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제3차 포에니 전쟁은 후대 역사가들 사이에서 '만행'이라 불릴 만큼 논란이 많은 전쟁입니다.
한니발 전쟁으로도 알려진 제2차 포에니 전쟁은 로마 입장에서 "먼저 공격받고 되갚았다"는 정당성이 성립하지만, 제3차 포에니 전쟁은 로마 측의 일방적인 침략으로 보아야 한다는 것이 많은 역사가들의 중론입니다.
결국 카르타고는 동맹국도, 속주도 되지 못한 채 지도 위에서 완전히 지워지고 말았습니다.
이 제3차 포에니 전쟁을 주도한 인물이 바로 '대(大) 카토'라 불리는 마르쿠스 포르키우스 카토 켄소리우스입니다.
이번 글에서는 그런 대 카토의 삶과 행보를 함께 살펴보겠습니다.
평민 출신 집정관
로마 공화정은 기본적으로 귀족 중심의 사회였습니다. 하지만 세계사 교과서에도 등장하는 리키니우스-섹스티우스 법과 호르텐시우스 법 덕분에 평민들도 중요한 관직에 오를 수 있는 길이 열리게 됩니다.
이러한 흐름 속에서 대 카토는 로마 명문 귀족인 발레리우스 가문의 후원을 등에 업고, '쿠르수스 호노룸(cursus honorum)'이라 불리는 로마식 출세 코스를 차근차근 밟아 나갔습니다.
쿠르수스 호노룸은 당시 로마 최고 권력자였던 집정관(콘술)에 이르는 길목으로, 조영관(아이딜리스)과 법무관(프라이토르)을 거치는 경로였습니다. 대 카토는 평민 신분임에도 불구하고 이 코스를 순조롭게 통과하며 정계에 이름을 알렸습니다.
스키피오 아프리카누스와의 갈등
로마를 구한 영웅 스키피오와 대 카토의 대립은 로마사에서 매우 유명한 일화이며, 깊은 의미를 지닙니다.
두 사람이 갈등하게 된 배경에는 여러 가지 사정이 있습니다.
첫째, 스키피오가 속한 코르넬리우스 가문과 카토를 후원한 발레리우스 가문은 오랜 적대 관계였습니다. 발레리우스 가문의 후원 아래 성장한 대 카토에게 스키피오는 자연스럽게 정적이 될 수밖에 없었습니다.
실제로 대 카토가 처음 고발한 상대는 스키피오 아프리카누스 본인이 아니라 그의 형이었습니다. 따라서 역사적으로 이른바 '스키피오 재판'이라 불리는 일련의 재판 과정은, 로마 명문 귀족들 간의 내부 갈등으로 보는 시각이 지배적입니다.
둘째, 원로원 안에는 스키피오의 행보를 우려하는 인사들이 적지 않았습니다. 제2차 포에니 전쟁 당시부터 그의 행동은 권한 넘침으로 비친 것이 사실입니다. 원래 집정관은 40세 이상이어야 취임할 수 있었지만, 국가적 비상사태 속에서 스키피오는 30대에 집정관에 올랐습니다.
'이탈리아의 방패'라 불리는 파비우스 막시무스가 특히 스키피오를 못마땅하게 여겼다고 전해집니다. 대 카토는 제2차 포에니 전쟁 당시 막시무스 휘하에서 군 지휘관으로 복무했기 때문에, 이 인연 역시 어느 정도 영향을 미쳤을 것으로 추측됩니다.
원로원이 가장 두려워했던 것은 독재자의 등장이었습니다. 훗날 율리우스 카이사르가 암살된 것도 같은 맥락입니다. 물론 그 이면에는 스키피오에 대한 질투도 있었을 것입니다.
결과적으로 스키피오는 유죄 판결을 받지는 않았지만, 이 사건을 계기로 정계 은퇴를 선택했습니다. 그리고 스키피오가 세상을 떠난 뒤, 로마 원로원의 실질적 구심점은 대 카토가 되었습니다.
"그래도 카르타고는 멸망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대 카토는 진심으로 카르타고의 멸망을 바랐던 것으로 보입니다.
그는 원로원에서 연설을 자주 했는데, 어떤 주제로 말을 시작했든 결론은 언제나 한마디로 끝났다고 합니다. "그밖에는, 카르타고는 멸망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유명한 일화도 전해집니다. 어느 날 카토는 원로원에 카르타고산 무화과를 들고 나타나 이렇게 외쳤습니다. "로마에서 사흘이면 닿는 거리에, 이렇게 훌륭한 무화과를 생산하는 나라가 있습니다!"
이에 대해 코르넬리우스 가문의 '작은 스키피오'(푸블리우스 코르넬리우스 스키피오 나시카)는 "그래도 카르타고는 존속해야 한다"며 반대 입장을 폈습니다. 강적 카르타고가 남아 있어야 로마가 긴장을 늦추지 않는다는 논리였습니다.
그러나 당시 원로원에서 카토의 영향력은 너무나 강력해서 그를 막을 자는 없었습니다.
결국 카르타고는 무력화된 채 파괴되었습니다. 주민들은 모두 노예로 팔려갔고, 성벽은 허물어졌으며, 도시는 완전히 잿더미가 되었습니다. 훗날 '그 자리에 소금을 뿌렸다'는 이야기가 전해지며, 카르타고는 지도 위에서 사라졌습니다. 다만 소금을 뿌렸다는 기록은 후대에 만들어진 전설로 보는 견해가 많습니다.
대 카토는 카르타고의 멸망을 눈으로 보지 못하고 기원전 149년 세상을 떠났습니다. 기원전 234년생이니 향년 85세였습니다. '강철 건강'이라 불릴 만큼 그는 평생 병약한 적이 거의 없었다고 전해집니다.
대 카토에 대한 개인적 평가
공화정 시대 로마를 이상향으로 그리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훗날 로마의 역사가들 역시 공화정 로마를 존중했고, 대영제국 전성기의 에드워드 기번을 비롯해 공화정 로마를 이상적인 국가로 묘사한 이들이 적지 않습니다.
그러나 제3차 포에니 전쟁 무렵부터 로마는 분명히 변질되기 시작합니다.
그때까지 로마는 정복한 영토를 대체로 동맹으로 받아들였습니다. 카르타고를 동맹으로 삼지 않은 것은 처음 있는 일이 아니었지만, 이처럼 가혹한 조치를 취한 것은 처음이었습니다.
물론 로마가 카르타고를 그토록 경계한 데에는 이유가 있습니다. 한니발이라는 최대의 위협을 낳은 나라가 바로 카르타고였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용서를 잃은 로마는 이후 '내전의 세기'라 불리는 혼란의 시대로 걸어 들어갑니다.
카토는 누구보다 로마 공화정을 소중히 여기던 보수파였습니다. 그렇기에 스키피오 같은 혁신적인 인물을 용납할 수 없었던 것이지요.
내전의 세기를 거친 로마는 결국 제정(帝政)으로 향합니다.
공화정을 누구보다 사랑했던 남자가, 오히려 공화정 붕괴의 도화선이 되었다는 것. 역사는 참으로 아이러니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