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랑스 인민전선(Front populaire)은 1936년 6월부터 1938년 4월까지 프랑스를 통치한 좌파 정당들의 연합체였다. 레옹 블룸(Léon Blum)의 총리 취임으로 정권을 잡은 인민전선은 프랑스 좌파의 기억에 깊이 새겨진 주요 사건이다. 그 기원은 1934년 2월 6일 극우파의 폭력 시위에서 비롯된다. 그동안 급진파, 사회당, 공산당으로 분열되어 있던 좌파는 극우의 부상에 맞서 연대를 결의했다. 전례 없는 파업 물결이 정부를 뒷받침하며 노사 협상을 이끌었고, 유급휴가 도입, 단체협약 체결, 임금 인상 등 중요한 사회적 성과를 남겼다.
좌파의 각성과 연대
1929년 대공황 이후 경제·정치적 불안정은 좌파에게 유리하게 작용했고, 좌파는 1932년 5월 총선에서 승리했다. 좌파 활동가들은 1934년 2월 6일 폭동을 파시스트 쿠데타 시도로 해석하며, 우파 결사체에 맞선 행동 통일을 각 당에 요구했다. 이 사건은 정치 체제가 불안정 조장에 취약함을 드러냈고, 결사체들이 민주주의에 가하는 위협을 부각시켰다.
1934년 4월, 공산당 서기장 모리스 토레즈(Maurice Thorez)가 모스크바를 방문한 뒤 귀국해 사회당과의 적극적 협력을 모색했다. 1934년 7월, 공산당과 사회당은 행동 통일 조약을 체결했다. 1935년 8월, 코민테른(공산주의 인터내셔널) 제7차 대회는 이 노선을 확정했다. 공산주의 운동은 1928년부터 사회당을 '사회배신자'로 규정하며 일체의 연대를 거부하던 '계급 대 계급' 전술을 포기하고, 모든 국가에서 '통일 반파시즘 전선' 또는 '인민전선' 결성을 권고했다.
좌파 정당의 접근은 두메르그(Doumergue) 총리의 사임으로 더욱 탄력을 받았다. 행정부 권한 강화를 이루지 못한 두메르그에 이어 짧은 플랑댕(Fludin) 내각을 거쳐 라발(Laval) 총리가 들어섰는데, 그의 금융·외교 정책이 좌파에 호재로 작용했다. 라발은 프랑화의 금태환 평가를 고수하며 평가절하를 거부하고, 수출 증대 대신 생산비 절감으로 외자 시장을 회복하려 했다. 그는 포고령을 통해 공공지출 10% 삭감(연금, 공무원 봉급, 참전용사 연금 포함), 유가증권세 및 고소득세 인상 등 강력한 디플레이션 정책을 폈다.
좌파는 이를 '비참의 포고령'이라 비난하며 여론의 불만을 흡수했다. 급진당은 1935년 10월 당대회에서 국민연합 탈퇴와 인민전선 합류를 결정했다. 한편 1935년 라발이 소련과 협정을 체결하자, 스탈린은 독일을 겨냥한 프랑스의 재무장 정책을 공개 지지할 명분을 얻었다. 그 결과 1920년 이래 군사 예산 투표를 거부해온 프랑스 공산당이 다시 국방 예산에 찬성표를 던지며 정치적 고립에서 벗어났고, 급진당과의 접근에 걸림돌이 사라졌다.
인민전선의 승리
1936년 4월 총선이 다가오자 급진당, 사회당, 공산당은 '빵, 평화, 자유', '파시즘은 지나가지 못한다' 같은 공동 구호 아래 연대 시위를 벌였다. 각 당은 결선 투표에서 인민전선 후보 중 득표율이 가장 높은 후보를 지지하기로 합의했다. 1936년 5월 3일, 이 투표 규율 덕분에 좌파는 우파보다 160석 더 많은 의석을 확보했다. 레옹 블룸이 국무회의 의장(총리)에 올랐고, 6월 4일 프랑스 역사상 최초의 사회당 주도 내각이 출범했다. 내각에는 여성 장관 3명과 다수의 급진당 장관이 포함되었으며, 공산당은 입각하지 않고 외곽에서 지지했다.
동시에 공장 점거를 동반한 파업 물결이 전국으로 번져 약 200만 명의 노동자가 참여했다. 사용자 측과 재통합된 CGT(노동총동맹)는 1936년 6월 7일 정부 입회 하에 마티뇽 협정(Accords de Matignon)을 체결해 단체협약 제도와 7~15% 임금 인상을 보장했다. 며칠 뒤 사회법령으로 주 40시간 노동제가 도입되고 연간 12일의 유급휴가가 신설됐다. 이 결정에 토레즈는 노동자들에게 작업 복귀를 호소했다('파업을 끝낼 줄도 알아야 한다').
정부는 프랑스은행 이사회를 장악했고, 농민 소득 안정을 위해 밀 사무소(Office du blé)를 설치해 곡물 최저 보장 가격을 정했다. 1937년에는 철도망이 국유화되어 SNCF(프랑스 국철)로 통합되었고, 군수산업이 국가 관리 하에 들어왔으며 블룸 정부는 즉각 프랑스 재무장에 착수했다.
스페인 내전이라는 딜레마
1936년 2월 스페인에서 프렌테 포퓰라르(Frente Popular)가 선거 승리를 거두자 프랑스 여론은 스페인 상황을 주시했다. 7월 프랑코의 호소로 스페인령 모로코 주둔군이 봉기하자, 마드리드 정부는 블룸에게 긴급 전보를 보냈다: '위험한 군사 쿠데타에 직면했습니다. 무기와 항공기로 즉각 도와주십시오. 형제애로, 기랄.'
같은 날 뤼마니테(L'Humanité), 르 퓌플레르(Le Populaire, 사회당 기관지), 레르 누벨(L'Ère nouvelle, 에리오 계열 급진당지)은 인민전선이 프렌테 포퓰라르와 연대함을 선언했다. 20일 블룸은 이본 델보스(Yvon Delbos) 외무장관과 에두아르 달라디에(Édouard Daladier) 육군장관에게 스페인 정부의 호소에 응할 것을 촉구했다. 23일 블룸은 런던을 방문해 영국의 개입을 요청했으나 거절당했다. 같은 날 언론에서 논쟁이 불붙었다. 레코 드 파리(L'Écho de Paris)는 레몽 카르티에(Raymond Cartier)의 기고문 '프랑스 인민전선은 스페인 인민전선에 무기를 줄 것인가?'를 실었고, 이후 영국 정부의 반대 입장과 프랑스 항공기 인도 내역을 보도했다.
인민전선은 분열했다. 공산당과 사회당은 개입을 찬성했으나, 급진당은 에리오의 목소리로 반대했다. 급진당 소속인 달라디에와 델보스 장관도 입장이 갈렸다. 참모본부와 알베르 르브룬(Albert Lebrun) 대통령은 우려를 표했다. 7월 25일 임시 국무회의에서 장관들은 격론을 벌였고, 타협안이 도출되었다: 물자를 멕시코 경유로 최대한 은밀히 수송하되, 공식적으로는 강력히 부인하기로 했다.
어려움의 가중과 인민전선의 종언
1937년 초부터 블룸 정부는 난관에 봉착했다. 스페인 내전 대응을 둘러싼 내부 분열, 우파의 공세 강화, 민족주의 언론(액시옹 프랑세즈 Action française, 그랑구아르 Gringoire, 칸디드 Candide)의 블룸에 대한 악의적 반유대주의 선동과 장관들에 대한 인신공격(특히 장 자이Jean Zay, 로제 살랭그로Roger Salengro는 전쟁 중 탈영 혐의로 매일같이 공격받다 자살로 내몰림)이 이어졌다.
하지만 인민전선이 1938년 봄 와해된 결정적 원인은 경제 위기 해결 실패였다. 실업이 지속되고 산업 생산은 정체했으며, 재정 적자는 심화되고 금이 해외로 유출됐다. 1936년 10월 1일 프랑화 평가절하로 수출업계에 숨통이 트였으나, 노조가 요구한 주 40시간제의 경직적 적용으로 주문이 회복된 부문에서 병목 현상이 발생했다.
노동시간을 탄력적으로 운용할 수 없자 설비 현대화로 생산성을 높여야 했지만, 사용자들은 공장 점거 재발을 우려해 투자를 거부했다. 2년간 투자가 11% 감소했고, 블룸이 외환 통제를 포기하면서 자본의 해외 유출은 더욱 용이해졌다. 낙심한 블룸은 1937년 6월 사임했고, 인민전선은 1938년 3월 해체됐다. 임금 인상이 물가 상승으로 상쇄되어 경제적으로는 실패였으나, 1936년 6월의 사회법령이 노동계급의 존엄을 회복시켰다는 점에서 역사적 성공으로 기억된다.
참고 문헌
- Histoire du Front populaire. La Belle Échappée, Jean Vigreux, Tallandier, 2016.
- 1936, le monde du Front populaire, Serge Wolikow, Cherche Midi, 2016.
- Le Front populaire, Jean Vigreux, PUF, 20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