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대 로마에서 호민관(護民官, Tribunus Plebis)이 몇 명이었는지 묻기 전에, 먼저 짚어야 할 중요한 사실이 있습니다. 바로 호민관은 원로원의 구성원이 아니었다는 점입니다.
호민관은 원로원 소속이 아니었습니다
호민관은 원로원(Senatus)에 속한 직위가 아니라, 별도로 선출되는 공직이었습니다. 호민관의 존재 목적 자체가 원로원을 지배하던 귀족 계급인 파트리키(Patricii)로부터 평민인 플레브스(Plebs)의 이익을 보호하는 것이었기 때문입니다.
기원전 494년경 평민들이 국가를 떠나 성산에 집단으로 거주하겠다고 선언한 이른바 '성산 사건' 이후, 평민들은 자신들을 지킬 수 있는 전용 관직을 확보하게 되었고, 그것이 바로 호민관이었습니다.
그렇다면 호민관은 몇 명이었나?
초기에는 인원이 변동되었으나, 기원전 471년부터 매년 10명의 호민관이 평민회를 통해 선출되는 것이 제도화되었습니다. 이 10인 체제는 로마 공화정이 유지되는 동안 대체로 지속되었습니다.
호민관이 가진 강력한 권한들
- 거부권(Veto): 원로원이나 집정관 등 고위 관리의 결정이 평민에게 불리하다고 판단되면 '베토(veto, 나는 금지한다)'를 외치며 실행을 막을 수 있었습니다.
- 신성 불가침(Sacrosanctitas): 호민관의 신체는 신성한 것으로 간주되어, 호민관에게 폭력을 행사하는 것은 중대 범죄로 처벌되었습니다.
- 평민회 소집권: 평민회(Concilium Plebis)를 소집하고 주재하여 평민 결의안을 통과시킬 수 있었습니다.
원로원과의 긴장 관계
이처럼 호민관은 원로원 내부의 직책이 아니라, 오히려 원로원과 귀족 세력을 견제하는 역할을 했습니다. 그래서 원로원과 호민관 사이에는 끊임없는 긴장과 갈등이 존재했으며, 티베리우스 그라쿠스 같은 개혁파 호민관들이 토지 개혁을 추진하다 귀족들의 반발로 비극적인 최후를 맞기도 했습니다.
흥미롭게도 율리우스 카이사르와 아우구스투스 같은 강력한 정치가들은 호민관 권한을 차용해 자신의 권위를 높였는데, 이는 호민관이 로마 정치에서 얼마나 상징적이고 강력한 위치였음을 보여줍니다.
결론적으로, 로마 원로원에는 호민관이 앉아 있지 않았으며, 호민관은 매년 10명씩 선출되어 평민의 방패 역할을 하던 독립된 관직이었습니다. 원로원을 견제하는 존재였다는 점이 이 질문의 핵심 답변이라 할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