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차 세계대전이 유럽에서 본격화하던 1939년부터 미국이 참전한 1941년까지, 찰스 린드버그(Charles Lindbergh)와 헨리 포드(Henry Ford)는 미국 여론에서 가장 눈에 띄는 반전파 인물들이었습니다. 두 사람이 독일과의 전쟁에 반대한 데에는 각자의 신념과 배경이 있었습니다.
찰스 린드버그, '아메리카 퍼스트' 운동의 얼굴
1927년 대서양 단독 무착륙 비행으로 국민적 영웅이 된 린드버그는 압도적인 대중적 영향력을 바탕으로, 1940년 결성된 고립주의 단체 '아메리카 퍼스트 위원회(America First Committee)'의 대표적 대변인이 되었습니다. 그가 참전에 반대한 이유는 다음과 같이 정리할 수 있습니다.
- 제1차 세계대전의 교훈: 유럽의 분쟁에 개입해도 미국이 얻는 것이 적다고 보았으며, 서구 문명이 전쟁으로 스스로를 파괴하고 있다고 진단했습니다.
- 독일 공군력에 대한 평가: 1930년대에 여러 차례 독일을 방문한 린드버그는 루프트바페(독일 공군)의 전력을 매우 높게 평가했고, 미국이 해외 전선에서 승리하기 어렵다고 판단했습니다.
- 지리적 안보에 대한 믿음: 넓은 대서양이 미국을 지켜주는 자연적 방어선이라고 확신했습니다.
특히 1941년 9월 디모인 연설에서 그는 전쟁을 부추기는 세력으로 '영국', '유대인', '루즈벨트 행정부'를 거론해 큰 논란을 빚었고, 반유대주의 혐의로 비난받으면서 명성에 큰 타격을 입었습니다.
헨리 포드, 평생을 이어온 평화주의
포드는 젊은 시절부터 전쟁을 '낭비와 파괴의 극치'로 여긴 평화주의자였습니다. 이미 제1차 세계대전 중이던 1915년에는 전쟁 종식을 촉구하는 '평화선' 원정을 주도하기도 했습니다. 그는 미국이 다시 유럽 전쟁에 말려드는 것을 경계했고, 참전 준비와 무기 생산에도 회의적인 입장을 취했습니다. 다만 포드 역시 반유대주의적 발언과 출판물로 심한 비판을 받은 바 있으며, 이러한 사상적 배경이 그의 전쟁관과 얽혀 있다는 평가를 받습니다.
진주만 공격 이후, 태도의 전환
1941년 12월 7일 진주만 공격으로 미국이 참전하면서 여론은 하룻밤 사이에 뒤집혔고, 두 사람의 자세도 달라졌습니다.
- 린드버그: 현역 복무를 희망했지만 루즈벨트 행정부의 반대로 받아들여지지 않았습니다. 대신 민간 항공 컨설턴트로 활동하며 태평양 전선에서 수십 회의 전투 비행에 참가했고, 전시 국채 판매 캠페인에도 힘을 보탰습니다.
- 포드: 윌로우런(Willow Run) 공장에서 B-24 리버레이터 폭격기를 최고 시간당 1대 꼴로 양산하는 등, 지프·트럭·항공 엔진을 대량 생산하며 연합군의 물류를 떠받치는 핵심 역할을 했습니다.
결국 린드버그와 포드의 반전은 특정 국가에 대한 우호라기보다, 당시 미국 사회에 널리 퍼져 있던 고립주의와 평화주의 여론을 상징한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전쟁이 현실이 되자 두 사람 모두 미국의 승리를 위해 자신들의 능력을 아낌없이 쏟아부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