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럽의 역사

기억의 수호자들 – 크라쿠프 법의학연구소의 잊혀진 영웅들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나자 생존자들은 크라쿠프 법의학연구소의 문을 두드리기 시작했습니다. 그들은 독일군에게 살해된 가족과 연인의 무덤을 찾고 있었습니다. 그들의 편에는 목숨을 걸고 철저한 비밀 속에서 폴란드인들의 기억을 지켜낸 영웅들이 있었습니다. 이제야 그들의 이야기가 빛을 볼 때입니다.

점령기, 연구소로 흘러들어온 시신들

전쟁과 점령 기간 동안 여러 사람들의 시신이 크라쿠프 법의학연구소로 운송되었습니다. 당시 이 기관은 독일군의 관리 하에 있었지만, 폴란드인 직원들도 함께 근무하고 있었습니다. 일부 사건에서는 나치 형사경찰인 크리포(Kripo)가 주목했던 건이라는 이유로 육안 검사와 부검, 촬영, 지문 채취 등 모든 절차가 공식적으로 진행되었습니다.

바르샤바 봉기 기간에는 바르샤바에서 온 피난민과 실향민, 주로 신분 증명서가 없는 고령자들의 시신이 크라쿠프 시설로 보내졌습니다. 이런 사망자들에 대해서도 직원들은 사망자를 촬영하고, 신원 확인에 도움이 될 수 있는 개인 소지품과 의류 조각을 확보하는 작업을 진행했습니다. 시신은 부검 대장에 기록되었지만, 부검은커녕 제대로 된 검시조차 이루어지지 않았습니다.

금지된 지식

상황이 달라진 것은 크라쿠프와 인근 지역에서 온 "NN"(이름 없음)으로 표시된 시신들이 연구소에 들어오면서부터였습니다. 1971년 《프슈글렝트 레카르스키(Przegląd Lekarski)》에 실린 정보에 따르면, 이들 대부분은 몬텔루피흐 거리의 경찰 감옥(현재도 교도소로 사용 중)에서 사망했거나, 포모르스카 거리의 게슈타포 고문으로 숨을 거두었거나, 거리 검문·체포 작전과 이른바 '솥(kessel)' 작전 중에 목숨을 잃은 사람들이었습니다. 이러한 시신의 수는 점령이 길어질수록 해마다 늘어갔습니다.

처음에 연구소 소장이었던 독일인 베르너 벡(Werner Beck) 박사는 폴란드인 직원들이 이 시신들에 접근하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습니다. 신원 미상, 미기록, 미신고 상태로 분류된 시신들은 잠긴 곳에 보관되었다가, 얼마 후 조용히 묘지로 옮겨졌습니다. 이 시신들 상당수는 잔혹한 심문의 흔적, 즉 특유의 멍과 상처, 찰과상을 지니고 있었습니다.

기억의 수호자들 – 크라쿠프 법의학연구소의 잊혀진 영웅들

크라쿠프 법의학연구소. 야기엘론스키 대학교 콜레기움 메디쿰 병리형태학과 웹사이트 제공 사진.

점령 기간 동안 "NN"으로 처리된 가족들은 법의학연구소를 찾아왔습니다. 한편 시신을 몰래 확인하는 일은 지하 저항 조직에도 매우 중요했습니다. 그럼에도 폴란드인 직원들은 전쟁이 언젠가 끝나면 무덤을 찾는 작업이 시작될 것임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장의사와 묘지 관리 측의 협조 아래, 연구소 직원들은 극비리에 "NN"으로 표시된 시신들을 자발적으로 기록하기 시작했습니다.

동시에 그들은 신원 확인에 도움이 될 만한 모든 세부 사항, 예컨대 특징적인 흉터와 반점, 전반적인 신체 상태, 머리카락과 눈동자의 색, 치아 상태 등을 꼼꼼히 수집했습니다. 이후 부검 대장에서 신원이 확인된 인물 옆에, 이름 없는 사망자의 무덤 위치 정보를 암호화된 방식으로 적어 넣었습니다. 그러나 이 부검 대장은 크라쿠프에서 도주하던 베르너 벡 박사가 가져가 버렸습니다. 다행히 그 안의 정보는 남아 있던 해부 기록과 직원들의 놀라운 기억 덕분에 상당 부분 복원될 수 있었습니다.

기억의 수호자들 – 크라쿠프 법의학연구소의 잊혀진 영웅들

절대 기억

"점령기 크라쿠프 법의학연구소 직원들의 신원 확인 활동에 관하여"라는 글의 저자 마리아 비르디(Maria Byrdy)는 공식 부검 기록 외에 직원들이 시신에 대한 메모를 남기는 것이 금지되어 있었다고 밝혔습니다. 특히 "NN" 사망자와 관련해서는 신원 확인에 필요한 세부 사항을 기록하는 행위 자체가 허용되지 않았습니다.

폴란드인 직원들은 어떤 의심도 받지 않기 위해 세부 사항들을 오로지 암기에 의존했고, 연구소 밖에서 이를 기록했습니다. 저자는 이렇게 회고합니다. "이런 종류의 관찰은 끊임없는 긴장 상태에서 이루어졌고, 우리 안에 거의 사진과 같은 기억력을 길러주었습니다." 덕분에 전쟁이 끝나고 수년이 지난 뒤에도 연구소 직원들은 시신의 상태와 외모에 관한 아주 사소한 디테일까지 떠올릴 수 있었습니다. 이들의 헌신적인 노력은 전후 수많은 사람들에게 위안과 답을 주었습니다.

대표적인 사례가 1944년 7월 말 법의학연구소에 도착한 세 명의 젊은이의 시신입니다. 남성 두 명과 여성 한 명, 나이 20세 전후의 시신은 몬텔루피흐 감옥에서 운송되었습니다. 검시를 마친 직원들은 사실들을 연결 지었습니다. 시신에는 2주 전 것으로 추정되는 이미 곪아버린 총상과, 근거리에서 머리에 가해진 처형용 총상의 흔적이 있었던 것입니다. 실제로 7월 11일, 총독부 SS 및 경찰 최고지휘관 빌헬름 코페(Wilhelm Koppe)에 대한 암살 시도가 있었지만 실패로 돌아갔고, '파라솔(Parasol)' 부대가 수행한 이 작전에서 부대는 상당한 손실을 입었습니다. 세 명의 "NN"은 바로 국내군(Armia Krajowa) 출신 대원들이었습니다. 연구소 직원들의 추측은 전쟁이 끝난 후 확인되었습니다. 그들의 도움 덕분에 작전 참가자들의 유족은 죽은 가족을 신원 확인할 수 있었고, 장의사와 묘지 관리 측의 협조 덕분에 정확한 묻힌 장소까지 알아낼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이것은 일련의 사례 중 단 하나에 불과했습니다.

출처

《Przegląd Lekarski》 제1호 (197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