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61년 10월 5일 밤, 독일 함부르크에서 S반 열차가 선로에 정차해 있던 건설 열차와 충돌하는 대참사가 발생했습니다. 이 사고로 28명이 목숨을 잃고 약 100명이 부상을 입었으며, 일부는 중상을 당했습니다. 충격적인 이 참사는 독일 전역에 큰 공포와 슬픔을 안겼습니다.
글 | 요헨 램번드
"제가 실패했습니다, 건설 열차를 잊어버렸습니다" — 배차 담당자의 고백
당시 57세였던 연방철도 수석 서기 알프레트 메서(Alfred Messer)는 사고 직후 "제가 실패했습니다. 건설 열차를 잊어버렸습니다"라며 스스로에게 책임을 돌렸습니다. 메서의 인적 실수를 설명하는 이후의 공식 보고서는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습니다. "불운한 사고는 배차 담당자 메서가 경로를 먼저 확정하지 않은 채 출발 신호 F를 설정하여 S반 열차 PS 3819의 출발을 해제했다는 사실에서 비롯되었습니다."
시각은 오후 10시 34분. 그 목요일 밤, 메서는 베르게도르프(Bergedorf) 방면 출발 신호를 중앙역 방향의 S반 열차에 전달했고, 동료였던 28세의 연방철도 보조 후보생 하랄트 크루제(Harald Kruse) 역시 같은 정보를 확인했습니다. 불과 몇 분 후, 메서는 새 다리 공사용 대형 I빔을 실은 건설 열차가 아직 선로에 우회 정차해 있다는 사실을 떠올립니다. 그러나 이미 너무 늦은 뒤였습니다. 건설 열차의 기관사만이 간신히 뛰어내려 목숨을 구할 수 있었습니다.
시속 70km의 충돌 — 강철 대들보가 S반 객차를 관통하다
오후 10시 38분, 시속 70km로 주행하던 S반은 베를리너 토어(Berliner Tor)와 로텐부르크소르트(Rothenburgsort) 역 사이에서 조명도 없이 정차해 있던 건설 열차와 정면충돌했습니다. 소음은 귀청을 찢을 듯했고, 강철 대들보는 S반 첫 객차의 앞부분을 약 13m 깊이로 관통했습니다. 치명적이었던 것은 대들보의 치수가 객차 내부 공간과 정확히 맞아떨어지며 차체를 꽉 붙잡아 버렸다는 점입니다. 승객들은 갇힌 채 허공으로 던져져 처참한 피해를 입었고, 첫 객차에 타고 있던 사람들은 거의 살아남지 못했습니다.
12m 높이의 철교 위, 좌초된 구조 작전
충돌 후 불과 몇 분 만에 첫 번째 구조 인력이 도착했습니다. 경찰과 구급차가 대거 호출되었고, 소방대 역시 가용한 모든 차량을 사고 현장으로 파견했습니다. 그러나 구조에는 큰 어려움이 따랐습니다. 사고 지점은 약 12미터 높이의 교량 위였기 때문입니다. 제방을 오르기 위해 밧줄이 늘어졌고, 소방관과 경찰은 갇힌 사람들을 구출하기 위해 필사적으로 움직였습니다. 용접 토치, 쇠지렛대, 도끼로 휘어진 금속 부품들을 한 조각씩 분리해 나가야 했습니다. 한편 부상자들은 아직 상황을 파악하지 못한 채 어둠 속을 방황하고 있었고, 지나가던 많은 시민들도 자원봉사에 나섰습니다. 당시 보건상원의원이었던 발터 슈메데바흐(Walter Schmedebach)는 "소녀들과 여성들이 몇 시간 동안 들것에 밧줄을 묶고 그 밧줄을 놓지 않고 버티고 있는 모습"을 목격했다고 회고했습니다.
현장에서 팔다리 절단 수술을 감행한 의사들
일부 희생자들은 부상이 너무 심각해 의사들이 현장에서 즉시 팔이나 다리 절단 수술을 시행해야 할 정도였습니다. 갇힌 이들의 고통스러운 비명은 몇 시간 동안 현장에 울려 퍼졌습니다. THW(기술구호단)를 포함한 응급 구조 활동은 새벽 5시까지 이어졌으며, 총 175명의 소방관이 투입되었습니다. 오늘날과 달리 당시에는 이런 참사 이후 구조대원들에게 심리적 지원이 전혀 제공되지 않았고, 많은 이들이 오랫동안 그 충격에서 벗어나지 못했습니다.
아마도 함부르크 S반 역사상 가장 끔찍했던 이 날, 수많은 사람들이 가족과 친구, 지인을 잃었고 가정들은 뿔뿔이 흩어졌습니다. 많은 부상자들은 평생 장애를 안고 살아가야 했습니다. 보상금이 지급되기는 했지만, 개별 사례에서 그 보상이 충분했는지 여부는 여전히 의문으로 남아 있습니다.
"앞쪽 자리에 못 앉았기 때문에 살아남았습니다" — 생존자의 증언
현재 83세의 하이케 라츠카(Heike Raczka)는 사고 당일을 아직도 생생하게 기억합니다. 당시 그녀는 바로 이 S반에 타고 있었고, 살아남은 것은 순전히 운 덕분이었습니다. 1961년 10월 5일, 그녀는 원래 맨 앞칸에 앉으려 했지만 사람이 너무 많아 가운데 자리에 앉았습니다. "그래서 저에게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신발과 모자만 날아다녔지요." 처음에는 참사의 규모가 전혀 와닿지 않았다고 합니다. 그녀는 그날 밤 사망자와 부상자가 발생한 S반의 부서진 앞 객차를 직접 보지 못했습니다. "사고가 났으니 내려서 선로를 건너 베를리너 토어로 되돌아가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다음 날 신문을 보고 나서야 충격이 찾아왔습니다.
재판부에 선 배차 담당자 — 보호관찰 1년
알프레트 메서는 1963년 재판에 넘겨졌습니다. 과실치사, 과실상해, 과실 교통위험 혐의가 그것이었습니다. 동료 하랄트 크루제 역시 함께 재판을 받았습니다. 판사, 검사, 변호인 모두 두 연방철도 직원을 최대한 옹호하고 인간적으로 지지하는 데 노력했습니다. 두 사람 모두 이전에 어떤 전과도 없었습니다. 사고 당일 밤 메서는 옆에서 진행되던 서류 작업에 정신이 팔려 있었을 가능성이 컸고, 크루제 입장에서는 상급 동료가 실수로 '자유 통행' 신호를 보내고 열차 전체를 잊어버릴 것이라곤 상상조차 할 수 없었습니다. 판결 결과, 메서는 보호관찰 조치가 붙은 징역 1년을 선고받았고, 크루제는 무죄 판결을 받았습니다.
이미 존재했지만 도입되지 않았던 자동 차단 기술
더 씁쓸했던 사실은, 사람의 개입 없이도 사고를 막을 수 있는 신기술이 이미 존재했다는 점입니다. 이른바 '블록 시스템'을 사용하면 각 열차가 궤도 회로를 통해 다음 열차의 신호를 자동으로 설정할 수 있습니다. 예기치 않은 분기가 발생하면 이 기술이 관련된 모든 궤도를 자동으로 차단합니다. 이러한 자동 차단 방식은 당시 이미 포펜뷔텔(Poppenbüttel)과 알토나(Altona) 구간에서 운용되고 있었습니다. 반면 베를리너 토어와 베르게도르프 사이 구간은 매 열차마다 경로를 수동으로 설정해야 하는 방식이었고, 안전 확보는 결국 수동 확인을 거쳐야만 유지되었습니다. 당시 연방철도는 경제적인 이유로 완전한 '블록' 설비가 도입되지 않았다는 비난을 단호히 일축하며 계획된 단계별 시행 일정만을 강조했습니다.
평생을 짓누른 죄책감
알프레트 메서는 끝내 이 사고에서 회복하지 못했습니다. 그에게 죄책감은 너무나 무거웠습니다. 딸과 아들을 둔 아버지였던 메서는 어떻게 해도 철도 회사에서 계속 근무하는 것이 불가능해졌습니다. 치료와 휴양도 도움이 되지 않았습니다. 전직 동료들은 메서가 몇 시간씩 멍하니 전방을 응시하곤 했다고 증언했습니다. 그는 일찍 은퇴해 여러 차례 정신병원에 입원해야 했고, 이후 함부르크에서 아내와 함께 은둔 생활을 하며 점점 더 스스로를 고립시켰습니다. 그는 완전히 무너진 사람이 되어 있었습니다. 메서는 1985년, 82세의 나이로 알토나에서 세상을 떠났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