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일이 다시 하나가 되었을 때 — 1990년 10월 3일, 독일 통일의 날
베를린 장벽이 무너진 지 단 329일 만인 1990년 10월 3일, 분단되어 있던 두 독일 국가의 통일이 완성되었다. 동독이 독일연방공화국에 가입한 바로 그날, 오늘날 '독일 통일의 날'로 기념되는 날이다. 그러나 이 날짜가 정해지기까지는 뜻밖의 표결과 치열한 논쟁이 있었다.
동독 인민회의(Volkskammer)는 1990년 8월 22일 특별 회의에서 독일연방공화국 기본법 제23조에 따라, 같은 해 10월 3일부로 기본법의 적용 범위에 동독이 가입한다고 선언했다. 이는 D마크 도입으로 화폐 통합이 이루어진 지 겨우 6주 뒤의 일이었다. 1989년 11월 9일 장벽 붕괴에서 통일까지는 정확히 329일, 딱 1년이 채 걸리지 않은 셈이다.
인민회의, 가입일을 둘러싼 치열한 공방
1990년 8월, 인민회의는 동독의 종말을 결정짓는 역사적 표결에 나섰다. 그러나 첫 번째 표결은 2주 전인 8월 8일, 필요한 3분의 2 다수에 미치지 못하며 무산된 바 있었다. 8월 22일 회의에서는 '어떻게, 언제' 가입할 것인가를 두고 격론이 벌어졌다.
의원들은 늦은 밤까지 적절한 날짜를 찾아 몸부림쳤다. 즉시 가입부터 12월 2일까지, 몇 주 사이에 약 15개의 날짜 안이 제출되며 논쟁을 주도했다. 예컨대 독일사회연합(DSU)은 '부도 난 기업 GDR'을 하루라도 빨리 정리하고 싶어 했다. 반면 CDU와 민주각성(DA) 진영은 합병 전에 연방공화국과 쟁점을 충분히 협상할 수 있도록 최대한 늦은 날짜를 원했다. 결국 날짜를 둘러싼 공방은 곧, 사회적 이익을 극대화할 기회를 놓고 벌인 투쟁이나 다름없었다.
독일 통일의 날, 왜 하필 10월 3일인가
상징성만 따지자면 통일 기념일은 11월 9일, 장벽이 무너진 날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이 날은 1938년 '수정의 밤(유대인 박해 폭동)'을 떠올리게 하는 날이기에 조기에 후보에서 제외되었다.
표결 결과는 새벽 2시 47분에야 확정되었다. 동독의 존재는 1990년 10월 3일 수요일, 즉 CSCE(유럽 안보 협력 회의) 외무장관 회의 다음 날로 끝나기로 했다. 독일의 통일에 대해서는 회의에 사전 통보해야 했기 때문에, 10월 3일이 사실상 가장 빠른 가입일이 될 수밖에 없었다.
통일의 날, 동서 독일의 공동 국경일이 되다
통일과 함께 동서 독일이 함께 기념하는 새로운 공동 국경일, '독일 통일의 날'이 탄생했다. 그전까지 연방공화국은 1954년부터 1990년까지 1953년 동독 민중봉기를 기념하는 6월 17일을 '독일 통일의 날'로 지정해 왔다. 그러나 통일 조약에 따라 이 기념일은 10월 3일로 옮겨졌다. 9월 20일 동독 인민회의와 독일 연방의회가 통일 조약을 승인했고, 하루 뒤 연방참의원도 이에 동의했다.
"독일 땅에서는 오직 평화만이 솟아나리라"
리하르트 폰 바이츠제커 연방대통령은 10월 3일 자정, 베를린 쇠네베르크 시청 앞 연단에서 통일 조약의 발효를 선포했다. "우리는 자유로운 자기결정을 통해 독일의 통일을 완성하고자 했습니다!" 자유의 종이 울리고, 통합의 상징인 독일 연방기가 의사당 앞에 게양되었다. 제2차 세계대전 종전 45년 만에 독일은 다시 하나의 주권국가로 통일된 것이다.
"앞으로 독일 땅에서는 오직 평화만이 솟아날 것입니다." 헬무트 콜(CDU) 총리는 세계 공동체의 회의론을 의식하며 이렇게 강조했다. "통일된 독일 국경의 마지막 확정은, 우리가 앞으로 그 누구에게도 영토적 주장을 하지 않을 것임을 보여줍니다."
수십만 명의 시민이 브란덴부르크 문과 의사당 앞 공화국 광장으로 몰려들어 '통합의 설계자'로 여겨지는 콜을 향해 "헬무트! 헬무트!"를 외쳤다. 베를린에서만 약 100만 명이 축제를 벌였고, 독일 각지의 도시에도 수만 명이 거리로 나섰다. 다만 이 과정에서 시위와 소동이 벌어지기도 했다.
통일이 불러온 동서 독일의 두려움
10월 3일 이전이든 이후든, 1990년의 통일은 옛 국경 양쪽 모두에서 적잖은 논란의 대상이었다. 8월 인민회의 결의가 발표되자마자 당시 SED-PDS 의장 그레고어 기지(Gregor Gysi)는 유감을 표명했고, 그의 발언은 여러 의교단의 박수와 광범위한 국민적 지지를 받았다.
통일(Vereinigung)이나 가입(Beitritt)이라는 표현 대신, 동서 독일의 많은 사람들은 '인수' 혹은 '합병'이라는 단어를 썼다. 서독이 동독을 삼켜 연방공화국의 자본주의 체제에 흡수시켰다는 인식이었다. 동독 쪽에서는 정체성 상실, 보호 대상화, 경제적 낙후에 대한 두려움이 컸다. 서독에도 두려움이 만연했다. 분단이 끝난다는 것은 무언가를 나눠 가져야 한다는 뜻이기 때문이다. '경제 기적의 나라'였던 서독이 그토록 막대한 재정적 연대를 감당해 낼 수 있을까? 그럼에도 독일 통일이라는 목표는 1949년 이래 기본법 전문에 담긴 '통일 명령'으로서 그 필수적인 부분이었다.
분단의 끝, 그러나 다시 '오시'와 '베시'로
"돌담이 무너진 뒤에도, 일부 사람들 머릿속의 벽은 여전히 허물어져야 한다." 통일 직후 기지가 내건 슬로건이었다. 온갖 우려에도 불구하고 서로를 알아가는 일은 '하나가 되는 것'의 일부였다. '브로일러(Broiler)' 같은 동독 어휘를 서독이 배워야 했고, 서독에서 들려오는 '축소, 합리화, 실업'이라는 단어는 동독의 새로운 현실을 그대로 보여주었다.
특히 경제 부문에서 콜의 '꽃 피는 풍경' 약속에도 불구하고 많은 우려는 결국 현실이 되었다. 동독 부채 인수, 사회급여, 이른바 '동부 건설' 등 통일 비용은 처음 추정된 4,500억 유로의 몇 배로 불어났다. "통일과 관련해 세금을 올리지 않겠다"던 콜의 약속과 달리 '연대 부담금'이 상시화된 것이다. 동독 지역의 인구 유출과 공실은 초기 경제 노력의 실패를 의미했고, 이 나라의 많은 지역은 다시 '꽃 피기' 시작하기까지 수년간 방치되었다. 2005년 동독 지역 실업률은 18.7%(서독 9.9%)로 정점을 찍었으며, 오늘날에도 동부의 실업률은 서부보다 여전히 높은 수준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