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오니다스 왕과 그의 300명 스파르타 전사들—잊혀진 700명의 테스피아이 병사와 400명의 테바이 병사를 제외하면—이 크세르크세스의 무수한 대군(약 10만~100만으로 추정)에 맞섰던 테르모필레 전투의 위업은 누구나 잘 알고 있다. 그러나 오늘날 파키스탄 영토에서 벌어진, 이와 흡사한 또 다른 전설적인 전투가 있었다. 바로 단 21명의 시크교도 병사가 1만 명의 파슈툰족에 맞선 사라가르히 전투다.
영국 동인도 회사와 세포이 항쟁
순수한 상업 활동으로 시작된 영국 동인도 회사(British East India Company)는 점차 인도, 미얀마, 싱가포르, 파키스탄 등 자신들이 진출한 영토에 대한 민정·군사 통제권을 장악해 나갔다. 이 회사는 심지어 4만 명의 영국인과 20만 명의 세포이(sepoy, 현지 힌두교·이슬람교 출신 병사)로 구성된 강력한 군대를 보유하고 있었으며, 선전포고권까지 가지고 있었다.
경제적 수탈에도 불구하고 모든 것이 순조롭게 돌아가는 듯했지만, "몰수 원칙(Doctrine of Lapse)"이라는 정책이 적용되면서 상황은 악화되었다. 이 원칙에 따라 남성 상속인 없이 통치자가 사망한 영토는 모두 영국 회사의 지배로 넘어갔다. 결국 1857~1858년의 세포이 항쟁(Sepoy Rebellion)을 거치며 모든 것이 무너졌고, 영국 동인도 회사의 모든 자산은 영국 왕실로 이관되었다.
영국령 인도 육군의 시크교도 병사들
시크 연대의 등장
이 반란을 진압하기 위해 영국은 "무자비한 탄압"이라는 매뉴얼을 동원했다. 그리고 운 좋게도 시크교도들의 지원을 받을 수 있었다. 시크교도들은 1840년대 소위 영국-시크 전쟁에서 영국과 싸운 적이 있었음에도, 힌두교도와 이슬람교도에게 받았던 경멸에 대한 분노가 더 컸기 때문이다. 이러한 충성심 덕분에 시크 연대(Sikh Regiment)는 영국령 인도 육군 내에서 명성과 인정을 얻었고, 다른 현지 병사들에 비해 특별한 특전도 인정받았다.
시크 연대는 주로 치안 유지와 파슈툰족(Pashtun)에 대한 국경 방어 임무에 투입되었다. 당시 국경은 오늘날 파키스탄과 아프가니스탄 사이의 국경 지역이다. 1897년 8월, 존 호턴(John Haughton) 중령의 지휘 아래 시크 제36연대의 5개 중대가 파슈툰족의 습격을 막기 위해 록하트 요새(Fort Lockhart)와 굴리스탄 요새(Fort Gulistan)에 주둔하게 되었다.
문제는 두 요새가 몇 킬로미터밖에 떨어져 있지 않았음에도 험준한 산악 지형 때문에 서로를 육안으로 확인할 수 없다는 점이었다. 그래서 두 요새의 중간 지점에 사라가르히(Saragarhi)가 설치되었다. 작은 석벽과 몇 채의 건물로 이루어진 이 탑은 헬리오그래프(heliograph, 거울에 햇빛을 반사시켜 신호를 보내는 통신 체계)를 이용해 두 요새 간의 통신 중계소 역할을 했다. 사라가르히 수비대는 이샤르(Ishar) 하빌다르(상등사)가 지휘하는 단 21명의 시크교도 병사로 구성되어 있었다.
헬리오그래프 통신 장비
전투의 시작: 21명 vs 10,000명
1897년 9월 3일과 9일, 수천 명의 파슈툰 오라크자이(Orakzai)족과 아프리디(Afridi)족 전사들이 굴리스탄 요새를 공격했지만, 영국군과 시크교도들은 큰 어려움 없이 버텨냈다. 그러나 파슈툰족은 지역에 계속 머물러 있었고, 1만 명 규모의 부대가 사라가르히로 진격해 두 요새 간의 통신을 차단하고 증원을 받지 못하게 하려 했다.
1897년 9월 12일, 임박한 위협 앞에서 이샤르 하빌다르는 모든 병사들을 모아 상황을 알렸다. 1만 명의 적이 그들을 향해 진격 중이며, 존 호턴 중령은 증원을 보낼 수 없다고 통보했다. 죽음이 예감되었지만 아무도 항의하지 않았고, 도망치려 한 사람도 없었다.
압도적인 수적 열세—500 대 1—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파슈툰족의 공격을 하나씩 격퇴해 나갔다. 이 모든 시간 동안 헬리오그래프 담당자 구르묵(Gurmukh)은 록하트 요새와 굴리스탄 요새와 끊임없이 교신하며 전황의 세부 사항을 전달했다.
7시간에 걸친 저항 끝에 파슈툰족은 마침내 성벽 일부를 무너뜨렸다. 그리고 부족한 탄약이 나머지를 결정지었다. 마지막 생존자가 된 구르묵은 이렇게 외쳤다.
"이것이 나의 마지막 메시지다. 이제 내 소총을 들겠다..."
마지막 전투와 희생
파슈툰족 측 기록에 따르면, 구르묵은 시크교도들의 전투 함성인 «볼레 소 니할… 사트 스리 아칼(Bole So Nihal… Sat Sri Akal)»("진실을 말하는 자는 승리한다… 진실은 영원하다"로 대략 번역됨)을 외치며 20명이 넘는 적을 쓰러뜨린 후 전사했다고 전해진다.
그들이 7시간 동안 버틴 것, 그리고 끝까지 통신을 유지한 것 덕분에 굴리스탄 요새는 록하트 요새로부터 증원을 받아 공격을 완전히 물리칠 수 있었다. 영국군이 사라가르히에 도착했을 때, 그곳에는 21명의 시크교도 병사들의 시신과 함께 500명이 넘는 파슈툰족의 시신이 있었다.
9월 14일의 사라가르히 폐허
불멸의 유산
21명의 시크교도 병사 모두는 그들의 용기와 희생을 기려 영국령 인도 육군 병사에게 수여되는 최고 훈장인 인도 공로 훈장(Indian Order of Merit)을 추서받았다. 그곳에는 시크교도들의 용맹함을 기리는 기념비가 세워졌으며, 비석에는 모든 영웅들의 이름이 새겨져 있다. 또한 유네스코(UNESCO)에 따르면 사라가르히 전투는 인류 역사상 가장 위대한 집단적 용맹성에 관한 8가지 이야기 중 하나로 꼽힌다. 9월 12일은 시크교도들에게 자부심의 날이다.
출처: Devology, India Post, The Tribune India