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상에서 가장 알아차리기 어려운 것은 바로 '어디에나 있는 것'입니다. 영어에는 이를 두고 "Hiding in plain sight"(눈앞에 숨어 있다)라는 관용 표현이 있을 정도입니다. 매일 우리 삶을 형성하면서도 너무 추상적이라 잘 보이지 않는 것들, 그 대표적인 예가 바로 '국가'를 구성하는 방식입니다.
오늘날 우리는 자신이 국민국가에 산다는 사실을 의심 없이 받아들입니다. 세상 거의 모든 사람이 그런 국가에 살고 있으니, 가장 정상적이고 자연스러운 일로 여겨지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이런 조직 원리를 굳이 '민족주의'라고 부르는 사람은 드물며, 혹여 언급되면 우익 극단주의와 혼동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그것은 사실이 아닙니다.
우리는 국가가 무엇보다 우선하는 세계에 살고 있습니다. 거의 모든 나라가 스스로를 특정 민족에 의한, 그리고 그 민족을 위한 국가로 규정합니다. 그 결과 국가의 기준에 부합하지 않는 사람들은 시스템의 일원으로 인정받지 못하고 '외국인' 또는 '소수자'로 분류됩니다. 이러한 통치 형태가 오늘날 대다수에게 지극히 정상적으로 보이는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그러나 민족주의 역시 스스로에게 고대의 역사를 부여할 뿐, 실제로는 놀랄 만큼 젊은 발명품입니다.
민족주의란 무엇인가?
'정상성'이란 그렇습니다. 오늘날 어떤 일이 평범해 보인다고 해서 그것이 언제나, 어디에서나 그랬다는 뜻은 아닙니다. 민족주의도 마찬가지입니다. 17~18세기 유럽을 돌아보면 이를 실감할 수 있습니다. 당시 유럽의 국가들은 오랜 전통처럼 왕국과 제국이었고, '국경'은 대부분 민족적·언어적 경계와 무관했습니다. 한 왕의 통치가 끝나고 다른 왕의 통치가 시작되면서 영토는 전쟁, 교환, 증여, 상속의 결과로 단순히 넘어갔습니다.
따라서 이들 국가의 주민 가운데 자신을 제국의 '국민'으로 정의하는 일은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사람들에게는 가족과 마을, 그리고 향토가 있었을 뿐입니다. 자신이 어디에 속해 있는지 분명히 알았고, 국가적 정체성 따위는 필요하지 않았습니다. 간단히 말해, 당신은 '독일인'도 '프랑스인'도 아니었습니다. 다만 오버하우젠(Oberhausen)이나 누아지르세크(Noisy-le-Sec)에 사는 사람이었을 뿐입니다.
그렇다면 현대 국가 없는 민족주의는 생각할 수조차 없습니다. 전근대적이고 비집권적인 국가 체제에서는 이 문제 자체가 제기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학계에서도 오랫동안 민족의 고대 뿌리에서 출발해 오늘날의 국민국가로 정점에 이른다는 이론들이 지배했지만, 오늘날 대부분의 연구자들은 소위 '모더니즘 이론'이라 불리는 반대 방향의 관점을 지지합니다. 근대성이 없으면 민족주의도 없다는 것입니다. 근대 이전 사회에는 민족주의가 해결한다고 가정되는 문제 자체가 존재하지 않았으니까요.
근대성의 산물
근대, 특히 계몽주의와 프랑스 혁명을 거치며 유럽 국가들에게 흥미로운 문제가 발생합니다. 그때까지 유럽의 통치자들은 자신이 '신의 은총'으로 즉위했다고 여겼습니다. 적어도 이론상 권력은 이 세상의 어떤 근거에서도 나오지 않고 더 큰 질서에 의해 미리 정해진 것이었습니다. 물론 일반 백성을 상대로 이 통치 원리를 정당화할 필요는 크게 없었습니다. 통치에 중요한 귀족들의 마음을 사는 데에는 선물과 폭력, 혹은 그 둘의 혼합 같은 다른 수단도 있었으니까요.
한편 피지배자들에게 정체성의 문제는 전근대에 제기되지 않았습니다. 신분 계층이 정체성의 표지였고, 소속 마을이 있었으며, 더 큰 범위에서는 종교가 있었습니다. 어떤 언어를 쓰는지는 그다지 중요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늦어도 프랑스 혁명에 이르러 이 체계는 양쪽에서 모두 무너졌습니다. 국가의 안정을 회복하는 하나의 방법으로 등장한 것이, 한동안 이론적·낭만적 구상으로만 존재하던 민족주의였습니다. 프랑스 왕의 옛 신민들은 혁명과 함께 '시민'이 되었고, 동시에 '외국인'이라는 개념도 세상에 등장했습니다. 이제 국가에 속한다는 것이 출신에 따라 결정되었습니다. 프랑스인 부모에게는 프랑스인 자녀가 있는 식입니다. 종교와 신분이 점차 힘을 잃던 시기에 새로운 정체성의 축, 곧 '국가'가 등장한 것이고, 통치자들 역시 자신들을 국민과 국가에 봉사하는 지도자로 재정의했습니다. 서로에게 윈윈(win-win)인 구조였습니다. 이것이 어니스트 겔너(Ernest Gellner)가 저서 『민족과 민족주의』에서 처음 체계화한 모더니즘 민족주의 이론의 기본 골격입니다.
오늘날 국가의 발명
이제 현재의 이야기에 거의 다다릅니다. 원시적인 민족 개념이 이미 뿌리내린 프랑스와 영국에 이어, 민족주의는 점점 더 많은 유럽 국가에서 새로운 국가 원리로 확산되었습니다. 오늘날 거의 모든 유럽 국가가 자신을 국민국가로 규정하며, 인류가 주로 국가와 언어로 자신을 동일시하는 것은 완전히 정상적인 일이 되었습니다. 종교, 계급, 그리고 우리를 구별 짓는 다른 요소들은 점점 작은 역할만 남았습니다.
그러나 이 '국가 공동체'는 비현실적인 존재입니다. 자신을 공동체의 일원으로 정의하면서도, 압도적 다수의 다른 구성원들은 평생 만나거나 알아볼 수 없기 때문입니다. 베네딕트 앤더슨(Benedict Anderson)이 『상상의 공동체』에서 설명하려 한 딜레마가 바로 이것이며, 마을 공동체의 경우는 근본적으로 달랐습니다. 덧붙이자면, 놀랍도록 읽기 쉽고 재미있는 책이라 꼭 추천하고 싶습니다.
앤더슨은 또한 민족주의라는 개념 자체의 근본 원인을 먼저 파악해야 하며, 그렇지 않으면 전체에 대한 이해를 흐리는 이데올로기로 오해하기 쉽다고 결론지었습니다. 적어도 필자의 경험상 이는 확실히 사실입니다. 정치인과 학자 모두 민족주의를 공산주의나 자유주의 같은 이념과 혼동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러나 실제로 민족주의는 그런 의미의 이념으로 기능하지 않습니다. 사람들이 민족주의를 위대하다고 여겨 세뇌당하고 이념을 따르는 것이 아니라, 민족주의 체제 안에 살고 있기에 그것을 눈치채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민족주의는 공산주의 같은 이념보다 종교 같은 체제에 훨씬 가깝습니다.
중앙집권 국가와 결합하면서 민족주의는 빠르게 사람들의 삶에 스며들 기회를 얻었습니다. 바로 이 점이 민족주의가 '근대적'인 이유입니다. 중앙집중식 학교 시스템, 행정, 국가 언론이 18세기 이후 새롭게 정비된 표준어를 사용하면서, 본래 아무 공통점이 없고 수백 킬로미터 떨어져 살던 사람들이 놀랍도록 유사한 삶의 경험을 갖게 되었습니다. 학교에서 같은 것을 배우고, 매일 같은 신문을 읽은 것입니다. 어느새 100년 전에는 상상할 수 없었던 민족주의가 19세기 말 유럽의 새로운 표준이 되었고, 세계가 그 뒤를 따랐으며, 사람들은 자신의 '국가'를 위해 기꺼이 죽으려 했습니다. 정말 종교와 닮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이번 주 팟캐스트 에피소드에서 민족주의와 그 본질을 다루게 되어 이 글을 쓰게 되었습니다. 발칸반도의 민족 신화를 주제로 하는 "News from the Ballaballa Balkans" 팟캐스트의 Danijel, Krsto와 나눈 대화입니다. 이 글을 읽고 나면 이미 준비는 끝났을 테니, 꼭 들어보시길 권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