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10년 샤를 로아소(Charles Loyseau)는 관직을 '공적 기능을 수반하는 존엄'으로 정의했다. 관직은 국왕이 위임하는 공적 기능의 일부로, 국왕이 이를 창설하고 분배하며, 관직의 소유자는 어디까지나 그 사용·수익권을 지닌 존재에 불과했다. 따라서 근대적 의미의 관료란 곧 관직의 보유자, 다시 말해 칙령(관직을 창설하는 문서)과 국왕이 발급하는 임명장을 통해 규정된 공직의 담당자였다. 관직과 관료의 문제는 구정권(앙시앵 레짐) 시대 전체를 관통하는 핵심 사안이었다. 이는 군주국가의 발전과 맞물려 있었지만, 동시에 귀족부터 하층민까지 사회 모든 층위에 걸쳐 존재하는 매우 다양한 집단, 즉 '관료층'의 등장을 촉진하며 17세기 이후 프랑스 사회에 깊은 변동을 가져왔다.
앙시앵 레짐 시대 관직의 특징
관직은 왕국을 효율적으로 통치하기 위해 광범위한 직무를 포괄했다. 사법계 관직, 재정계 관직, 왕실에 속한 관직, 고등법원(파를레망) 관직 등 다양한 직책이 있었으며, 같은 관직이라 해도 부여되는 지위와 명예가 반드시 동일하지는 않았다. 일반적으로 사법 관직이 재정 관직보다 높은 명망을 누렸고, 최고위 관직의 경우 귀족 신분으로 진입할 수 있는 통로가 되기도 했다.
관직의 역할은 국가의 발전과 근대화 과정과 직결된다. 국왕은 영토에 대한 통제력을 강화하고자 했고, 이를 위해 점점 더 복잡한 체계 안에서 공적 직무를 관직으로 만들어 왕국 전역의 모든 행정 수준에 배치해 나갔다. 관료는 당대의 공무원이었으며, 국가의 발전과 더불어 그 수도 크게 늘어났다. 1515년 프랑수아 1세 즉위 당시 약 4,000명에 불과했던 관료 수는 1771년 루이 15세 치세에 이르러 5만 명을 넘어섰다.
관료 수의 증가는 또 하나의 중요한 특징, 즉 16세기에 걸쳐 점차 자리 잡은 관직의 매매성과 세습성과 연결된다. 17·18세기의 관직은 사실상 매매와 양도가 가능한 자리였다. 임명된 관료는 선서를 하고 '마르 도르(marc d'or)'라는 세금을 납부한 뒤 종신직을 수행했다. 국왕이 관직을 창설하고 수여한다 해도, 일단 수여되면 그 자리는 소유자가 사망하거나 사임하여 왕실로 환수될 때에만 공석이 되었다. 즉 관료는 관직의 소유자였지만, 그가 대표하는 기능 자체는 여전히 군주의 손에 남아 있었다. 그러나 점차 관료들은 사실상 해임 불가능한 지위를 갖게 되었고, 17세기부터는 새로운 즉위 때마다 모든 관료의 직위가 재확인되었으며, 여기에 고정 수입(가주/gages)과 변동 수입(에피스/épices)이 붙었다.
이론상 국왕은 관직을 무상으로 수여했다. 그러나 중세 말기부터 관직 수혜자가 감사의 표시로 국왕에게 일정 금액을 빌려주는 것이 관행이 되었고, 이 대출의 이자에 해당하는 것이 바로 가주였다. 이것이 점차 관직 매매제로 발전했다. 관직 취득 재정(finances de l'office)에 해당하는 금액을 지불함으로써, 그 금액은 군주제에 대한 영구 대부로 간주되었고 개인은 관직의 소유자가 되었다. 국왕은 점점 더 관직을 개인에게 판매하게 되었고, 개인들 사이에서도 관직 거래라는 별도의 시장이 형성되었다. 국왕은 이 시장에서 세수를 확보하기 위해 1522년 '특별 수입청(Bureau des Parties Casuelles)'을 설립했다.
이처럼 관직 매매제는 관직을 세습 재산으로 변모시켰고, 자연스럽게 자손에게 관직을 물려주는 문제가 대두되었다. 관직의 양도는 군주제가 허용하고 인정한 것이었다. 일반적으로 관료는 아들이나 가족 구성원에게 사임하는 형식으로 관직을 물려주어 가문의 재산으로 유지했다. 원칙적으로 자유로운 이 사임에는 '40일 조항'이 붙어 있어, 사임자가 40일 이상 생존해야만 양도가 유효했다. 그렇지 않으면 관직은 국왕에게 환수되고 가족은 관직 구매 당시 지불한 금액조차 되찾지 못했다. 따라서 국왕은 재정적인 이유에서 40일 조항이 발동되기를 바랐고, 이로 인해 분쟁이 끊이지 않아 어떤 가문들은 사망 사실을 은폐하기까지 했다.
앙리 4세 치세인 1604년, 샤를 폴레(Charles Paulet)의 이름을 딴 라 폴레트 칙령으로 관직은 완전히 세습제가 되었다. 관직 가치의 60분의 1에 해당하는 연례금을 납부하면 소유자는 40일 조항의 제약 없이 관직을 자유롭게 양도할 수 있게 된 것이다. 이때부터 관직은 매매되고 세습되는 재산이 되었으며, 그 결과는 여러 방면으로 나타났다.
17·18세기 관직의 변화
라 폴레트는 큰 성공을 거두었다. 관직은 왕국의 행정 수요를 충족하기 위해 늘어났을 뿐 아니라, 왕국 금고에 막대한 자금을 흘려넣을 수 있는 중요한 세수원이기도 했다. 1600년부터 1633년 사이 관직 판매 수입은 세수의 약 45%를 차지했다. 이 정책은 위기나 전쟁 시기에 활용하기 좋은 편법이었다. 국왕은 관직을 계속 늘리고 중복해서 만들었는데, 이미 관직을 가진 사람들은 자신의 직무가 분할되는 것을 막고 지위를 유지하기 위해 새로 창설된 관직을 되사는 수밖에 없었다. 또한 국왕은 연례금 갱신을 기회로 삼아 봉급 인상을 강제했고, 관료는 이 봉급을 받기 위해 추가로 돈을 지불해야 했다. 관직 창설은 활발했고 당국은 상상력을 발휘했다. 건초 압축업 감독관, 파리로 반입되는 버터·치즈·맥주 검사관 같은 기묘한 관직들이 만들어졌다. 관직의 재정적 중요성은 특권이 함께 따라오는 경우가 많다는 점에서 더욱 커졌다. 폴레트제의 도입으로 관직 가격은 크게 상승하여, 16세기 말부터 1635년 사이에 대체로 5배나 뛰었다. 강한 투기가 성행했고, 국가는 득을 보았기 때문에 이를 방치했다. 1665년에 이르러서야 콜베르(Colbert)가 이를 규제하고 최고 가격제를 설정했다.
관직의 다양성과 그 가치는 관료들이 자신의 관직에 깊은 애착을 갖게 만들었다. 그들은 관직에 얽힌 자본, 수입, 특권, 명망, 특권적 권한을 지키려 했고, 이를 일반 이익의 수호와 동일시하는 경향마저 보였다. 국왕은 두각을 나타내고자 하는 관료들의 사회적 상승 욕구를 교묘히 이용할 수 있었는데, 이는 효과적인 사회 동학의 증거였다. 그러나 국왕은 자신의 직접 통제 아래 있는 신하도 원했다. 그는 관료들의 독립성에 대항하기 위해 자신이 임명하고 필요하면 언제든 파면할 수 있는 '위임관(commissaires)'을 곁에 두었다. 위임관들은 신분이 불안정하여 왕의 뜻에만 의존하는 만큼 열성적으로 봉사했다. 이렇게 해서 관료와 위임관 사이에는 서열 다툼과 끊임없는 긴장이 존재했다.
18세기에 들어서도 관직의 수는 계속 늘어났지만, 가격은 오히려 큰 폭으로 하락했다. 새로운 관료의 유입을 막기 위한 지역적 전략도 등장했다. 일부 지방에서는 기존 관직의 가치 하락을 막기 위해 새 관직 설치에 맞서기도 했다. 실제로 관직은 낮은 가주와 에피스 때문에 점점 매력을 잃어갔다. 투자금은 회수하기 어려웠는데, 폴레트 연례금이 실제 가격이 아닌 공식 가격 기준으로 산정되어 부담이 무거웠기 때문이다. 그 결과 수요자를 찾지 못하고 공석으로 남는 관직이 늘어났다. 기존 관료 집단은 저렴해진 관직 가격을 틈타 새로 진입하려는 외부인을 차단하기 위해 점점 폐쇄적인 성향을 띠게 되었다.
그럼에도 관직 시장은 여전히 풍성했고 왕국의 수요를 충족했다. 가격은 하잡이 직책의 몇천 리브르부터 최고 명예 직책의 백만 리브르까지 다양했다. 관직은 여전히 큰 명망을 누렸는데, 특히 빠른 귀족 진입을 가능하게 하는 자리도 있었다. 대표적인 것이 '국왕 서기 참사관' 직책으로, 한 세대 만에 평민 출신의 흔적을 씻어낼 수 있다 하여 '빌랭용 비누(savonnette à vilain)', 곧 '천민용 비누'라는 별명으로 불렸다.
관료들의 위계 질서
위계의 바닥에는 하급 하잡이 관료들의 대중이 자리했다. 이들은 앙시앵 레짐 프랑스의 수많은 소직업에 해당하는 임무를 수행하며 왕국의 행정적 기반을 이루었고, 지방 소명망(소귀족·유지층)의 우위를 확립하는 토대가 되었다. 이런 관직은 적은 수입에도 불구하고 흔히 한 가문에 여러 세대에 걸쳐 유지되었다. 이를 통해 보유자는 익명성에서 벗어날 수 있었고, 때로는 다른 경력의 출발점이 되기도 했다.
정점에는 '고위 로브(법복 귀족)'의 작은 세계가 있었다. 최고위 사법 관직을 보유한 이들로, 한두 세대 만에 귀족이 되며 큰 명망을 누렸다. 재정계 관직은 상대적으로 대우가 낮았고 귀족화도 더디었다. 한편 열두 개 남짓한 도시는 파리, 툴루즈, 투르, 앙제 등에서처럼 시 참사관(오늘날의 시의회에 해당하는 직책)에게 귀족 신분을 부여했다. 이를 통해 잘 정돈된 틀 안에서 '명예로운 경력(cursus honorum)'을 밟아 나가는 고등법원 귀족(입법 귀족)이 등장했다. 각종 자격 요건 외에도 특정 직책에는 연령 제한이 있었다. 이론상 외국인은 배제되었지만 루앙처럼 50%까지 수용한 도시도 있었다. 품성과 도덕성이 요구되었으나 면제 사례도 많았다.
중간층에는 수많은 '중간급' 관료들이 있었다. 이들은 재정 관청, 염세 창고, 바이야슈와 슈네셰(지방 사법구), 그리고 고등법원이 없는 도시들에서 중간 직위를 차지했다. 이들은 귀족이 아니었고 그 관직 역시 귀족 신분을 부여하지 않았다. 주로 도시와 지방의 엘리트 출신으로, 관직 가격이 하락한 틈을 타 관직 세계에 진입한 비교적 신생 집단이었다. 이들은 자신의 능력을 바탕으로 지방적 뿌리를 내세워 고유의 정체성을 만들어 갔으며, 평생의 근무 기간 동안 작은 재산을 쌓아 올리는 경우가 많았다.
참고 문헌
- 뤼시앙 벨리(Lucien Bély), 『앙시앵 레짐 사전(Dictionnaire de l'Ancien Régime)』, PUF, 2009.
- 아를레트 주아나(Arlette Jouanna), 『르네상스의 프랑스(La France de la Renaissance)』, Tempus, 2009.
- 조엘 코르넷(Joël Cornette), 『절대왕정과 계몽(Absolutisme et Lumières)』, 아셰트(Hachette), 200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