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럽에서 흑사병(페스트)이 마지막으로 대대적으로 창궐한 것은 1720년으로, 이는 "마르세유 페스트"로 역사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 역병은 당시 인구 75,000명 중 40,000명의 목숨을 앗아갔으며, 마르세유는 고대 이래 이 질병으로 무려 20번째 유행을 겪고 있었습니다. 15세기에는 아홉 차례나 덮쳤고, 17세기에는 리슐리외 추기경과 루이 14세의 노력으로 의심스러운 선박의 입항을 막고 엄격한 검역 제도를 운용하며 방역에 성공했었습니다. 그러나 섭정 시대(1715~1723)에 접어들어 도덕적 해이가 만연하자 상황은 완전히 달라졌습니다.
1720년, 페스트는 어떻게 마르세유에 들어왔나?
1720년 5월 14일, 그랑 생 앙투안(Grand Saint Antoine)호라 불리는 네덜란드 플루트선(flute, 화물선)이 마르세유 앞바다 프리울 제도 인근에 나타났습니다. 이 배는 아시아산 고급 직물과 목화 10만 크라운 어치를 싣고 1월 31일 시돈(Seyde)을 출항했습니다. 일부 증언에 따르면 이 배는 페스트가 창궐하던 다마스쿠스 등지에 기항했고, 트리폴리에서는 폭풍으로 돛이 손상되자 페스트로 승조원 전원이 사망한 배에서 돛을 빌려 썼다고 합니다. 반면 모든 기항지가 청정 지역이었다는 '청정 특허장(patentes nettes)'을 소지했다는 주장도 있었습니다.
그럼에도 선상에서 승객 1명, 선원 7명, 외과의사 1명 등 사망자가 발생했습니다. 선장 샤토(Chataud)는 중병임을 인지하고 리보르노에 들러 이탈리아 당국으로부터 '악성 전염열' 진단서를 발급받아 마르세유에 정식 입항했습니다. 5월 27일에도 선원 1명이 추가로 사망했습니다.
화물은 선장 샤토와 마르세유 유력 인사들(시의원 에스텔 포함) 소유로, 보카르(Beaucaire) 시장에서 빨리 팔기 위해 단 4일 만에 하역되었습니다. 통상 의심 선박은 엄격히 격리되지만, 당국은 '약간의 의심'만으로 자르(Jarre) 섬으로 가벼운 격리를 명했고 선원들은 20일 만에 풀려났습니다. 하지만 이미 재앙은 도시 거리로 스며든 뒤였습니다.
1720년 페스트의 첫 희생자들
6월 20일, 58세 세탁부 여인이 입가에 종기(림프절염)를 달고 거리에서 쓰러졌습니다. 6월 28일 같은 동네에서 재단사와 아내가, 7월 1일에는 또 다른 여인이 코에 숯덩이 같은 괴저 증상을 보이며 사망했습니다. 최초 감염자들이 직물 화물을 만졌던 것으로 보아, 페스트 벼룩이 직물 주름 속에 숨어 있었고 쥐벼룩에 물린 후 3일 내에 패혈증으로 사망하는 전형적인 경로였습니다.
위생 상태가 열악하고 과밀한 도시에서 하루 1~2명씩 사망자가 나오며 병은 빠르게 퍼졌습니다. 7월 9일, 의사들이 13세 소년의 증상을 보고 페스트를 의심해 당국에 알렸으나, 시당국은 통상 교역에 지장을 줄까 봐 사망 사실을 은폐하려 들었습니다. 이 시점부터 우리는 이 병을 '페스트'라 부르게 됩니다. (병원체인 예르시니아 페스티스Yersinia pestis는 1894년 알렉산드르 예르생이 발견하여 명명되었습니다.)
7월 18일, 담당 의사 중 한 명인 페이소넬(Peyssonel) 씨가 시의원들에게 위험이 임박했음을 경고했지만, 7월 23일 하루에만 한 거리에서 14명이 사망하는 참상이 벌어졌습니다. 공포에 휩싸인 시민들 앞에서 시의원이 취한 조치는 감염 구역 입구에 경비병을 세우고, 시신과 가족들을 한밤중에 몰래 옮기는 것이 고작이었습니다.
페이소넬 의사는 인근 도시에 경보를 보냈고, 이들은 즉각 마르세유와의 교역과 왕래를 금지했습니다. 랑그독 지역을 넘어 루데즈(Rodez), 툴루즈(Toulouse)까지 프로방스 출신자는 격리되었고, 물품은 40일간 '통풍(소독)' 과정을 거쳐야 했으며, 건강 증명서 없이는 이동할 수 없었습니다. 우편물 역시 지역 영사 입회 하에 향료로 소독해야 했습니다.
마르세유의 교역이 끊기자 식량난이 닥쳤습니다. 도시에서 2리그(약 8km) 떨어진 엑상프로방스 길, 오바뉴 길, 에스타크 항구 등 세 곳에 장이 서 상인들이 이중 장벽 뒤에서 식량을 팔았습니다.
시민들은 공포에 질려 도시를 떠났습니다. 내륙 고지대로, 배편으로 짐을 챙겨 도망쳤습니다. 곧 성직자들과 시의원들, 그리고 벨뮁스(Belsunce) 주교의 신심에 이끌린 소수만 남았습니다. 주교의 지휘 아래 민병대가 편성되어 감염 가옥을 정리하고 질서를 유지하며 빈민을 도왔습니다. 강제로 징발된 '까마귀들(corbeaux)'이 시신을 수레로 실어 날랐으나, 도중에 고인의 물품을 훔치는 일도 비일비재했습니다.
참혹한 절정기
7월 30일 하루 40명, 8월 9일 100명, 8월 15일 300명으로 사망자가 폭증했습니다. 8월 21일 새로운 감염 파동이 남아있던 경비병과 죄수들까지 휩쓸었습니다. 생존한 시의원 무스티에(Moustier) 등이 무감염자들과 직접 시신 수백 구를 치워야 했습니다. 수백 명의 죄수가 동원되었으나 6일 만에 전원 사망해 거리에 시신이 다시 쌓였습니다. 하루 800명, 8월 30일부터는 하루 1,000명씩 죽어 나갔습니다.
시신은 곳곳에 쌓였고, 마르세유 최고 산책로 '쿠르(Cours)'의 나무 아래 병자들이 몰려들었습니다. 시청은 '까마귀'가 부족해지자 죄수들을 동원해 하루 20대 이상의 수레가 쉴 새 없이 시신을 실어 날랐습니다. 개들도 떠돌다 죽어 바다에 버려졌고, 더위와 햇살 속에 악취는 지독했습니다.
감염 위험이 큰 구덩이는 석회와 흙으로 덮었습니다. 시신 수가 너무 많아 교회 지하 납골당을 개방해 시신을 안치하고 석회를 부어 거리를 비웠습니다. 남은 환자는 격리하고 가옥은 소독·훈증 후 시신을 화장했습니다. 작업자들은 루이 13세 주치의 드 로르므(De Lorme)가 고안한 부리 모양 마스크(정향, 로즈마리 등 방향제 삽입)와 모로코산 가죽 장화, 가죽 바지, 셔츠, 모자, 장갑으로 무장했습니다.
전 세계에서 기상천외한 처방이 쏟아졌습니다. 두꺼비 가루, 독사 심장과 간으로 만든 알약 등. 그중 식초 적신 해면을 입에 대는 것이 가장 효과적이라는 얘기도 있었습니다. 흥미롭게도 염소지기, 마부, 기름 장수 세 직업군은 페스트를 피했다고 합니다. 동물 냄새와 기름 냄새가 쥐벼룩을 쫓았기 때문이라는 해석입니다.
영웅들도 있었습니다. 로즈(Roze) 기사와 그가 부린 갤리선 노역수들이 1,000~2,000구의 시신을 수습해 매장했습니다. 성직자 5분의 1을 잃은 벨뮁스 주교는 매일 병자를 찾아 성사를 베풀고 거액을 시주했습니다. 시의원 무스티에, 에스텔, 화가 세르(Serre), 해군 중위 제랭-리카르(Gérin-Ricard), 의사들도 헌신했습니다.
9월 중순 마르세유 출입이 전면 금지되고 우편물 소독이 시행되었습니다. 문제의 직물과 선박은 9월 26일 자르 섬에서 소각되었지만, 이미 균은 프로방스와 랑그독 내륙 깊숙이 퍼진 뒤였습니다. 9월 21일에도 400명이 사망했습니다.
불행의 끝자락
9월 말, '생 로슈의 지팡이'라 불리는 막대기에 의지해 음식을 찾아 헤매는 빈민들이 보였습니다. 그들은 병을 이겨낸 생존자들이었고, 이들의 증언을 통해 '페스트에 두 번 걸리지 않는다'는 면역 사실이 확인되었습니다. 피난 갔던 주민들이 돌아오자, 텅 비어 죽음의 도시가 된 마르세유의 모습에 경악했습니다.
10월 1일부터 사망자가 감소했습니다. 거지들은 자선원으로 보내졌고 병원은 페스트 전문 병원으로 전환되었습니다. 벨뮁스 주교는 11월 1일 예수 성심께 도시를 봉헌하는 미사와 행렬, 도시 문장이 새겨진 초 봉헌 의식을 거행했습니다. 11월 30일 하루 사망자는 2~5명으로 줄었습니다.
교황청령(아비뇽령)은 보클뤼즈(고르드, 레뮈르)에 페스트 장벽(Mur de la Peste)을 쌓아 베나생 백작령(Comtat Venaissin)을 보호했습니다. 길이 27km의 드라이스톤 벽이었습니다. 1721년 3월에는 뒤랑스 강과 몽방투 사이에도 프랑스 군이 지키는 또 다른 장벽을 세워 베나생 백작령과 아직 페스트가 닿지 않은 도피네(Dauphiné) 사이를 차단했습니다.
이후의 여파와 종식
마르세유는 1721년 2월 페스트에서 벗어났으나, 툴롱과 엑상프로방스로 번졌습니다. 3~4월 마르세유에서 250명가량 추가 사망자가 나왔으나 이들은 재발 환자로 전염력은 약했습니다. 시의원은 즉각 성문을 닫고 부유층과 빈민용 병원을 따로 지어 빈민 치료는 시비로 부담했습니다.
6월 다시 20명이 발병하자 의사들은 시민을 안심시키고 절차를 수립했습니다. 각 구에 위원을 두고 붉은 십자가 표시된 감염 가옥을 청소하게 했습니다. 물건을 다 버리고 방향초, 화약, 비소 등으로 세 차례 훈증한 뒤 벽과 바닥에 석회를 한두 겹 칠했습니다.
선박 소독과 물품의 인근 섬 이송, 시신 안치된 교회의 문 봉인과 틈새 메우기, 도피 기간 중 도난당한 물품 색출 등 후속 조치가 이어졌습니다. 도난품 회수에 시민들이 협조하며 비로소 안정을 되찾았습니다.
1720년 마르세유 페스트의 피해 집계
1720년 초 9만 명에 달하던 마르세유 인구는 반토막 났습니다. 시내 4만 명, 근교 1만 명 등 동남부 전체에서 12만 명이 사망했습니다.
화근이 된 샤토 선장은 기만 혐의로 투옥되었습니다. 9월 8일 이프 성(Château d'If)에 수감되어 '검역 명령 위반, 허위 신고, 검역 전 물품 반입, 격리 중 선원 도주 방조' 혐의를 받았습니다. 1721년 4월 7일 해군 왕립 감옥으로 이감되었다가 1723년 7월 8일 '면소 및 재판 종결' 판결을 받고 8월 3일 석방되었습니다.
1802년 쿠르 광장에 벨뮁스 주교 동상이 세워졌다가 현재는 마조르 대성당 앞 광장으로 이전되었습니다. 시내 곳곳에 시의원들 이름을 딴 거리가 있고, 마르세유 역사박물관에 시의원들을 기리는 기념패가 전시되어 있습니다.
참고 문헌
- Marseille, ville morte : La peste de 1720, collectif, Éditions Autre Temps, 2008.
- La Malédiction du Grand Saint-Antoine, Patrick Mouton, Éditions Autre Temps, 2001.
- Relation de la peste de Marseille en 1720, abbé Papo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