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럽의 역사

Wacken Open Air 30년 역사: 800명의 시골 축제가 세계 최대 헤비메탈 페스티벌이 되기까지

1990년 8월, 독일 북부의 작은 시골 마을에서 단 800명의 관객과 6개 지역 밴드로 시작된 축제가 있었습니다. 30여 년이 지난 지금, Wacken Open Air(바켄 오픈 에어)는 연간 약 8만 명이 운집하는 세계 최대 헤비메탈 페스티벌로 자리 잡았습니다. 교회 종과 트랙터 엔진 소리 대신 기타 리프가 울려 퍼지게 된 이 마을의 놀라운 변천사를 처음부터 되짚어 봅니다.

Wacken — 평범해 보이지만 결코 평범하지 않은 마을

킬 운하 인근에 위치한 바켄(Wacken)은 슐레스비히홀슈타인 북부의 전형적인 시골 마을입니다. 젊은이보다 젖소가 더 많고, 드넓은 초록 들판 사이로 은혼식을 맞은 부부들의 이야기가 오가는 곳이죠. 군 경계를 벗어나면 아무도 이름을 알지 못할 주민 1,900명의 마을이었습니다. 토마스 옌센(Thomas Jensen)과 홀거 휘브너(Holger Hübner) 등 몇몇 헤비메탈 팬들이 없었다면요.

음악 불모지에 스며든 변화

1990년 당시 옌센과 휘브너는 스물중반의 친구 사이였고, 두 사람 모두 헤비메탈을 사랑했습니다. 하지만 그것이 고민거리이기도 했습니다. 마을 디스코와 브라스 밴드 음악 외에는 시골에서 즐길 게 없었기 때문입니다. 맥주잔을 기울이던 어느 날, 두 사람은 좋아하는 음악으로 야외 축제를 열자는 계획을 세웁니다. 휘브너는 훗날 이렇게 회상했습니다. "우리는 어렸고, 하고 싶었고, 친구들과 파티를 벌이고 싶었어요. 그래서 그냥 해버린 겁니다."

입장료 12마르크, 무대 위 6개 밴드

축제 장소는 마을 근교의 모래밭으로 금방 정해졌습니다. 두 주최자는 친구와 가족의 도움을 받아 맥주 텐트를 치고 트럭 위에 무대를 만들었고, 지역 밴드 6팀이 출연을 나섰습니다. 옌센 본인도 그중 한 팀에서 베이스를 연주했습니다. 1990년 8월 24일과 25일, 첫 번째 Wacken Open Air가 열린 것입니다.

마을 청년들의 발상은 의외로 뜨거운 호응을 얻었습니다. 첫해에만 800명의 메탈 팬이 모래밭으로 몰려들었고, 입장료는 단돈 12마르크였지만 신나는 음악과 넉넉한 맥주, 그리고 훈훈한 가족 같은 분위기가 함께했습니다. 옌센은 초기를 이렇게 회상합니다. "밴드와 함께 무대에 서고, 그 옆에서 맥주잔을 부딪치고, 수익금을 호주머니에 넣을 수도 있었죠." 당시 누구도 이 작은 축제가 세계 최대급 헤비메탈 페스티벌의 초석이 될 거라고 상상하지 못했습니다.

성장과 좌절을 반복하며

옌센과 휘브너는 다음 해 행사도 이어서 열기로 합니다. 이들은 바켄이 속한 슈타인부르크(Steinburg) 지역에 대한 경의를 담아 'Stoned Castle Rock Promotion'이라는 이름으로 활동하기 시작했습니다. 1,300명의 방문객을 모은 성공적인 두 번째 행사에 이어, 1992년에는 페스티벌 최초의 도약이 일어납니다. 영국 헤비메탈의 베테랑 색슨(Saxon)을 무대에 올린 것입니다. 팬 3,500명, 두 개의 무대에서 선보인 20개 밴드, 티켓값 35마르크 — 바켄은 본격적으로 성장세에 올랐습니다.

1993년, WOA의 시련의 해

그러나 순탄한 성장만 이어진 것은 아니었습니다. 휘브너는 WOA 공식 웹사이트에서 "수년간 버틸 끈기가 필요했다. 우리는 수많은 시련에 부딪혔다"고 말합니다. 1993년에는 페스티벌 준비 자체가 최악의 조건에서 시작됐습니다. 휘브너는 심각한 교통사고를 당했고, 옌센 역시 가족의 죽음으로 준비에 차질을 빚습니다. 병원에 누워 있던 휘브너는 미국 프로그레시브 메탈 밴드 페이츠 워닝(Fates Warning)을 헤드라이너로 섭외하는 데 큰 돈을 쏟아붓습니다. 전반적으로 전년보다 훨씬 많은 비용을 들였지만, 방문객은 4,000명에 조금 못 미쳤고 반응도 전년 수준에 그쳤습니다. 결국 Wacken Open Air 1993은 재정적 재앙으로 끝났고, 옌센과 동료들은 여섯 자릿수의 손실을 안았습니다.

전 재산을 걸다

Wacken Open Air는 갈림길에 섰습니다. 리스크가 너무 크다고 판단한 공동 주최자 여럿이 손을 뗐습니다. 그러나 옌센, 휘브너를 비롯한 소수는 모든 것을 한 장의 카드에 걸기로 합니다. 휘브너의 말입니다. "일을 그만두고, 우리는 전념하기로 했어요." 이후 두 사람은 페스티벌에 모든 것을 쏟아부었고, 가족들의 도움과 산더미 같은 빚의 일부를 갚아줄 초기 상속 재산 덕분에 버틸 수 있었습니다. 1994년 주최진은 출연료 지출을 줄이는 대신 유명 헤드라이너를 확보하고 입장료를 낮췄습니다. 결과는 성공적이었습니다. 그해 4,500명의 방문객이 바켄을 찾으며 야외 축제의 명맥이 확실히 이어졌습니다.

취소 직전까지 몰렸던 1996년, 그리고 뵈제 온켈츠

1996년 'Stoned Castle' 프로덕션의 상황은 다시 위기에 몰립니다. 티켓 예매가 너무 저조해 페스티벌 취소를 검토할 지경이었죠. 그때 구원투수처럼 나선 밴드가 바로 뵈제 온켈츠(Böhse Onkelz)입니다. 논란이 많았던 이 헤드라이너가 군중을 대거 끌어모으며 행사를 구했습니다. 주최진에 따르면 8,000명의 메탈 팬이 운집해 1996년 Wacken Open Air는 당시까지 가장 성공적인 행사로 기록됐습니다.

Wacken Open Air, 성장 신화의 시작

이후 페스티벌은 오직 한 방향, 즉 위로만 향했습니다. 해마다 더 많은 밴드와 무대, 방문객, 그리고 맥주가 찾아왔습니다. 주최진에 따르면 1997년 Wacken Open Air는 처음으로 방문객 10,000명을 돌파했고, 이듬해에는 약 20,000명으로 기록을 두 배로 늘렸습니다. 모터헤드(Motörhead), 슬레이어(Slayer), 오지 오스본(Ozzy Osbourne), 딥 퍼플(Deep Purple), 아이언 메이든(Iron Maiden) 같은 록·메탈 전설들이 수십 년간 바켄 무대에서 마이크를 주고받았습니다.

시골 마을에서 헤비메탈의 성지로

더 높게, 더 빠르게, 바켄! 우연히 파낸 모래밭은 이제 240헥타르 규모의 축제 부지로 탈바꿈했습니다. 첫 Wacken Open Air를 찾은 호기심 많은 800명 대신, 현재는 약 80,000명의 방문객이 독일 북부의 이 시골 마을로 몰려듭니다. 창립자 옌센은 "외로운 밤에는 무섭기도 한다"면서도 "하지만 우리는 그때와 크게 다르지 않다. […] 우리는 여전히 그때처럼 철없고, 모든 것이 조금 더 커졌을 뿐이다"라고 말합니다.

Wacken Open Air는 시골 마을의 몇몇 청년들이 꾸던 평생의 꿈이 현실이 된 이야기입니다. 그리고 그 이야기는 아직 끝나지 않았습니다. 옌센은 "정체는 우리가 원하는 게 아니다. 우리는 항상 더 발전하고 싶다. 그리고 아직 갈 수 있는 방향은 많다"고 강조합니다. 어디로 나아가든, 바켄이라는 이름은 이제 헤비메탈과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가 됐습니다. 하나의 마을 축제였던 이곳은 세계 최대의 헤비메탈 페스티벌로 거듭난 것입니다.

코로나19로 연달아 취소된 두 번의 WOA

그러나 코로나19 팬데믹은 바켄의 땅을 두 번의 여름 내내 조용히 만들어 버렸습니다. 30년 페스티벌 역사상 처음으로 주최진은 2020년 행사를 취소했습니다. 대신 크리에이터(Kreator), 블라인드 가디언(Blind Guardian), 사바톤(Sabaton) 등의 라이브 공연을 팬들에게 온라인으로 무료 공개했습니다. 2021년에 대한 기대 역시 무너졌고, Wacken Open Air는 또다시 취소됐습니다. 다행히 2022년에는 화려하게 컴백합니다. 8월 4일부터 6일까지 슬립노트(Slipknot), 림프 비즈킷(Limp Bizkit) 등이 바켄 무대에 올랐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