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약한 왕 카를로스 4세의 즉위 (1788년)
1788년 12월, 카를로스 4세가 스페인의 왕으로 즉위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통치자로서 뚜렷한 자질을 갖춘 군주가 아니었습니다. 그는 아내 마리아 루이사 데 파르마처럼 정무를 타인의 손에 맡겼고, 실권은 마누엘 고도이(Manuel Godoy)에게 넘어갔습니다. 여기에 당대 최대의 격변인 프랑스 혁명이라는 거대한 파고까지 겹치면서 그의 통치는 흔들리기 시작했습니다.
왕세자 시절, 그는 아버지 카를로스 3세에게 이렇게 말한 일화가 전해집니다.
"우리 왕들은 아내가 우리를 속이지 않는다는 것을 확신할 수 있는 유일한 사람입니다. 왕자보다 더 나은 처지가 어디 있겠습니까?"
이에 아버지 카를로스 3세는 냉담하게 답했습니다.
"그런데 네가 내 아들이라니, 참으로 바보 같구나!"

▲ 카를로스 4세
모로코와의 조약, 그리고 밀 수입 거절
왕이 된 카를로스 4세는 국정을 마누엘 고도이에게 사실상 일임했습니다. 한편 지브롤터 해협 건너편에서는 알라위 왕조의 물레이 술레이만(Muley Suleiman)이 모로코 술탄으로 즉위했습니다. 1799년, 카를로스 4세와 술레이만은 평화·우호·항해·통상·어업 조약을 체결했습니다. 양국은 처음에는 상호 이해와 외교적 타협의 모습을 보였지만, 이 조약은 번번이 유명무실하게 남고 말았습니다.
【지식 한 스푼】 1799년 모로코는 미국을 최초로 승인한 국가였으며, 세계 최초의 미국 영사관이 설치된 나라이기도 합니다.
밀을 위해 세우타와 멜리야를 내걸다
1801년, 흉년으로 곡물이 부족해진 스페인 정부는 예전처럼 모로코에서 밀을 구매하려 했습니다. 그러나 술탄 술레이만은 이를 거절했습니다. 이에 고도이는 스페인 대사에게 충격적인 지시를 내립니다. 술탄이 탐내는 세우타(Ceuta)와 멜리야(Melilla)를 밀값의 '화폐'로 제안하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술탄은 이 제안마저 거절했고, 결국 스페인령을 무력으로 빼앗기는 상황까지 벌어졌습니다. 고도이의 머릿속에는 로마 제국처럼 북아프리카에 스페인의 '곡물 창고'를 확보하려는 야심이 자리하고 있었습니다.
비밀 작전, '알리 베이 엘 아바시'의 탄생
마치 타이밍을 맞춘 듯, 같은 해 도밍고 바디아 이 레블리히(Domingo Badía y Leblich)가 정부에 아프리카 여행 계획을 제출합니다. 시리아 출신 무슬림 행세를 하며 아프리카를 여행하고, 상업적 가능성을 조사하며 지도를 작성한다는 것이 골자였습니다. 이 과학적 프로젝트는 고도이에게는 모로코 영토를 탐사하고 그들의 군사력을 파악하며, 전쟁 발발 시 술탄의 적대 부족들과 동맹을 맺을 수 있는 절호의 기회였습니다. 궁극적인 목표는 아프리카를 귀금속과 원자재 공급에 있어 미국보다 저렴하고 안전한 대안으로 전환하는 것이었습니다.
제도권의 재정 지원은 거부되었지만, 고도이가 직접 프로젝트를 승인하고 자금을 댔습니다. 철저한 기밀 프로젝트였기에 — 마치 만화 속 모르타델로와 필레몬의 요원처럼 — 1801년 11월 28일, 이 여행 계획은 마드리드 일보(Diario de Madrid)에 공개 게재되었습니다. 다행히 술탄은 스페인 신문을 구독하지 않았습니다.

▲ 마누엘 고도이
시리아 상인으로 완벽하게 변신하다
발각을 피하기 위해 바디아는 할례를 받고 아랍어를 완벽하게 익혔으며, 어울리는 의상과 새로운 이름 '알리 베이 엘 아바시(Ali Bey el Abbassi)'를 갖췄습니다. 그는 예언자 무함마드의 후손이라는 완벽한 가계도까지 준비했습니다.

▲ 알리 베이
1803년, 그는 탕헤르에서 여행을 시작했습니다. 정교한 가계도와 아낌없이 뿌린 선물 덕분에 술탄 술레이만의 알현에 성공했고, 모로코 전역을 여행할 수 있는 안전 통행증을 손에 넣었습니다. 이후 2년간 그는 낯선 내륙 지역을 누비며 현지 풍습을 익혔고, 심지어 반란을 일으키기 위해 술탄의 적들과 접촉하기까지 했습니다. 그의 보고서는 모가도르(오늘날의 에사우이라) 주재 스페인 영사 프란시스코 아모로스(Francisco Amorós)를 통해 고도이에게 전달되었습니다.
1804년, 무산된 침공 계획
1804년, 알리 베이의 보고서는 "현재 진행 중인 반란을 지원하기 위해 세우타에 병력과 무기를 보내라"고 권고했습니다. 고도이는 즉시 모든 준비에 착수했지만, 카를로스 4세가 이 사실을 알고 선적을 금지하면서 계획은 무산되었습니다. 너무 많은 움직임이 의심을 샀고, 1805년 술탄은 알리 베이에게 모로코에서 떠날 것을 명령했습니다.
정치 임무의 끝, 진짜 탐험의 시작
이후 그의 여정은 정치적 임무에서 과학적 탐험으로 바뀝니다. 리비아, 알제리, 이집트를 거쳐 비무슬림의 출입이 금지된 메카의 카바를 직접 방문했고, 예루살렘, 시리아, 콘스탄티노플까지 발길을 이었습니다. 5년간의 여행을 마친 그는 1808년 7월 12일 귀국했습니다. 그러나 고향 스페인은 이미 나폴레옹 군대가 입성하고 조제프 보나파르트의 괴뢰 정부가 들어선 혼란의 소용돌이였습니다.
도밍고는 프랑스 편에 섰거나, 바욘에서 함께했던 카를로스 4세의 명령을 따랐기에 스페인에 남았습니다. 1809년에는 세고비아 시장으로, 이듬해에는 코르도바 시장으로 임명되어 세 개의 묘지 건설, 농업 정원 개관, 코르도바 최초의 도시 기본 계획 수립을 주도했습니다. 영구 도시 쓰레기 수거 서비스와 도시 위생을 위한 각종 조례 — 하루 두 번 보도를 쓸고 물을 뿌릴 것, 죽은 동물은 마을에서 멀리 매장할 것 같은 이웃의 의무 등 — 도 그의 손에서 만들어졌습니다.
여행문학의 걸작, 그리고 정체 폭로
프랑스가 패배한 후 그는 파리로 망명했고, 1814년 7월 저서 『알리 베이 엘 아바시의 1803~1807년 아프리카·아시아 여행기』를 출간했습니다. 여행 지도를 담은 4번째 책을 포함한 3권 구성의 이 작품은 오늘날까지 여행문학의 걸작으로 꼽힙니다.
알리 베이의 실체는 첫 스페인어 번역본이 나온 1836년까지 비밀에 부쳐졌습니다. 그해 출간된 번역본의 서문에서 이 '시리아 여행자'가 실은 도밍고 바디아였음이 밝혀졌고, 같은 해 고도이가 출간한 회고록에서도 바디아가 자신의 비밀 요원이었다는 사실이 공개되었습니다.
도밍고 바디아는 1818년, 프랑스를 위해 활동하던 중 다마스커스에서 사망했습니다. 영국인에게 정체가 발각되어 독살되었을 가능성이 제기됩니다.
출처: 페르난도 비야노, 『알리 베이의 변신: 아프리카 비밀 탐험』(나우틸루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