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럽의 역사

슈발리에 데옹(샤를 드 보몽): 성별을 넘나든 프랑스의 전설적 스파이

슈발리에 데옹(샤를 드 보몽): 성별을 넘나든 프랑스의 전설적 스파이슈발리에 데옹(Chevalier d'Éon), 본명 샤를 주느비에브 루이 오귀스트 앙드레 티모테 데옹 드 보몽(Charles Geneviève Louis Auguste André Thimothée d'Éon de Beaumont)(1728~1810)은 장기간 여성으로 위장해 활동한 것으로 유명한 프랑스의 비밀 요원이다.

1755년 루이 15세의 밀명을 받아 러시아 예카테리나 2세(옐리자베타 페트로브나)의 궁정에 잠입한 그는 여성 '리아 드 보몽'으로 변장해 황후의 낭독자가 됨으로써 의심을 피하고 프랑스-러시아 관계 개선에 기여했다. 7년 전쟁 중에는 용기병 대위로 참전했고, 이후 런던으로 파견되어 대사관 서기관으로 근무했다. 1777년 귀국 당시 루이 16세는 그에게 여성복을 벗지 말 것을 명령했고, 그는 '에옹 기사'라는 모호한 정체성으로 살게 되었다. 1783년 다시 영국으로 건너가 생을 마감했다.

슈발리에 데옹의 유년 시절

1728년 10월, 부르고뉴 토네르의 르네상스 양식 위제 저택에서 태어났다. 아버지 루이스는 귀족이자 파리 고등법원 변호사, 왕의 고문, 왕령지 관리자였다. 엄격한 교육 아래 라틴어와 수학을 익혔고, 파리의 콜레주 데 캬트르 나시옹에서 무용, 승마, 펜싱을 배웠다. 스무 살에 법학 과정을 수료하고 1749년 8월 변호사 자격을 얻었으나, 같은 해 10월 아버지 사망 후 상속 재산이 적어 베르티에의 도움으로 왕립 검열관(출판 전 서명) 직을 맡았다. 이후 신문 기고, 에세이, 저술 활동을 하며 펜티에브르 공작(루이 14세 손자), 로라게 백작, 니베르네 공작 등 유력 인사들과 교우했다.

베르사유에서의 첫 발걸음

젊은 과부 로슈포르 백작부인의 초대로 베르사유 가면 무도회에 참석한 데옹은 여성으로 분장해 눈길을 끌었다. 이 변장 능력을 눈여겨본 루이 15세는 콩티 공작이 이끄는 비밀 첩보 조직 '왕의 비밀(Secret du Roi)'에 그를 영입했다. 영프 동맹에 맞서 러시아와의 유대를 다지기 위해 1755년 7월, 스코틀랜드 출신 첩자이자 지질학자 더글러스 매켄지와 함께 '리아 드 보몽'으로 러시아에 파견됐다. 매켄지가 프랑스 첩자 냄새가 난다며 배척당하자, 리아가 황후에게 접근해 루이 15세의 친서를 전달하는 임무를 떠맡았다.

러시아에서의 활약

궁정 낭독자로 소개된 리아는 친서를 전달하고 3개월 후 프랑스 국왕에게 답신을 보고했다. 황후는 프로이센·영국에 맞서 프랑스와 동맹을 원했으나 '수블림 포르트(오스만 제국)'를 제거해야 한다고 했고, 루이 15세는 이를 수용할 수 없었다. 매켄지가 공식 사절로 파견되고 그 뒤를 '리아의 오빠' 에옹 기사가 따랐다. 불같은 성미로 임무를 완수해 황후의 신임을 얻었다. 귀국길에 다리가 부러졌음에도 러시아의 프로이센 공격 계획과 프로이센의 오스트리아전 패배 소식을 전하자, 루이 15세는 연금 3,000리브르와 금담뱃갑을 하사했다.

1757년 8월 용기병 중위로 임명되어 요양하며 각국 재정 에세이를 집필했다. 프오 연합군 패배와 프랑스-러시아 관계 냉각(루이 15세가 황후 손자의 대부 되길 거부) 소식을 접한 그는 세 번째 러시아행을 자청해 상황을 반전시켰다. 대사관 서기관으로 무능하고 방만한 대사를 대신해 궁정에서 신임을 얻었으나, 황후의 체류 제안을 사양하고 용기병 대령 직함을 받는 것으로 대신했다.

러시아에서 네 번의 겨울을 보낸 후 신임 대사 브르트유 남작에게 실망해 1760년 여름 천연두를 앓으며 귀국했다. 독일 전선이 열리자 브로이유 백작 휘하에 자원입대했으나, '젊은 여성의 우아함을 가진 위험한 방탕아'라는 수군거림이 돌기 시작했다. 예카테리나 2세가 즉위해 프로이센 편에 서면서 영불 화해가 필수적이 되었다.

영국에서의 첩보 활동

1762년 9월 니베르네 공작이 대사로 부임하며 데옹도 서기관으로 런던에 입성했다. 궁정에서 환영받고 조지 3세의 신임을 얻어 향후 강화 조약(1763년 2월 체결) 관련 문서를 입수해 쇼즐에게 급송, 협상력을 높였다. 귀국 시 입신 환영과 1년 치 봉급 보너스, 생루이 훈장, 니베르네 공작의 칭찬을 받았다.

다시 영국으로 돌아가 병든 니베르네 공작을 대신해 영국 해안 정찰 임무(상륙 작전 준비)를 맡았다. 하인 22명, 마구간 말 12필, 연일 연회를 베풀며 호화롭게 살았으나 프랑스 정부가 경비 지급을 거부하자 갈등이 깊어졌다. 새 대사 게르시 백작(데옹의 숙적)이 부임하며 상황은 악화됐다. 소환 명령을 무시하고 만찬 자리에서 결투를 유도당하는 처지가 되자, 독살 미수와 가택 수색을 겪은 뒤 루이 15세에게 직접 보고했다. 바스티유 감옥 수감 또는 영국 송환 위기 속에 1763년 12월 31일, 그는 런던에 남아 기밀 문서를 보관하기로 했다.

프랑스에서 계급을 박탈당하고 왕의 특사들을 홀대했다는 이유로 대역죄로 고발된 사이, 런던 여론은 데옹 편이었다. 게르시가 '정신병자, 남자도 여자도 아닌 자'라 비난하는 팸플릿을 뿌렸지만 패배했다. 데옹은 죽은 척하며 400쪽 분량의 저서로 게르시를 비겁자라 공격해 초판이 매진됐다. 프랑스는 불안에 떨었고, 그의 외무부 연금은 중단됐다.

게르시가 암살 시도까지 벌이자 데옹은 기밀 폭로로 맞섰다. 재판에 회부되자 친구 집에서 노파로 변장해 도피했다. 팸플릿 작가 베르지가 법정에서 게르시의 선제 공격을 증언해 1765년 2월 게르시가 살인죄로 유죄 판결을 받자 데옹은 안도하며 프랑스와 협력했다. 연금이 복권되었으나 자금난으로 왕의 특사들에게 기밀 문서를 팔아넘기기도 했다.

슈발리에 데옹(샤를 드 보몽): 성별을 넘나든 프랑스의 전설적 스파이1771년 3월, 데옹의 성별을 둘러싼 내기가 런던에서 성행해 수천만 파운드가 걸렸다. 프랑스에도 소문이 퍼지자 왕의 특사가 파견됐고, 데옹은 일부러 '여성임'을 확신시키며 프랑스가 자신을 화제 삼게 만들었다.

1773년 11월, 영구히 여성 복장을 조건으로 귀국을 허락하는 서한이 도착했다. 새로운 임무는 뒤바리 부인의 왕실 정사 회고록(테베노 드 모랑 저)을 회수하는 것. 800파운드를 제시했으나 왕이 거절하자 보마르셰 등 특사 2명이 파견돼 회고록을 소각했고, 비용은 15만 4,000파운드에 달했다.

프랑스 귀환과 강제된 여성의 삶

1774년 5월 루이 15세 사망으로 '왕의 비밀'은 해체됐다. 루이 16세는 문서 반환과 1만 2,000파운드 보상금으로 귀국을 허락했다가, 1775년 1월 데옹이 제출한 31만 8,000파운드 청구서를 보고 마음을 바꿨다.

런던에서 보마르셰를 만난 데옹은 가난한 독신 여성 행세를 하며 게르시와의 악연, 프랑스 왕의 외면, 귀국 열망을 호소했다. 보마르셰는 속지 않고 프랑스에 보고했고, '전권 위임' 권한을 얻어냈다. 기밀 문서 반환 조건으로 연금 1만 2,000파운드, 안전통행증, 여성 복장 및 '데옹 양(Mlle d'Éon)' 명의 사용 의무가 부과됐다.

보마르셰는 데옹의 성별을 끝까지 확인하려 했고, 지친 데옹은 타협안에 서명하면서도 요염한 연기를 해 두 사람의 결혼설이 런던 신문에 실리는 해프닝이 1년간 이어졌다. 보마르셰가 약속한 돈을 주지 않고 소문은 재점화됐으며, 법정에서 성별 해명을 강요받는 지옥 같은 나날이었다. 1777년 1월, 데옹은 모든 조건을 수용하고 짐을 쌌다. 스스로를 여성이라 믿으면서도 용기병 제복을 입은 채였다.

프랑스 귀환

8월 토네르에 도착하자 포성, 예포, 의장대, 연회, 불꽃놀이로 환영받았다. '남자로서의 마지막 시간'이었다. 베르사유로 향하던 중 친구 베르티에가 여성복을 권했다. "정치적·군사적 경력은 끝났다. 여성으로서의 영광이 시작될 것이다."

마리 앙투아네트 왕비가 동정해 2만 4,000파운드 의상비를 지원했다. 하이힐, 뾰족구두, 코르셋 고래뼈, 패션·헤어·장신구 화제에 적응하기란 고역이었다. 1777년 11월 23일, 로즈 베르탱이 지은 바스켓 드레스에 부채를 든 모습으로 알현했으나, 털 나고 근육질인 팔, 분칠 아래 드러난 수염, 거친 동작에 아무도 속지 않았다. 그런데도 모두 그를 에워싸고 초대했고, 검은 드레스 차림으로 계단을 네 칸씩 오르고 다리를 벌리고 앉는 기행이 화제가 됐다.

슈발리에 데옹(샤를 드 보몽): 성별을 넘나든 프랑스의 전설적 스파이미국 독립전쟁이 발발하자 참전을 원했으나 답이 없자 영국 귀환을 협박했고, 부르고뉴 유배 명령을 받았다. 이를 무시하고 용기병 대위 복장으로 거리를 활보하다 1779년 3월 20일 체포됐다. 오세르 수녀원, 디종 '황금 감옥'을 거쳐 토네르로 이송돼 외출 금지와 여성 복장 의무가 부과됐다.

소일거리로 토지 관리, 포도 재배, 가계도 작성(법원 기각), 마을 주민 구제, 독서와 사교로 시간을 보내다 1783년 파리 귀환을 허락받았다. 런던 집주인이 밀린 집세를 요구하며 서적·도서관·기밀 문서 경매를 예고하자 1785년 장관 승인, 여권, 6,000파운드를 받아 런던으로 갔다. 하지만 8,000권이 넘는 장서 이동이 불가능해 영국에 남기로 했다. 그곳에서 그는 알려지고 사랑받았다.

영국에서의 말년

생계를 위해 검술 시범, 결투 공연으로 연 400파운드를 벌었다. 생조르주 기사, 웨일스 공과 대련하기도 했다. 1791년 5월 장서 일부를 매각했다. 프랑스에서 '철 상자' 기밀 문서가 발견되자 토네르 자택이 수색돼 붉은 봉납 편지 꾸러미 9상자가 압수됐다.

공연으로 푼돈을 벌던 중 1796년 8월 검에 찔려 4개월간 생사 기로에 섰고 마비 증세가 남았다. 69세에 검술을 그만두고 친구 집에 기거하다 1804년 채무 불이행으로 5개월간 수감됐다. 프랑스 신부의 도움으로 석방됐으나 남은 건 다이아몬드 장식 생루이 훈장과 루이 15세 하사 금담뱃갑뿐, 둘 다 전당포에 맡겼다.

병들고 불구가 된 슈발리에 데옹은 1810년 5월 21일, 두 달 전 뇌졸중 후 편안히 잠든 듯 생을 마감했다. 입관 당시 옛 친구가 그의 진정한 남성성을 발견했고, 부검 결과 샤를 주느비에브가 남성임이 확인됐다. 쿠리에 유니베르셀이 6월 부고를 냈으나 이틀 뒤 주르날 드 파리가 성별 불확실성을 다룬 장문 기사를 실으며 논란은 다시 시작됐다.

참고 문헌

  • 「에옹 기사」 - 미셸 드 데커, 프랑스-엠파이어, 1999
  • 「머리도 꼬리도 없는 삶: 슈발리에 데옹」 - 에블린 르베르, 파야르, 200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