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럽의 역사

나치 암호 '에니그마'를 해독한 천재, 앨런 튜링의 기묘한 운명

영화 이미테이션 게임(The Imitation Game)의 주인공 모델이 된 앨런 튜링(Alan Turing)은 나치 독일의 암호 '에니그마(Enigma)' 해독에 성공한 인물로 알려져 있습니다.

ASD 천재

영화에서 묘사된 것처럼 앨런 튜링은 고기능 자폐 스펙트럼 장애(ASD)였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그는 수학과 과학 분야에서 남다른 재능을 보인 학생이었지만, 고전(클래식) 과목에는 전혀 흥미가 없었습니다. 그 결과 뉴턴도 다녔던 케임브리지 대학교 트리니티 칼리지의 장학금은 받지 못했고, 대신 같은 케임브리지 대학교의 킹스 칼리지에 입학하게 되었습니다.

이는 수학과 과학을 제외하면 거의 좋은 성적을 받지 못했던 아인슈타인과 닮은 대목입니다.

대학 시절 그는 '튜링 머신(Turing Machine)'이라 불리는 계산 모델을 발표했고, 박사 과정은 미국 프린스턴 대학교에서 보냈습니다. 당시 프린스턴에는 '컴퓨터의 아버지'라 불리는 존 폰 노이만(John von Neumann)도 있었으며, 두 사람 사이에는 우정이 있었다고 전해집니다.

그는 제2차 세계대전 발발 무렵 영국으로 돌아왔고, 전쟁이 시작되자 곧바로 암호 해독 임무에 투입되었습니다.

당시 연합군은 나치가 만든 암호문 '에니그마'를 해독하지 못해 고전하고 있었지만, 튜링이 개발한 '봄브(Bombe)'라는 해독 기계 덕분에 마침내 해독에 성공합니다. 에니그마 해독 덕분에 제2차 세계대전이 몇 년이나 단축되었다는 견해도 있습니다.

영화에서처럼 연합군은 에니그마 해독에 성공했으면서도 이 사실을 철저히 비밀에 부쳤습니다. 실제로 독일군은 항복할 때까지 에니그마를 계속 사용했으며, 자신들의 암호가 이미 깨졌다는 사실조차 끝내 모른 채였던 것으로 보입니다.

체포와 죽음

어느 날 도둑이 튜링의 집에 침입하는 사건이 벌어집니다. 그런데 그 수사의 결과, 오히려 튜링 본인이 체포되고 말았습니다.

튜링은 동성애자였습니다. 그는 한 젊은이와 관계를 맺고 있었는데, 도둑 사건 수사 과정에서 그에 대한 실마리가 드러나면서 사건이 커진 것입니다.

도둑을 잡아달라고 신고한 사람이 정작 자신이 체포되다니, 튜링에게 얼마나 충격적인 일이었을까요?

당시 영국에서 동성애는 범죄였습니다. 미국과 달리 영국은 큰 정치적 변혁을 거치지 않았기 때문에 중세에 제정된 법률이 여전히 유효했습니다.

더욱 안타까운 것은, 당시 영국에서 동성애자를 감옥에 가두는 대신 여성 호르몬을 투여하는 '화학적 거세' 치료를 강제했다는 점입니다. 결국 앨런 튜링은 스스로 목숨을 끊었습니다.

제2차 세계대전의 승리를 이끈 영웅의 죽음이었지만, 에니그마 해독이 오랫동안 기밀로 유지되었기 때문에 대중은 그 진실을 알지 못했습니다. 세상에는 그저 한 수학자가 자살했다는 사실만 남았을 뿐입니다.

연구란 때로 몇 년, 어쩌면 수십 년에 걸쳐 완성되는 결과물입니다.

튜링 사후 12년이 지난 1966년, 컴퓨터 과학자 협회 ACM은 컴퓨터 분야에서 뛰어난 업적을 남긴 이들을 기리기 위해 새로운 상을 제정했고, 그 이름을 '튜링상(Turing Award)'이라 명명했습니다.

튜링의 공헌으로 에니그마가 해독되었다는 사실이 세상에 알려진 것은 1970년대에 들어서였고, 출판물, 연극, 방송 등을 통해 널리 알려지기 시작했습니다.

이 과정에서 튜링은 재평가되었고, 그의 명예도 회복되었습니다.

2013년에는 엘리자베스 2세 여왕이 앨런 튜링을 공식적으로 사면하여 그의 죄가 지워졌으며, 2019년에는 새 50파운드권 지폐에 앨런 튜링의 초상이 담기기로 결정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