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럽의 역사

알테네쉬 전투(1234) – 독일 땅에서 벌어진 유일한 십자군, 슈테딩거 농민들의 자유 항쟁

수잔 아볼린스-아우프더하이데(Susanne Abolins-Aufderheide) 저 『슈테딩거에 대항한 십자군』을 프리드리히 호텐로트(Friedrich Hottenroth)가 삽화로 그려 1870년경 제작된 나무 조각.

'Lewer dod as Sklav', 즉 '노예가 되느니 차라리 죽는 것이 낫다'. 이것은 브레멘 대교구에 맞서 2년간 자유를 위해 싸운 슈테딩거(Stedinger) 농민들의 모토였습니다. 1234년 5월, 슈테딩거 전쟁(Stedinger War)의 향방을 가른 결정적인 전투가 벌어졌는데, 전장은 오늘날 베저마르쉬(Wesermarsch) 지역 렘베르더(Lemwerder) 자치구에 속한 알테네쉬(Altenesch)였습니다.

5월 27일, 탐모 폰 훈토르프(Thammo von Huntorp), 데트마르 톰 디크(Detmar tom Dyk, tom Dieke), 볼코 폰 바르덴플레트(Bolko von Bardenfleth)가 이끄는 약 2,000명의 농민이 브레멘 대주교 게르하르트 2세(Gerhard II) 휘하의 약 8,000명 십자군과 정면으로 맞섰습니다. 압도적인 수적 열세 속에 농민들은 참패했고, 이 십자군으로 반란은 완전히 진압되었습니다. 알테네쉬 전투는 독일 땅에서 일어난 유일한 십자군으로 기록됩니다.

이단으로 지목당한 농민들

슈테딩거 사람들은 과연 누구였을까요? 1160년 브레멘 대주교는 도시 서쪽 슈테딩엔(Stedingen) 지역에 농부들을 정착시켰습니다. 이들은 습지를 배수하고 제방을 쌓아 땅을 일궈야 했으며, 스스로를 강가의 주민이라는 뜻의 '슈테딩거'라고 불렀습니다. 험난한 개간의 노고에 대한 보상으로 재정적·법적 양보가 이루어졌고, 황제와 교황조차 동맹 세력으로 무시하지 않을 만큼 자립적인 일종의 '농민 공화국'이 발전하게 됩니다.

군사적 성공을 거듭하면서 슈테딩거들은 대주교를 무시할 만큼 자신감을 갖게 되었습니다. 브레멘 대주교 게르하르트 2세는 더 높은 세금을 통해 부유해진 습지 주민들을 다시 자신에게 예속시키려 했으나, 농민들은 세금 납부를 거부했습니다. 이것만으로 전쟁을 일으키기에는 명분이 부족했던 게르하르트 2세는 슈테딩거 가문을 로마의 교황 그레고리오 9세에게 이단자로 고발하는 수단을 택했습니다. 그는 슈테딩거들이 사제와 수도사를 살해하고, 교회와 수도원을 약탈·방화했으며, 밀랍 인형으로 이교 마술까지 행했다고 비난했습니다. 이 고발에 대응하여 교황은 마침내 슈테딩거 주민들을 종교적 일탈에서 강제로 되돌리겠다는 내용의 십자군 교서를 반포했습니다.

빼앗긴 농민의 자유

오벨리스크는 알테네쉬 전투에서 전사한 이들을 기리고 있습니다.

알테네쉬에서의 패배로 가장 큰 수혜자는 농장을 몰수해 서로 나눠 가진 올덴부르크 백작(The Counts of Oldenburg)이었으며, 농민들의 자유는 완전히 상실되었습니다.

이 전투는 이후 약 600년 동안 잊혀졌습니다. 성직자 게르하르트 슈타인펠트(Gerhard Steinfeld) 목사의 권유로 검은 오벨리스크가 알테네쉬 언덕에 '슈테딩의 명예(Honor of Steding)'라는 이름으로 세워지면서 비로소 기억이 되살아났습니다. 그러나 그로부터 100년 뒤, 자유를 위한 농민 항쟁의 역사는 국가사회주의자들에게 선전의 도구로 활용되기도 했습니다. 1934년, 그들은 전투 700주기를 맞아 아우구스트 힌리히스(August Hinrichs)의 희곡 'De Stedinge'의 야외 공연 초연을 기념했습니다. 당시 특설열차 16편에 나눠 타고 도착한 2만여 명의 관객이 알테네쉬 인근에 새로 지은 마을 야외 무대에서 펼쳐진 300명 배우의 공연을 관람했다고 전해집니다. 오늘날 알테네쉬 향토협회(Altenesch Heimatverein)가 이 전투의 기억을 간직하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