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럽의 역사

성 베드로의 무덤은 실제로 어디에 있을까?

겉보기에는 이 매장지에 대해 아무런 의심의 여지가 없어 보인다. 하지만 이곳에 대한 진지한 의문이 제기되기까지 천여 년이라는 시간이 걸렸다. 기독교 역사상 가장 중요한 무덤 중 하나의 위치에 대해 우리는 무엇을 알고 있을까? 그리고 그곳이 정확히 어디인지 언젠가 확실히 알 수 있게 될까?

가장 단순해 보이는 질문

복음서가 전하듯 예수 그리스도께서 친히 교회의 지도력을 맡기셨던 첫 번째 교황, 성 베드로의 영면처를 가리키는 일만큼 간단한 일은 없어 보인다. 이미 서기 4세기, 콘스탄티누스 황제에 의해 무덤 위로 최초의 바실리카가 세워졌다. 이 초기 건물은 오늘날까지 남아 있지 않지만, 16세기에 그 자리에 다시 세워진 바실리카에는 매년 수백만 명의 신자가 순례를 온다.

가톨릭 전통에 따르면 성 베드로는 로마에 기독교 공동체를 세웠다고 한다. 그렇다면 그는 과연 '영원한 도시' 로마에 실제로 있었던 걸까?

그리스도의 죽음 이후 어느 시점에 베드로가 로마에 이르러 그곳에서 순교자의 죽음을 맞았다는 믿음은 가톨릭 전통의 핵심을 이룬다. 심지어 로마 주교로서 그의 '재임 기간'이 25년에 달했다고 전해지며, 이에서 '어떤 교황도 그토록 오래 왕좌에 머물지 못한다'는 예언이 생겨났고, 이 예언은 32년간 통치한 비오 9세에 의해서야 19세기에 무너졌다. 최고 사도의 죽음에 대한 기록도 전해진다. 그는 자신의 스승과 같은 방식으로 죽지 않기 위해 스스로 요청하여 거꾸로 십자가에 못 박혀 순교했다고 한다.

문제는 이 이야기 전체가 점차 의심받기 시작했다는 점이다. 결국 교황들조차 바티칸 성전 아래에서 발견된 유해가 과연 로마의 초대 주교의 것인지 확신하지 못했다. 1940년에야 비오 12세가 발굴을 명령했다. 어떻게 그런 일이 가능했을까?

500년 넘게 이어진 회의

베드로의 무덤이 반드시 바실리카 바닥 아래에 있는 것은 아니라는 주장은 물론 이단들이 처음 내놓았다. 12세기 프랑스 남부에서 생긴 작은 종파인 발도파는 사도가 로마에 있었다는 사실 자체를 믿지 않았다. 파베우 리시츠키는 저서 『어부의 무덤』에서 "발도파는 성경에 근거하지 않은 모든 것을 거짓으로 여겼다"라고 설명하며, "그들은 교황직의 토대가 되는 베드로의 로마 입성 전통을 거짓이라고 믿었다"고 덧붙였다.

14세기 철학자 파두아의 마르실리우스도 더 설득력 있는 형태로 비슷한 의심을 제기했다. 그는 "[베드로]가 로마의 주교였으며, 나아가 로마에 있었던 적이 있다는 사실을 성경으로부터 증명할 수 없다"고 적었다. 이는 미래의 교황좌가 될 도시에서 사도가 활동했다는 직접적인 언급이 성경에 없다는 사실에 근거한 것이었다. 그는 이렇게 말했다.

"어떤 대중적인 이야기에 따르면 성 베드로가 성 바울보다 먼저 로마에 와서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고 감옥에 갇혔다고 하는데, 이는 지극히 놀라운 일이다. 이 모든 것이 놀라운 이유는, 다시 말해 사도행전을 기록한 누가와 바울 자신조차 성 베드로의 로마 체류에 대해 한마디도 언급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 후 몇 세기에 걸쳐 루터와 칼뱅도 거의 같은 논거를 들었다. 그러나 이 문제에 대한 의심이 본격화된 것은 19세기였다. 당시 가톨릭 전통을 뒷받침하던 거의 모든 근거가 의심받았다. 베드로 자신이 첫째 서신에서 언급한 '바빌론'이 반드시 로마를 가리키는 것은 아니라는 주장이 제기되었다.

첫 교황에 관한 이야기의 기초가 되어 온 성경 외적 증언들, 즉 위경 '베드로 행전', 테르툴리아누스, 알렉산드리아의 클레멘스, 히폴리토스, 오리게네스, 제롬 등의 언급 역시 재검토되었다. 8권짜리 교회사를 집필한 19세기 기독교 신학자 페터 샤프는 이들이 모두 로마에 있었던 바울과 베드로를 잘못 연결시켰을 가능성을 제안했다.

"(…) 오순절 기적을 목격하고 베드로의 설교를 들었던 일부 '로마 방문자들'과 제자들이 흩어지면서 복음의 씨앗을 로마에 전했고, 베드로에게서 개종한 이들이 수도의 유대계 기독교 공동체의 진정한 창립자가 되었을 가능성으로 이를 설명할 수 있다. 결국 제자들의 이름을 잊고 스승만을 찬양한 전통 속에서 베드로의 간접적 활동이 자연스럽게 직접적 활동으로 변모한 것이다."

파베우 리시츠키가 『어부의 무덤』에서 강조하듯, 이러한 입장을 지지하는 이들이 지금도 많으며, 어쩌면 다수를 이룰지도 모른다. 그중 한 사람이 고전문헌학자 오토 츠비를라인이다. "츠비를라인 교수에 따르면 베드로는 로마에 간 적이 없으며, 이에 관한 모든 기록은 20세기 만에 그가 밝혀낸 오류와 번역 실수의 축적일 뿐"이라고 리시츠키는 요약한다.

신학자 프레더릭 C. 그랜트 교수 역시 마찬가지로 엄격했다. 그의 견해로는 초대 주교의 로마 체류에 관한 모든 증언은 "암시와 은근한 언급, 소극적이고 모호한 표현"에 불과하다. 그러나 반대 진영에서는 같은 근거를 완전히 다르게 평가한다. 전 신앙교리성 장관 게르하르트 뮐러 추기경은 "베드로의 로마 체류와 첫 사도로서의 활동에 관해서는 합리적으로 정당화된 역사적 의심이 없다"고 주장했다.

바실리카 지하의 발굴

가톨릭 측은 비오 12세가 명한 바실리카 지하의 고고학 작업이 수백 년에 걸친 논쟁에 종지부를 찍기를 바랐다. 그러나 가톨릭 작가 조지 위걸의 표현대로 '고고학은 대수학이 아니며', 늘 명확한 답을 내려주지는 못했다.

그렇다면 20년에 걸친 발굴에서 무엇이 확인되었을까? 리시츠키는 미하엘 헤제만의 연구를 바탕으로 다음과 같이 정리했다.

  • 1세기의 빈 무덤
  • 2세기의 묘비 기념물
  • 3세기의 은닉처가 있는 벽, 그 위에 그리스도와 마리아, 성 베드로를 향한 수많은 호소문이 새겨져 있음
  • 은닉처에서 발견된 뼈는 1세기 무덤에서 옮겨진 것으로 추정됨
  • 뼈에는 보라색과 금색이 섞인 흔적이 남아 있어 특별히 공경받았던 것으로 보임
  • 사도를 가리키는 'PETROS ENI'라는 표식이 함께 발견됨
  • 모든 뼈가 한 남자의 골격에 속하며, 나이와 체격이 성 베드로의 전해지는 모습과 부합함
  • 발 뼈가 없다는 점은 거꾸로 십자가형에 관한 전승이 사실일 수 있음을 시사할 수 있음

베드로 유해의 진위를 확신하는 저자는 여기에 한 가지 논거를 더한다. "역사 기록 어디에도 베드로와 바울의 다른 매장지에 대한 언급이 없다"는 것이다. 또한 성 바울 대성당에서 보라색과 금실로 감싸인 유해가 발견된 최근의 발굴 성과 역시 두 사도가 모두 로마에 묻혔다는 주장을 더욱 뒷받침한다고 그는 주장했다.

연구에 직접 참여한 마르게리타 구아르두치 교수 역시 로마 초대 주교의 무덤과 뼈가 발견되었다는 견해의 강력한 지지자였다. 벽에 새겨진 수많은 비문을 해독한 것이 그녀이며, 'PETROS ENI'라는 비문을 '베드로는 중앙에 있다'로 해석해야 한다고 제안한 사람도 그녀였다. 무엇보다 10년 넘게 상자 속에 방치되어 있던 유해를 알아본 것도 바로 그녀였다.

그런데 이 모든 성과에 대한 교황들 자신의 태도는 놀랄 만큼 신중했다. 1950년 크리스마스 이브, 비오 12세는 무덤의 위치가 확인되었다고 발표했지만, 발굴이 아직 진행 중이었기에 유해에 대해서는 언급하지 않았다. 바오로 6세는 1968년에 유해가 발견되었다고 밝혔지만, '우리가 설득력 있다고 판단하는 방식으로 확인되었다'는 표현을 쓰며 신중함을 유지했다.

"9개의 뼈 조각이 분리되어, 바오로 6세의 개인 비서 몬시뇰 마키의 의뢰로 조각가 에지디오 지아롤리가 제작한 은제 성유함에 봉인되었다. 이 작은 성유함은 교황의 개인 예배당에 안치될 예정이었다. 주목할 것은 성유함에 새겨진 문구였다. 이것이 베드로의 뼈라고 단언하는 대신, 성유함 안의 것은 '베드로의 것으로 추정되는' 물건이라고 명시되어 있었다."

아마도 이 교황의 평가 이상을 덧붙이기는 어려울 것이다. DNA 검사만이 이 문제를 명확히 결정할 수 있겠지만, 베드로의 후손에 관한 정보가 거의 없어 비교할 유전 자료가 없는 실정이다. 그렇다면 이 논쟁은 아직 한참 끝나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