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럽의 역사

알로시스 공물: 비잔티움의 치욕, '인간 말종' 디미트리오스 팔레올로고스

알로시스 공물: 비잔티움의 치욕,  인간 말종  디미트리오스 팔레올로고스

디미트리오스 팔레올로고스는 1407년경 태어난 것으로 추정됩니다. 비잔티움 황제 마누일 2세 팔레올로고스와 황후 헬레네 드라가츠 사이에서 태어난 다섯째 아들이었죠. 어린 시절부터 그는 비참한 시대를 살아가던 헬레니즘(그리스)에 깊은 상처를 남길 인물임을 드러냈습니다. 야심에 불타고 극도로 이기적이었던 그는 15세에 아버지에게 하사받은 렘노스 섬조차 만족하지 못하고, 자신의 형제들에 대항할 지원을 얻기 위해 헝가리 왕 지기스문트에게로 도망쳤습니다.

교회 통합 공의회에서의 배신

디미트리오스는 1427년까지 헝가리에 머물렀습니다. 그 사이 아버지 마누일 2세가 서거하고 장남 요안니스 8세가 새 황제로 즉위했습니다. 1437년 11월, 디미트리오스는 동서 교회의 통합을 논의하기 위한 공의회가 열리던 페라라로 황제를 수행해 갔습니다. 그러나 그는 스스로 반(反)동합파를 선언하고, 황제 형의 동의도 받지 않은 채 단독으로 콘스탄티노플로 되돌아왔습니다.

튀르크와 손잡은 반역자

이 배신에 대한 처벌로 렘노스 섬의 통치권을 박탈당했지만, 디미트리오스는 곧 오스만(튀르크)과의 유착 관계를 시작했고, 그 대가로 메섬브리아 시를 넘겨받게 됩니다. 1442년 4월에는 술탄 무라드 2세가 지원한 튀르크 병력과 함께 콘스탄티노플을 공격했으나 격퇴당했습니다. 그는 체포되어 유폐되었지만 탈출에 성공했고, 수도 바로 맞은편에 위치한 제노바의 거점 갈라타로 피신했습니다.

쿠데타 시도와 미스트라스 전제공 임명

1448년 요안니스 8세가 서거하자, 왕위 계승자인 형 콘스탄티노스(훗날 마지막 황제 콘스탄티노스 11세)가 아직 미스트라스에 머물러 있는 사이, 디미트리오스는 수도를 강탈하기 위한 쿠데타를 꾀했습니다. 그러나 이 계략가는 어머니의 개입으로 또다시 실패하고 말았습니다.

결국 콘스탄티노스는 그를 눈가리고 아름하기 위해, 미스트라스 전제공국의 절반을 다스리는 전제공으로 임명합니다. 나머지 절반은 동생 토마스 팔레올로고스가 차지했습니다. 콘스탄티노플이 함락된 후인 1454년, 팔레올로고스 형제들은 튀르크의 지원을 등에 업은 디미트리오스 칸타쿠지노스의 반란과 마주하게 됩니다.

형제 간 분열과 오스만에의 항복

그런데 반란이 진정되자마자 디미트리오스는 이번에는 동생 토마스를 배신하고 튀르크의 지원을 요청했습니다. 토마스가 영토를 내어주며 그의 요구를 받아들이면서 두 형제는 화해했지만, 대신 튀르크는 팔레올로고스 가문을 조공을 바치는 속민으로 전락시켰습니다. 내분으로 조공을 납부하지 못하자, 메메드 2세는 펠로폰네소스 원정에 나섰습니다.

토마스 팔레올로고스는 이탈리아로 망명했고, 디미트리오스는 저항하는 척만 한 채 실질적인 전투 없이 미스트라스를 튀르크에 넘기고 개인적인 보상을 챙겼습니다. 술탄은 그에게 트라키아 도시 아이노스의 수입권과 더불어 타소스·사모트라키 섬 수입의 일부를 하사했으며, 디미트리오스는 가족과 함께 1467년까지 아이노스에서 생활했습니다.

몰락의 끝, 수도승으로 생을 마감하다

그러나 역사가 스프란체스의 기록에 따르면, 디미트리오스는 튀르크에 바쳐야 할 세금을 횡령하다가 메메드 2세의 신임을 잃고 말았습니다. 메메드 2세는 그들의 재산을 모두 몰수했고, 디미트리오스와 친족들은 디디모티호로 피신해 신음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후 메메드 2세가 그를 다시 용서하여 아드리아노플에 정착시키고 적은 수입을 주었지만, 예전의 영화는 돌아오지 않았습니다.

1469년 딸 헬레네가 세상을 떠난 후, 디미트리오스는 수도승이 되어 '다윗'이라는 종교 이름을 사용했습니다. 그는 1470년 음모를 꾸미던 중 생을 마감했으며, 뒤에 남긴 것이라곤 오직 나쁜 기억뿐이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