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명한 연대기 작가는 폴란드인의 이교 신앙에 대해 놀랄 만큼 상세히 기술했습니다. 그는 '폴란드 올림포스' 전체를 재구성했죠. 그러나 얀 드워고시의 기록을 과연 믿을 수 있을까요?
15세기 후반, 즉 중세의 막바지에 활동한 얀 드워고시(Jan Długosz)는 그의 방대한 저작 《연대기》에서 자신이 직접 경험한 시대와 사건에만 머물지 않았습니다. 그는 폴란드의 여명기까지 거슬러 올라가 이 주제 역시 매우 상세하게 다루었습니다.
그는 저작의 첫 번째 권에서 미에슈코(Mieszko)가 세례를 받고 백성들에게 새로운 신앙을 받아들이게 하기 전, 비스와 강 유역에서 행해지던 이교 신앙의 문제를 다루었습니다. 그가 쓴 내용은 다음과 같습니다.
우리는 또한 폴란드인들이 그들의 혈통 초창기부터 우상 숭배자였으며, 다른 민족과 부족들이 빠진 오류에 빠져 많은 신과 여신, 즉 유피테르, 마르스, 비너스, 디아나, 케레스를 믿고 숭배했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그들은 유피테르를 자기네 언어로 '예사(Jessa)'라고 불렀는데, 최고신에게서 모든 현세의 축복을 받았다고 믿었습니다. 마르스는 '라다(Lada)'라고 불렀습니다. 시인들의 상상력은 그를 전쟁의 지도자이자 신으로 만들었고, 사람들은 적에 대한 승리를 그에게 빌었다고 합니다. 비너스는 '지지레일라(Dzidzileyla)'라고 불렀으며 결혼의 여신으로 여겨졌습니다. 플루토는 '니야(Nija)'라고 불렸는데, 지하 세계의 신이며 영혼이 육체를 떠날 때의 수호자이자 보호자로 간주되었습니다.
놀랍도록 상세한 이 기술은 수 세기 동안 격렬한 논쟁을 불러일으켰습니다. 과거에는 드워고시의 말이 원래 신앙의 어떤 반영이라고 받아들여지는 경우가 흔했습니다. 이 슬라브 판테온은 토착 종교의 복잡성을 증명하고, 심지어 그리스인이나 스칸디나비아인처럼 방대한 신화·신앙 체계를 지닌 민족들과 비교할 수 있는 근거를 제공하는 것으로 여겨졌습니다.

얀 마테이코(Jan Matejko)가 그린 얀 드워고시.
열광의 시기가 지나자 드워고시 판테온에 대한 시선은 점차 회의적으로 변했습니다. 사실 최근 몇 년에 들어서야 관심이 되살아났습니다. 토착 신앙 신봉자들과 소위 '터보-슬라브'라 불리는 이들, 즉 각종 위조물과 무분별한 주장을 근거로 폴란드에 수천 년의 숨겨진 영광스러운 역사가 있다고 주장하려는 아마추어들이 이를 자신들의 논리를 뒷받침하는 결정적 근거로 인용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진짜 전문가들은 드워고시 판테온에 대해 어떻게 평가할까요? 현재 학계의 상황은 어떤가요?
능숙한 편집… 그 이상은 아닐까?
무엇보다 분명히 해야 할 것은 드워고시가 폴란드 초기 역사에 대한 직접적인 지식이 없었다는 점입니다. 그는 기독교 개종으로부터 약 500년 후에 살았습니다. 이교 시대와 그 사이의 거리는 우리와 그의 시대 사이의 거리와 맞먹습니다. 그는 오늘날 학자들이 자신의 시대에 대해 글을 쓰듯, 역사가로서 옛 판테온에 대해 쓸 수밖에 없었습니다.
문제는 드워고시가 활용할 수 있었던 사료가 매우 제한적이었다는 점입니다. 당대 학자들은 대체로 14세기 말 이전 시기에 관한 그의 기술은 크게 신뢰할 수 없다는 입장입니다. 《연대기》의 가장 초반부에 관해서는 드워고시가 현재 우리가 알지 못하는 사료를 단 하나도(강조합니다, 하나도) 사용하지 않았다는 것이 확인되었습니다.

고대 슬라브의 종교, 날조와 조작, 단순화 없이. 이 주제에 새로운 빛을 던지는 저명한 전문가의 해석이 출간되었습니다.
그는 단순히 이전에 쓰인 연대기들을 편집했고, 기껏해야 그 안의 이야기를 자신의 서술과 교훈적 목적에 맞게 미화하거나 재구성했을 뿐입니다. 그는 갈 아노님(Gall Anonim)과 빈센티 카드우베크(Wincenty Kadłubek)의 저작을 바탕으로 폴란드의 기원을 서술했습니다. 하지만 그는 독일 연대기 작가 티트마르(Thietmar)의 연대기를 직접 본 적이 없었기에, 우리가 현재 알고 있는 이 나라 가장 초기 역사에 관한 수많은 사실들을 전혀 알지 못했습니다.
드워고시의 재구성 탓에 어떤 전문 중세학자도 피아스트(Piast) 왕조의 기원을 재구성하는 데 《연대기》를 사용하지 않습니다. 슬라브 판테온도 마찬가지입니다. 드워고시는 단순히 다른 사료에 의존했고, 덧붙이자면 완전히 상상력에 휩쓸렸던 것입니다.
결혼식 노래
흥미롭게도 후기 중세에는 폴란드뿐 아니라 루테니아나 체코에서도 '예사', '니야', '레다', '렐리' 같은 외침이 반복되는 결혼식 노래가 어느 정도 인기를 누렸습니다. 이 민요들이 15세기 초, 즉 이교의 뚜렷한 흔적이 더 이상 남아 있다고 보기 어려운 시대에 불렸다는 점을 강조해야 합니다.
교회는 이 노래들을 달가워하지 않았습니다. 내용을 완전히 이해할 수 없을지 몰라도 여전히 옛 민간 미신의 반영으로 보았기 때문입니다. 벨키 코지민(Wielki Koźmin) 출신 설교자 루카시(Łukasz)는 결혼 잔치에서 이런 노래를 부르는 것을 질책했습니다. 이 주제에 대한 언급은 1414년 시노드 규정에도 등장했습니다.

슬라브 역사의 찬양. 20세기 초 알폰스 무하(Alfons Mucha)의 작품.
피상적인 연상
드워고시는 앞서 언급한 루카시의 견해를 알았거나 시노드 문서에 익숙했던 것으로 보입니다. 교회 당국의 우려는 그의 상상력을 사로잡았습니다. 그리고 이 놀랍도록 늦은 시기의 민속 관습 해석을 바탕으로, 역사가는 이교 신앙의 전체 목록을 편집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는 중세에 널리 통용되던 방법을 따랐습니다. 최근 출간된 《고대 슬라브의 종교》의 저자이자 포즈난의 중세학자인 다리우시 시코르스키(Dariusz Sikorski)는 이렇게 설명합니다. "교양 있는 인물이었던 드워고시에게 이교주의란 고대 문헌에서 접한 종교성의 형태와 동의어였습니다." 그래서 연대기 작가는 옛 폴란드인들이 고대 그리스인이나 로마인과 똑같은 신들을 믿었고, 단지 그들에게 다른 토착 이름을 붙였다고 결론지은 것입니다.
그 결과 연대기 작가는 단순히 로마 종교의 일반적인 틀을 가져왔고, 신들의 이름은 결혼식 노래 속 외침에서 차용했습니다. 다리우시 시코르스키가 강조하듯 이는 '피상적인 연상'에 기반한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이교 종교에 대해서는 "당연히 아무런 지식도 없었습니다. 미에슈코 1세의 세례로부터 5세기나 지난 뒤에 어떻게 그런 지식을 가질 수 있겠습니까."
출처
이 글은 저명한 중세학자이자 교회사 전문가인 다리우시 시코르스키가 집필한, 슬라브의 기독교 이전 신앙에 관한 최신 지식과 연구 검토를 주된 바탕으로 합니다.
- D.A. Sikorski, Religions of the Old Slavs, Poznań Publishing House, Poznań 201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