 혁명과 독립의 길

1820년, 포르투갈 본토의 자율성 회복, 입헌 헌법 제정, 그리고 브라질의 재식민화를 목표로 하는 포르투 자유 혁명이 일어났습니다. 이러한 정세 속에서 D. 조앙 6세는 포르투갈로 환국하고, 아들 D. 페드루에게 브라질 섭정직을 위임했습니다.

이후 포르투갈 의회(코르테스)는 D. 페드루의 정치·행정·군사·사법 권한을 하나씩 무효화하고 그를 본국으로 소환하려는 각종 조치를 밀어붙였습니다.

이 소식은 브라질에서 선전포고처럼 받아들여져 폭동과 격렬한 불만의 표출로 이어졌습니다.

브라질인들은 D. 페드루가 떠나면 브라질이 분열과 붕괴의 길을 걷게 될 것을 우려하여 그의 잔류를 요청했습니다. 1822년의 '피코의 날(Dia do Fico)', 즉 '머무른다' 선언은 포르투갈과의 최종 결별을 향한 결정적 계단이 되었습니다.

이 사태는 정부에 심각한 위기를 초래했고, 코르테스에 충성하던 각료들은 줄줄이 사임했습니다. 왕세자는 브라질 정치적 해방의 핵심 인물인 호세 보니파시우(José Bonifácio de Andrada e Silva)를 수반으로 하는 새 내각을 구성했습니다.

이후 포르투갈에서 오는 모든 지시는 D. 페드루의 승인 없이는 집행될 수 없다는 원칙이 확립되었습니다. 그는 자신의 대의에 대한 지지를 확보하기 위해 상파울루 지방을 순행했습니다.

산투스에서 상파울루로 돌아오던 길에 그는 리스본으로 즉시 귀환하라는 포르투갈의 공문서를 접합니다. 동시에 호세 보니파시우와 아내 도나 레오폴디나(Dona Leopoldina)로부터 이 명령을 거부하라는 두 통의 편지도 함께 받았습니다.

결국 돔 페드루는 이 충고를 받아들여 1822년 9월 7일 포르투갈과의 남은 정치적 유대를 완전히 끊고 브라질의 독립을 선언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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