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세기 스페인을 대표하는 군사 지도자 곤살로 페르난데스 데 코르도바(Gonzalo Fernández de Córdoba)는 '위대한 대장(El Gran Capitán)'이라는 별명으로 널리 알려져 있으며, 스페인 최초의 전문 군대를 창설한 인물로 평가받습니다. 15세기 말, 가톨릭 군주는 그라나다 왕국을 재정복하고 스페인 영토에서 무어 세력을 몰아내기로 결심합니다. 이 원정에 동원된 군대 가운데 훗날 '위대한 대장'으로 불리게 될 돈 곤살로 페르난데스 데 코르도바가 있었는데, 그는 그라나다 포위전에서 세운 무공으로 왕실의 인정을 받았습니다. 그라나다가 함락된 후에는 페르디난드 왕의 명을 받아 나스리드 왕조의 마지막 군주 보아브딜과 함께 1492년 도시 항복 조약을 체결하는 영예를 안았습니다.
궁정으로의 발탁
곤살로 페르난데스 데 코르도바는 1453년 9월 1일 몬티야(코르도바)에서 태어났습니다. 아버지가 사망한 뒤, 그는 가문의 먼 친척인 디에고 데 카르카모(Diego de Cárcamo)의 보호 아래 교육을 받기 위해 코르도바로 보내졌습니다. 당시 카스티야는 정통 왕 엔리케 4세를 지지하는 세력과 왕위를 주장한 돈 알폰소를 따르는 세력으로 분열되어 있었습니다. 어린 곤살로는 돈 알폰소의 시종이 되기 위해 아빌라(Ávila)로 갔고, 엔리케 4세 사후에 벌어진 왕위 계승 전쟁에서도 그를 따라 전장에 나섰습니다. 알부에라 전투에서 그는 120명으로 구성된 기병 중대를 지휘하며 이름을 알리기 시작했습니다.
그라나다 재정복
가톨릭 군주가 그라나다 재정복 전쟁에 나섰을 때, 곤살로 페르난데스 데 코르도바는 이 역사적 원정에 동원된 군대에 합류했습니다. 전설에 따르면 도시 포위전에서 그는 용맹과 무예로 두각을 나타냈습니다. 이 공로를 인정한 가톨릭 왕 페르난도는 나스리드 왕 보아브딜과 항복 조약을 맺는 임무를 그에게 맡겼습니다. 포위전 기간 중 그의 인품을 보여주는 일화도 전해집니다. 화재로 포위군 진영 일부가 불탔고, 불길은 상점과 물품들 사이에서 이사벨 여왕의 옷장까지 집어삼켰습니다. 곤살로는 아내 마리아 만리케에게 일리오라(Illora)에서 옷장을 대체할 모든 물품을 즉시 보내도록 조치했습니다. 이것이 바로 '위대한 대장'의 관대함이었습니다.
이탈리아 원정
프랑스의 샤를 8세가 이탈리아를 침공하면서, 대장은 나폴리 왕 페르디난도 2세를 도와 가톨릭 왕 페르난도의 깃발 아래 싸울 기회를 얻었습니다. 위대한 대장은 밀라노, 로마, 베네치아, 오스트리아 군대와 연합한 소위 신성동맹군과 함께 메시나에 상륙해 작전을 수행했습니다. 나폴리 왕은 칼라브리아 해안에 상륙하여 페르난데스 데 코르도바와 합류했고, 연합군은 레조 시를 점령했습니다. 원정은 연합군이 세미나라에서 패배할 때까지 순조로웠습니다. 그러나 페르난데스 데 코르도바는 병사들의 사기를 진작시키고 원정을 재개하여 양 칼라브리아를 수복했습니다.
다만 북부 지방은 여전히 프랑스군의 손아귀에 있었고, 프랑스군은 완강한 저항을 이어갔습니다. 그러나 1496년 7월 페르디난도의 뒤를 이어 나폴리 왕위에 오른 프리드리히 1세는 프랑스군을 몰아내기 위해 스페인 대장에게 도움을 청했고, 페르난데스 데 코르도바에게 패한 프랑스 장군은 철수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교황령의 해방
이 무렵부터 그는 '위대한 대장(El Gran Capitán)'이라는 별명을 얻었고, 이 이름은 역사에 길이 남게 됩니다. 그의 뛰어난 군사적 재능을 눈여겨본 교황 알렉산데르 6세는 해적 멘알도 게리(Menaldo Guerri)의 약탈로부터 교황령을 해방시켜 달라고 요청했습니다. 게리는 총독직을 맡고 있던 오스티아를 거점으로 삼아 로마로 향하는 보급로를 차단하고 있었습니다. 페르난데스 데 코르도바는 이 임무를 눈부시게 수행했습니다. 그는 오스티아를 점령하고 해적을 생포했으며, 이후 나폴리에서 시민들의 환호를 받았습니다. 페데리코 1세는 테라노바와 산탄젤로 공작령을 비롯해 자신의 모든 땅, 도시, 마을, 요새를 그에게 하사했습니다.
아풀리아와 칼라브리아 점령
카를로스 8세가 사망하고 신성동맹이 해체된 후, 그는 그라나다에서 한 시즌을 보낸 뒤 1500년 이탈리아로 돌아왔습니다. 그라나다 조약에 따라 그는 가톨릭 군주의 몫이었던 아풀리아와 칼라브리아를 점령했습니다. 이 조약으로 시칠리아 왕국의 분할과 페데리코 1세의 폐위가 프랑스의 루이 12세와 합의되어 있었습니다. 대장은 트로페아에 상륙해 양 칼라브리아와 나르도(Narento)의 거점을 장악했고, 스페인으로 호송될 왕위 계승자 칼라브리아 공을 포로로 잡았습니다. 그러나 스페인과 프랑스 사이의 취약한 평화는 오래가지 못했습니다. 전쟁이 재개되자 프랑스군은 가릴리아노(Garillano) 전투에서 패배했고, 나폴리 왕국 전체가 스페인의 손에 넘어갔습니다.
궁정에서의 말년과 죽음
페르난데스 데 코르도바는 페르난도를 시칠리아의 왕으로 인정하고 그의 이름으로 통치했습니다. 그러나 몇 년이 지나면서 군주와 신하 사이의 신뢰가 흔들리기 시작했고, 결국 대장은 스페인으로 돌아가 궁정에서 멀리 떨어진 로하에 정착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스페인 전문 군대의 창시자이자 보병 제도의 기반을 마련한 인물로 평가받는 곤살로 페르난데스 데 코르도바는 1515년 그라나다에서 생을 마감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