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44년 7월 20일, 클라우스 셴크 그라프 폰 슈타우펜베르크(Claus Schenk Graf von Stauffenberg) 대령이 이끄는 저항 세력은 '총통 본부'에 폭탄을 터뜨려 아돌프 히틀러를 암살하려 했습니다. 그러나 계획은 실패로 돌아갔고, 저항 세력은 처형되었으며 그들의 자녀들은 하르츠 산맥의 작은 마을 바트작사(Bad Sachsa)로 강제 이송됩니다.
1944년 여름, 게슈타포는 하르츠 산맥 보른탈(Borntal)에 있는 바트작사의 한 요양원을 강제로 정리했습니다. 그곳에 있던 모든 어린이와 청소년, 보호자들은 거리로 내몰렸습니다. 그 자리는 "가족의 보호"를 받게 될 아이들, 즉 1944년 7월 20일 히틀러 암살 미수 사건 가담자들의 자녀들을 위해 비워진 것입니다.
암살 시도 불과 몇 시간 만에 히틀러는 저항 세력을 "지금 무자비하게 절멸되고 있는 집단"이라 규정했습니다. 하인리히 힘러(Heinrich Himmler)는 "그들에게는 반역자의 피가 흐른다"며 친족 전체에 대한 "절대적 씨족 책임(Sippenhaft)"을 선포했습니다. 바트작사에는 최대 200명의 어린이와 청소년을 수용할 계획이었습니다. 신원을 박탈당하고 새 이름을 부여받은 아이들은 훗날 입양 가정으로 넘겨질 예정이었습니다. 목표는 단 하나, "총통·민족·조국"을 위한 아이들의 완전한 재교육이었습니다.
게슈타포에 의해 바트작사로 끌려간 아이들
형제자매들은 대개 서로 다른 기숙사에 따로 수용되었습니다. 1944년 8월부터 9월까지 나치는 총 46명의 저항군 자녀를 바트작사로 데려왔습니다. 나이는 생후 1개월에서 15세까지였습니다. 그중에는 당시 7세였던 프리드리히-빌헬름 폰 하제(Friedrich-Wilhelm von Hase)도 있었습니다. 장교이자 저항 세력 일원이었던 그의 아버지 파울 폰 하제(Paul von Hase)는 1944년 8월 8일 베를린에서 나치에 의해 교수형에 처해졌습니다. 아버지가 처형된 지 5주 후, 게슈타포는 어느 밤 소년을 잠결에 침대에서 끌어내 바트작사의 요양원으로 옮겼습니다.
"우리는 정체성을 강탈당했습니다"
소년은 홀로 남겨졌습니다. "형제자매들은 나보다 나이가 많아 감옥에 있었고, 어머니도 물론 갇혀 있었습니다. 나 혼자만 이곳에 남겨졌죠. 우리의 정체성을 빼앗겼기 때문에 고통스러운 상황이었습니다. 아이에게 정체성은 실존적으로 매우 중요한 문제입니다." 2019년 NDR 다큐멘터리 '히틀러의 분노 — 바트작사의 아이들'에서 당시 82세였던 그는 이렇게 회상했습니다.
어린 나이에 납치당한 괴르델러 형제
클라우스 셴크 폰 슈타우펜베르크의 아들 베르톨트 역시 바트작사로 추방되었습니다. 그리고 1945년 2월 7일, 칼 괴르델러(Carl Goerdeler)의 손자들이 보른탈에 도착했습니다. 칼 괴르델러는 쿠데타가 성공했더라면 새 제국 수상이 될 예정이었던 인물로, 1945년 2월 2일 처형되었습니다. 형 라이너(Rainer Goerdeler)는 당시 4세, 동생 카를(Carl)은 생후 16개월이었습니다. 1945년 7월에야 감옥에 갇혀 있던 어머니 이르마(Irma)가 바트작사로 찾아와 두 아이를 데려갈 수 있었습니다.
수십 년이 지난 지금도 버림받았다는 상처의 트라우마는 여전히 깊습니다. 동생 카를 괴르델러는 2019년 NDR과의 인터뷰에서 "어린 시절 겪은 기이한 경험 때문에 지금도 속으로 오싹함을 느낍니다"라고 털어놓았습니다.
"오늘날에도 깊은 외로움이 남아 있습니다"
또 다른 피해 아이들은 당시 8세였던 헬름트루드(Helmtrud)와 그녀의 오빠 알브레히트였습니다. 알브레히트 폰 하겐(Albrecht von Hagen)의 딸인 헬름트루드와 남매는 "슐츠(Schulz)"라는 성을 강제로 부여받았습니다. 그들의 아버지 알브레히트 폰 하겐은 히틀러 암살 음모 가담자 중 한 명으로 처형되었고, 어머니 에리카(Erica)는 체포되었습니다. 그러나 아이들은 그 어떤 것도 알지 못했습니다. 헬름트루드는 부모에게 버려진 듯한 느낌을 받았습니다. "답장을 기다리며 기대 가득한 편지를 썼지만, 답이 없으니 너무 괴로웠습니다. 그래서 외로움이 날로 깊어졌죠. 오늘도 깊은 외로움을 느끼며, 타인을 대할 때 조금씩 의심하게 됩니다."라고 그녀는 회상합니다.
1945년 4월, 강제수용소행 직전에 막힌 운명
계획됐던 200명 대신 바트작사에 수용된 아이는 46명에 불과했습니다. 1945년 2월 중순부터는 그중 18명만이 구금 상태로 남았습니다. 나치는 이미 대부분의 아이들을 석방해 고향으로 돌려보낸 상태였습니다. 남은 아이들은 몇 주 후 가까스로 죽음을 면합니다. 종전 직전인 1945년 4월 3일, 이들은 노르트하우젠(Nordhausen)을 거쳐 부헨발트 강제수용소로 호송될 예정이었습니다. 그러나 전날 밤 폭격으로 기차역이 파괴되면서 열차 운행이 불가능해졌고, 아이들은 강제수용소 대신 바트작사로 되돌아올 수 있었습니다.
새 시장, 아이들을 개인 보호 아래 두다
얼마 지나지 않아 미군이 이 지역을 접수했고, 사회민주당 출신 윌리 뮐러(Willy Müller)가 시장 대리로 임명되었습니다. 그는 아이들을 자신의 개인적 보호 아래 두었습니다. 한 아이의 일기에는 그가 남긴 말이 그대로 적혀 있습니다. "이제 여러분의 이름은 예전 그대로입니다. 여러분의 이름도, 여러분의 아버지도 영웅이었기에 부끄러워할 필요가 없습니다."
오늘날 바트작사의 상설 전시에서는 요양원에 수용되었던 아이들의 운명에 관한 정보를 만나볼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