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36년 10월 3일, 전함 '샤른호르스트'가 빌헬름스하펜에서 진수되었다. 독일은 길이 235미터에 달하는 이 거함을 통해 군사력을 과시했고, 그 과정에서 베르사유 조약은 완전히 무시당했다.
이것은 단순히 대형 함선 한 척의 진수 그 이상의 의미를 지닌 사건이었다. 순양전함 '샤른호르스트'의 등장으로 아돌프 히틀러는 제2차 세계대전 발발 약 3년 전, 재군비 문제에서조차 베르사유 조약이 자신에게 더 이상 아무런 구속력이 없다는 사실을 전 세계에 드러낸 것이다.
1919년 체결된 베르사유 조약에 따르면 독일의 군함은 배수량 1만 톤을 초과할 수 없었다. 그러나 배수량 3만 5천 톤이 넘는 '샤른호르스트'는 이 한도의 세 배를 훌쩍 웃돌았다. 독일 해군은 여전히 영국 왕립해군과 같은 잠재적 적국의 해군력에 크게 못 미쳤지만, 이 순양전함은 영국 해군성이 앞으로 반드시 감안해야 할 강력한 상대였다. 길이 235미터의 '샤른호르스트'는 제1차 세계대전 이후 독일에서 건조된 최초의 전함으로, 히틀러가 집권한 지 1년 뒤인 1934년 이미 빌헬름스하펜에서 용골이 놓였다.
빌헬름스하펜 해군 조선소에서 건조된 '샤른호르스트'
길이 235미터의 '샤른호르스트' 장비에는 항공기 3대도 포함되어 있었다.
'샤른호르스트'는 빌헬름스하펜의 전쟁해군(크리크스마리네) 조선소, 약칭 KMW에서 건조되었다. 이곳은 독일 제국에서 가장 중요한 해군 조선소였다. '카이저리히 마리네 베르프트 빌헬름스하펜'이라는 이름으로 설립된 KMW는 독일 제국 해군 육성에 핵심적인 역할을 했으며, 빌헬름 2세 황제가 대영제국에 도전장을 내밀 때까지 세계 제2위 규모의 해군으로 성장하는 데 크게 기여했다. 그러나 독일 해군과 상선대를 종전 규모의 일부로만 제한한 베르사유 조약이 체결되면서 KMW는 위상을 잃었고, 조선소 시설 역시 대폭 축소되었다.
남은 시설에는 새로운 역할이 필요했다. 우선 잔존 군함과 상선의 해체 작업이 몇몇 주문을 가져왔다. 1923년까지 이곳에서는 독일과 외국 선박 300여 척, 그중 다수가 상선이 해체되며 생을 마감했다. 이후 조선소는 점차 여객 증기선 건조 등 민간 주문을 수주하기 시작했고, 심해 어업용 트롤어선과 커터선 건조에서도 중요한 역할을 담당했다.
두 번째 용골 설치: 더 강해진 '샤른호르스트'
삼연장 포탑으로 무장한 '샤른호르스트'를 통해 나치 정권은 군사력을 과시했다.
1935년 히틀러는 베르사유 조약을 공식적으로 무효화하고 강대한 해군 건설을 명령했다. 처음에는 소형 장갑함으로 구상되었던 '샤른호르스트'는 1935년 두 번째로 용골이 놓이게 되었고, 이번에는 더 크고 더 중무장한 함선으로 건조될 예정이었다.
1936년 10월 3일 진수 당시 '샤른호르스트'는 상부 구조물과 함포가 아직 갖춰지지 않은 상태였다. 이후 주 무장은 28센티미터 함포를 탑재한 삼연장 포탑 3기로 구성되었다. 여기에 15센티미터 함포를 단 연장 포탑 4기와 단장 포좌 4기, 다수의 소구경 함포, 그리고 어뢰 발사관 6문이 더해졌다. 여기에 수상기 3대까지 갖추면서 무장이 완성되었다. 추진 기관은 시속 57킬로미터가 넘는 속력을 낼 수 있었다. 총 건조 비용은 1억 4,300만 라이히스마르크로, 오늘날 가치로 환산하면 5억 유로가 넘는 금액이다.
함명의 유래: 게르하르트 폰 샤른호르스트
함수(船首)에는 하노버 인근 보르데나우 출신인 게르하르트 폰 샤른호르스트(1755~1813)의 이름이 새겨져 있었다. 프로이센의 이 장군은 나폴레옹에 맞선 전쟁에서 가장 중요한 지휘관 중 한 사람으로 평가받는다. 또한 구 귀족 특권의 폐지와 일반 징병제의 도입을 이끈 개혁가, 즉 프로이센 군제 개혁의 아버지로서도 이름을 떨쳤다.
그러나 히틀러의 전쟁 기계를 움직이는 강력한 무기의 이름이 되라는 다소 어울리지 않는 영예에 대해, 샤른호르스트 장군은 더 이상 아무런 말을 할 수 없었다. 그는 프랑스와의 전쟁 중이던 1813년 총상으로 세상을 떠났기 때문이다.
1939년, '샤른호르스트'의 취역
1939년 1월 초, '샤른호르스트'의 승조원이 될 병사들이 빌헬름스하펜에서 처음으로 한자리에 모였다. 이들은 그 전까지 서로 다른 장소에서 모형 장비를 활용해 새 함정 운용 훈련을 받아 온 터였다. 이제 좁은 함내 공간에서 함께 근무하고, 필요하다면 함께 전투에 임할 하나의 부대를 이루게 된 것이다. 취역식 연설에서 초대 함장 오토 칠리악스 대령은 '샤른호르스트'라는 자랑스러운 이름과 함께 따르는 의무를 강조했다. 「독일의 노래」가 연주되고, "기와 기를 올려!"라는 구령과 함께 하켄크로이츠가 그려진 국방군 군함기와 함장기가 게양되면서 '샤른호르스트'는 정식으로 취역했다.
전쟁 참전과 침몰
노르케이프 북쪽 약 160킬로미터 해상에서 '샤른호르스트'(자료: 후대 그림)는 1943년 12월 26일 영국군에 의해 격침되었다.
실전 투입까지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1939년 9월 1일 히틀러의 폴란드 침공으로 제2차 세계대전이 시작되었다. 전쟁 기간 동안 '샤른호르스트'는 자매함 '그나이제나우'와 함께 여러 차례 수적으로 열세인 함대를 상대로 성공적인 작전을 펼쳤다. 노르웨이 점령 작전과 대서양에서의 연합군 호송선단 공격에도 참여했으며, 이 과정에서 어뢰와 기뢰로 반복해서 피해를 입었다. 그리고 1943년 12월 26일, '샤른호르스트'는 전투 중 침몰했다. 영국 왕립해군의 압도적인 병력과 교전에 직면한 '샤른호르스트'는 수 시간에 걸친 포격전을 벌였지만, 2,000발이 넘는 포탄과 50발 안팎의 어뢰를 버텨내지 못하고 북해 바닥에 가라앉았다. 승조원 1,968명 가운데 구조된 이는 불과 36명에 불과했다.
57년간 행방불명이었던 '샤른호르스트'의 잔해
오늘날 킬의 노르트 묘지에는 "1939년부터 1943년 12월 26일 함침까지 전함 '샤른호르스트'의 전사자 1,975명"을 기리는 비석이 세워져 있다. 잔해를 찾기 위한 노력은 수십 년간 헛수고로 끝났다. 2000년 9월에야 노르웨이 언론인 알프 R. 야콥센이 수심 300미터 지점에서 마침내 잔해를 발견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