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럽의 역사

63명 중 9명만 생존… 발트해 최악의 해난 참사 '얀 헤벨리우스호' 침몰의 전말

1993년 1월 14일 새벽, 폭풍우 몰아치는 발트해에서 열차 페리 '얀 헤벨리우스(Jan Heweliusz)호'가 침몰했습니다. 탑승자 63명 가운데 단 9명만이 목숨을 건졌고, 이 사고는 훗날 '에스토니아호' 참사와 함께 발트해 해운 역사상 가장 처참한 해난 사고로 기록되었습니다.

파도 위에 떠 있는 구명뗏목, 그리고 추위 속의 생존자

1993년 1월 14일 아침, 난파 현장에 도착한 구조대원들의 눈앞에 펼쳐진 광경은 처참 그 자체였습니다. 뤼겐(Rügen) 섬에서 동쪽으로 약 20km 떨어진 해상에는 구명뗏목 일부가 떠다니고 있었지만, 어떤 것은 텅 비어 있었고 어떤 것은 반쯤 얼어붙어 있었습니다. 수온 2도의 얼어붙은 바다에서 마지막 힘을 다해 버틴 소수만이 구조될 수 있었습니다. 불리한 조건 속에서도 구조대원들은 닿을 수 있는 곳까지 헤엄쳐 온 일부 생존자들을 안전지대로 옮기는 데 성공했습니다.

63명 중 9명만 생존

그러나 열차 페리에 탑승했던 63명 중 살아남은 이는 단 9명뿐이었고, 이들 모두 승무원이었습니다. 승객 35명 대부분은 스웨덴·오스트리아·헝가리 출신 트럭 운전사로, 사고 당시 잠든 상태에서 참사를 맞았습니다. 그들에게는 기회조차 주어지지 않았습니다. 1994년 9월 핀란드 우토(Utö) 섬 인근에서 852명의 사망자를 낸 '에스토니아(Estonia)호' 침몰과 더불어, 뤼겐 앞바다에서 벌어진 이 여객선 사고는 발트해에서 일어난 전후 선박 재해 중 가장 비참한 사건 중 하나로 꼽힙니다.

실패한 복구 기동

폭풍우가 몰아치던 그날 밤, 뤼겐 앞바다는 극적인 장면의 무대가 되었습니다. 최대 시속 150km의 돌풍을 자랑하던 허리케인 '베레나(Verena)'가 수 미터 높이의 파도를 일으키며 바다를 휩쓸고 있었습니다. 그디니아(Gdynia) 해양법원의 사후 조사에 따르면, 폴란드 시비노우이시체(슈비네뮌데)에서 스웨덴 위스타드(Ystad)로 향하던 길이 126m의 이 선박은 유로아프리카 해운라인스(Euroafrica Shipping Lines) 소유로, 새벽 2시경 이미 좌현 쪽으로 위험하게 기울기 시작했습니다. 화물칸에 고정되어 있던 철도 차량이 정박 장치에서 풀려나 쏠린 것이 원인으로 추정됩니다.

선장 안제이 울라셰비치(Andrzej Ulasiewicz)는 배를 바로잡기 위해 서지 탱크에 밸러스트수를 펌핑하는 등 필사적인 노력을 기울였으나, 이미 크게 기울어진 배를 세우기에는 역부족이었습니다. 오전 4시 45분경 선장은 조난 신호와 함께 도움을 요청했고, 오전 5시가 되자마자 '얀 헤벨리우스호'는 파도 아래로 가라앉았습니다.

국제 구조 작전

구조 헬리콥터는 슈트랄준트(Stralsund) 인근 파로프(Parow)와 덴마크에서 발진했고, 해상 구조 순양함과 페리들이 사고 해역으로 달려갔습니다. 그러나 거센 폭풍 때문에 돕겠다던 어선들은 물러설 수밖에 없었고, 승무원들이 구명보트를 내리는 것도 불가능했습니다. 구명뗏목에 올라탄 사람은 극소수에 불과했습니다. 추위에 팔다리가 굳은 일부 생존자들은 헬리콥터로 구조돼 슈트랄준트 병원에 이송될 때쯤이면 스스로 구조용 슬링을 착용할 힘조차 남아 있지 않았습니다. 한 헬리콥터 조종사는 폭풍 탓에 복귀 비행이 출발 비행보다 3배나 오래 걸렸다고 회고했습니다.

밀항 난민 추측 논란

사고 이후 독일 구조대원들은 '너무 늦게 도착했다'는 비난에 시달렸습니다. 하지만 폭풍으로 무선 통신 상태가 크게 나빴고 여러 지점에서 유선 연결도 두절된 것으로 확인되면서 이 주장은 훗날 반박되었습니다. 사고 1년 후, 독일 구조대원들은 폴란드로 초청받아 '폴란드 민간 영웅'으로 예우받기도 했습니다.

생존자 수색이 종료되자마자 사고 원인을 둘러싼 각종 추측이 난무했습니다. 스웨덴 언론은 밀항자들이 스웨덴행 페리의 밀봉된 차량 마차에 실려 이동하는 경우가 많다고 보도했고, <슈피겔(Der Spiegel)>은 이전 항로에서 컨테이너와 철도 차량 안에서 사람 목소리를 들었다고 주장하는 장거리 운전사의 증언을 인용하며 침몰선에 난민이 탑승했을 가능성을 제기했습니다. 그러나 폴란드 당국은 해당 보도를 공식적으로 일축했습니다.

연이은 결함이 부른 참사

사고 몇 년 후 해군법원은 드디어 책임자를 특정했습니다. 해운회사와 슈체친(Szczecin) 해사청, 그리고 침몰로 숨진 선장에게 모두 참사의 책임이 있다는 판결이었습니다. 선장은 폭풍에 대한 모든 경보에도 불구하고 사고 당일 밤 시비노우이시체 항을 떠나는 결정을 내렸습니다. 게다가 이 배는 심각한 안전 결함으로 항해 부적합 판정을 받은 상태였습니다. 침몰 불과 며칠 전에는 위스타드 항에서의 접안 작업 중 테일게이트가 손상된 적도 있었습니다. 1977년 취역 이후 이 선박이 겪은 사고가 이번이 처음은 아니었다는 사실이 이를 방증합니다. 2005년에는 스트라스부르의 유럽인권재판소가 폴란드에 희생자 유족 11명에게 각각 4,600유로의 보상금을 지급하라고 판결했습니다.

강화된 안전 기준

1년 반 후 에스토니아호의 참혹한 침몰을 계기로 안전 논의는 마침내 속도를 냈습니다. 1996년 북유럽 8개국은 스톡홀름 협정을 체결해 RoPax 페리(차량·여객 겸용 페리)에 대한 안전 요건을 대폭 강화했습니다. 차량 갑판에 추가 슬라이딩 격벽이 도입되었고, 침수 발생 시 복원성에 대한 요구 기준도 한층 엄격해졌습니다.

바다 무덤이 된 잔해, 그리고 위험한 수중 탐험 명소

수심 25m에 가라앉은 난파선은 지금까지도 인양되지 않았습니다. 이 배는 '바다 무덤'의 지위를 부여받았으며, 부표가 그 위치를 표시하고 있습니다. 잔해 속에는 37명의 유해가 잠들어 있는 것으로 추정됩니다. 그러나 '얀 헤벨리우스호'의 강철 선체가 관이 된 이들이 마지막은 아니었습니다. 웅장한 난파선은 언제나 다이버들을 위험한 수중 탐험으로 끌어들이며, 실제로 촛불처럼 흔들리는 빛과 녹슨 파편이 끊임없이 떨어지는 어두운 화물 갑판에서 목숨을 잃은 다이버도 여럿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