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럽의 역사

지미 헨드릭스가 킬 '스타팔라스트' 무대에 섰을 때 — 1967년, 북독일 클럽에 울려 퍼진 전설의 기타

1960년대 킬(Kiel) 시민들은 '스타팔라스트(Star-Palast)'에서 밤마다 춤을 즐겼습니다. 매일 저녁 라이브 음악이 흘러나오는 클럽이라는 개념 자체가 당시로서는 획기적인 것이었죠. 그중에서도 기타의 전설 지미 헨드릭스(Jimi Hendrix)가 남긴 무대는 오늘날까지 잊히지 않고 있습니다.

글: 스테파니 되셔(Stefanie Döscher)

유리잔과 재떨이가 테이블 위에서 덜컹거리고, 검은 스피커 타워에서 "Hey Joe"가 울려 퍼집니다. 빨간 칵테일 의자에는 더 이상 아무도 앉아 있지 않습니다. 모두의 시선은 무대 위 한 남자에게 쏠려 있습니다. 곱슬거리는 아프로 헤어, 알록달록한 줄무늬 바지, 그리고 무엇보다 그 어느 누구도 흉내 낼 수 없는 기타 연주. 1967년 5월 27일, 월드 스타 지미 헨드릭스가 킬 가르덴(Gaarden) 지역의 스타팔라스트 무대에 올랐습니다.

"'Hey Joe'를 30분 넘게 연주하고 나서도 쇼는 계속됐어요. 계속 스피커 쪽으로 다가가 피드백 소리를 만들어 내곤 했죠." 당시 현장에 있었던 잉게 한센(Inge Hansen)이 회상합니다. 같은 자리에서 음악을 만들던 헨리크 마스(Henrik Maass)도 말을 보탭니다. "정말 인상적이었어요. 소름이 돋았습니다."

함부르크 모델을 본뜬 킬의 클럽

잉게 한센은 사실 숙제를 해야 할 시간에 몰래 라디오를 듣곤 했습니다. 그 시절 음악은 비닐 레코드와 월간 TV 프로그램 '비트 클럽(Beat Club)', 그리고 라디오 룩셈부르크를 통해 들려왔죠. "아버지는 내가 왜 그렇게 오래 숙제를 하는지 늘 궁금해하셨어요."라고 그녀는 웃으며 말합니다.

1964년 스타팔라스트가 킬에 문을 열었을 때, 이곳은 지역에서 완전히 새로운 공간이었습니다. 마스는 "창립자 만프레트 보이탈라(Manfred Woitalla)가 독점권을 쥐고 있었죠. 세계 각국의 라이브 밴드가 공연하는 곳은 킬에 스타팔라스트밖에 없었습니다"라고 회상합니다. 대부분의 밴드는 영국 출신이었지만, 인도네시아·스코틀랜드·아일랜드·미국 출신 밴드들도 이 전설의 무대에 섰습니다. 스타팔라스트는 매일 문을 열었고, 매일 저녁 밴드가 연주했습니다.

물론 이 아이디어 자체는 새롭지 않았습니다. 함부르크의 스타 클럽(Star Club)은 1962년 비틀즈가 무대에 오른 뒤로 큰 센세이션을 일으키고 있었으니까요. 스타 클럽 창립자 만프레트 바이슬레더(Manfred Weissleder)와 보이탈라는 서로 아는 사이였습니다. 두 사람은 북부 독일의 유망한 젊은 밴드들을 발굴하는 단체를 함께 만들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보이탈라가 함부르크와 유사한 컨셉으로 클럽을 열기로 결심하자 법적 분쟁이 벌어졌고, 최종적으로 킬 쪽이 승리했습니다.

입장료는 단돈 1마르크

사진으로는 몇 장 남지 않은 칼스탈 42(Karlstal 42)의 이 클럽은 사람들을 끌어모으는 명소가 됐습니다. 조명은 어둡게 가라앉고 디스코볼이 댄스 플로어 위에 떠 있었죠. 한센은 "세 곡이 연주되면 잠깐 쉬면서 이야기를 나눌 수 있었어요"라고 회상합니다. 춤추는 사람들은 곡과 곡 사이에 신발 모양 작은 테이블에 앉아 음료를 마셨습니다. 입장료는 보통 1마르크였지만, 지미 헨드릭스가 무대에 오르는 날만은 예외였습니다. "그날은 5마르크였어요."라고 한센은 기억합니다.

대형 경기장이 아닌 클럽

헨리크 마스 역시 직접 음악을 하는 사람이지만, 헨드릭스의 열렬한 팬이었습니다. 스타팔라스트 무대에는 에릭 클랩튼(Eric Clapton)의 밴드 크림(Cream)도 공연했습니다. 한센은 "원래 그냥 춤추러 간 건데, 밴드가 연주를 시작하자 모두 무대 앞으로 모여들었어요. 당시 세계 최고 드러머로 꼽히던 진저 베이커(Ginger Baker)가 한 시간 동안 드럼을 치는데 점점 속도가 붙더라고요. 춤추지 않고 그저 구경만 해도 좋았습니다"라고 말합니다.

마스는 "당시 음악의 중심은 스타팔라스트였습니다. 지역 밴드들에게는 존재하지 않던 수준의 음악이었죠. 게다가 그 모든 것이 클럽 분위기 속에서 펼쳐졌습니다. 요즘은 대형 경기장에서나 볼 수 있는 광경입니다"라고 말합니다.

킬 출신 밴드도 무대에

헨리크 마스 자신도 스타팔라스트 무대에 섰습니다. 1964년, 그가 속한 밴드는 빅 밴드 대회를 계기로 처음으로 이 클럽에 섰습니다. 당시 헨리와 그의 밴드 멤버들은 오스트제할레(Ostseehalle)에서 열린 밴드 경연에서 센세이션을 일으킨 뒤라 킬 안팎에서 이미 작은 유명인사였습니다.

'헨리 앤 더 듀크스(Henry and the Dukes)'의 공연은 파격적이었습니다. 드러머는 드럼 통 속으로 들어가 버렸고, 보컬은 마이크 스탠드를 넘어뜨렸죠. 기타를 부수기로 유명한 더 후(The Who)를 연상시키는 퍼포먼스였습니다. 마스는 "물론 우리는 기타를 부술 여유는 없었습니다"라며 웃습니다. 공연 이후 헨리 앤 더 듀크스는 지역 유명 밴드가 됩니다. "모든 기획자들이 우리를 예약했어요. 뭐든 부숴주길 기대했지만, 물론 그렇게 되지는 않았죠."

듀크스는 필요할 때만 보이탈라의 클럽 무대에 섰습니다. 마스는 "평소에는 영국 밴드들이 공연했습니다. 우리는 그 후 한 달 동안 예약이 이어졌죠"라고 회상합니다.

헨드릭스, 슐레스비히홀슈타인에 다시 오다

스타팔라스트에서 마스는 주로 영감을 얻는 팬이었습니다. "늘 무대 앞에 서서 연주자들의 플레이를 눈여겨본 뒤 집에 돌아가 똑같이 따라 하곤 했어요." 하지만 지미 헨드릭스의 공연만큼은 그를 완전히 무너뜨렸습니다. "공연이 끝난 뒤 4주 동안은 베이스도 기타도 손에 댈 수 없었어요. 기타를 정방향으로도, 뒤집어서도, 심지어 이빨로도 연주하는 걸 처음 봤으니까요." 휴식 시간에는 행운도 따랐습니다. 헨드릭스는 마스의 친구가 벽에서 뜯어낸 벽지 조각에 사인을 해줬습니다.

지미 헨드릭스는 1970년 페마른(Fehmarn) 페스티벌을 위해 슐레스비히홀슈타인을 다시 찾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세상을 떠났습니다. 스타팔라스트의 시대 역시 1968/69년에 막을 내립니다. 라이브 음악은 더 이상 유행하지 않았고, 사람들은 디스코에서 레코드에 담긴 음악을 듣는 쪽을 택했으니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