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럽의 역사

소아시아 데미르치 전투: 그리스군의 무질서, 혼란, 오해

소아시아 데미르치 전투: 그리스군의 무질서, 혼란, 오해

1919년 6월 말, 키도니아 사단(MK)은 소아시아 그리스 전선 중앙부에 위치한 데미르치 일대 소탕 작전을 개시했다. 당시 그리스군은 이미 소아시아 북부 해안에서 이탈리아 점령 지대에 이르기까지 전선을 과도하게 확장한 상태였다.

MK는 7월 15일까지 해당 지역의 소탕을 마치고 부대 철수를 시작했다. 하지만 이 일대에 강력한 튀르크 병력이 집결하고 있다는 정보가 접수되자, 사단은 데미르치에 1개 대대를 주둔시키게 되었다.

7월 18일, 참혹한 첫 교전

7월 18일, 야포 3문으로 증강된 약 2,400명 규모의 튀르크 부대가 그리스 대대를 공격했다. 그리스 대대는 여러 시간 동안 홀로 버텼으나 결국 보를라(Borla)로 후퇴해야 했고, 전사 47명, 부상 93명, 실종 37명이라는 막대한 손실을 입었다.

다음 날, MK 사단장 알렉산드로스 오토나요스(Alexandros Othonaios)는 보를라를 찾아 상황을 점검한 뒤, 방비가 허술한 전진 진지에서 사단을 철수시켜 줄 것을 요청했다.

그러나 정부 측은 다른 판단을 내렸다. 제2보병사단(MP) 분견대, 제9 크레타 연대, 그리고 포병·기병 부대로 MK를 증강한 뒤, 오히려 데미르치–시마브(Simav) 일대 소탕 작전을 계속 수행하라고 명령한 것이다.

어긋난 부대, 흔들리는 지휘부

제2사단 분견대는 3개 대대와 포병 부대로 구성되어 쿨라(Kula) 방면으로 진격했고, MK는 3개 종대로 나뉘어 데미르치로 향했다. 7월 22일, MK 중앙 종대는 튀르크 부대와 교전 끝에 이를 격파하고 데미르치에 진입했다. 이 전투에서 당시 대령이던 오토나요스마저 부상을 입었다.

한편 제2사단 분견대는 진격 도중 튀르크 부대들과 충돌했지만, 데미르치로 향하는 대신 마을 남쪽 10km 지점에 머물러 있었다.

튀르크군은 데미르치를 두고 싸우지 않고 내륙의 시마브로 물러났다. 그러나 이 무렵 그리스 지휘부에는 혼란이 만연했다. 총참모부(GS)는 시마브–우샤(Uşak)–불란단 일대 전역의 소탕을 명령했지만, 제1군단(SS)은 이 명령을 잘못 이해해 해당 지역을 점령하기 위해 병력을 움직이기 시작한 것이다.

이후 MK에는 시마브 방면 진격이 명령되었고, 우샤를 향해 출발했던 제1군단 소속 제1보병사단은 총참모부의 명확화 이후 소환되었다. 총참모부와 제1군단 간의 이런 오해로 인해 그리스 병력들은 뚜렷한 목적 없이 오르내리는 고통스러운 행군을 거듭해야 했다.

거듭된 지연, 발목 잡힌 진격

7월 24일, 새 사단장 가르갈리디스(Gargalidis) 대령의 지휘를 받는 MK는 명령에 따라 데미르치에서 시마브와 예니쾨이(Yeniköy)로 행군해야 했다. 그러나 사단장은 자신의 견해를 정리할 시간이 필요하다며 제1군단에 행군 연기를 요청했다. 한편 사단에 배속된 제9 크레타 연대는 이미 예니쾨이를 점령한 상태였다.

7월 28일, 총참모부는 다시금 MK에 시마브 고원 공격을 명령했다. 그러나 사단은 또다시 “병사들의 건빵(군용 빵)을 조달할 시간이 필요하다”며 연기를 요청했다. 그럼에도 8월 1일, MK는 독자적 판단으로 시마브 다그(Simav Dağı) 능선을 향해 이동했고, 혼성 분견대와 함께 약 1,000명 규모의 튀르크 부대를 향해 능선을 내려갔다.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각 부대에 대한 보급이 불가능해지자 고지는 버려졌다. MK는 포병으로 증강된 1개 연대를 데미르치에 남겨두고 살리흐리(Salihli)로 후퇴했다. 8월 7일, 강력한 튀르크 부대가 데미르치에 남아 있던 MK 분견대를 공격했다.

데미르치 방어전과 전투의 의미

그리스 부대들은 총검 돌격 반격으로 이 공격을 격퇴했다. 다음 날에도 같은 방식의 전투가 반복되었고, 결국 튀르크군은 후퇴할 수밖에 없었다. 그리스군의 손실은 경미했으며, 튀르크군은 최소 150명의 전사자를 냈다.

그러나 이 작전에서 진정으로 중요한 것은 승패가 아니라 그리스군의 무질서, 즉 총참모부와 제1군단 사이의 혼란, 그리고 상호 비방과 책임 전가였다.

그리고 이 문제를 둘러싼 논쟁이 지금도 계속되고 있는 만큼, 한 가지는 분명히 짚고 넘어갈 필요가 있다. 당시 모든 고위 장교들은 베니젤로스파(Venizelist)였으며, '몰락한' 콘스탄티노스파(Constantinist)가 아니었다는 사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