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테르모필레는 기원전 480년의 유명한 전투뿐만 아니라 역사상 여러 차례 전장이 된 곳으로, 마지막 전투는 1941년에 벌어졌다. 그러나 기원전 279년의 테르모필레 전투는 특별한 의미를 지닌다. 마케도니아를 거쳐 남부 그리스로 침입한 브렌누스(Brennos) 휘하의 갈리아 야만 부족들로부터, 다시 한번 그리스 연합군이 조국을 지켜냈기 때문이다.
고대 역사가 파우사니아스에 따르면, 브렌누스는 보병 15만 2,000명, 기병 2만 400명, 그리고 4만 800명의 기마 종자를 이끌었다고 전해진다. 물론 당대의 외국인 사학자들은 이 수치에 의문을 제기하며 브렌누스 군대의 규모를 임의로 축소해 추정하기도 한다.
양측의 병력
이 거대한 무리에 맞서 그리스 측은 다음과 같은 병력을 배치했다.
• 보이오티아군 – 보병 1만 명, 기병 500명 (키피소도토스, 테아리다스, 디오게네스, 리산드로스 지휘)
• 포키스군 – 보병 3,000명, 기병 500명 (크리토불로스, 안티오코스 지휘)
• 로크리스 보병 700명
• 메가라 중장보병(호플리테스) 400명 (히포니코스 지휘)
• 에톨리아 전체 군대 – 보병 약 7,790명과 규모 미상의 기병 (폴리아르코스, 폴리프론, 라크라테스 지휘)
마지막으로 아테네는 함대와 함께 보병 1,000명, 기병 500명의 군단을 파견했다. 이 군단을 이끈 장군 칼리푸스(Callipus)가 전체 총지휘를 맡았으며, 여기에 마케도니아인 500명과 셀류코스 왕 안티오코스가 보낸 병력 500명도 가세했다.
테르모필레 전투
그리스군은 스페르키오스 강의 도하를 저지하고 야만인들의 진격을 늦추기 위해 모든 기병과 1,000명의 경무장 종자들을 파견했다. 그러나 브렌누스는 이 소수의 그리스인을 상대로 병사 1만 명을 내몰았고, 결국 그리스군은 테르모필레로 후퇴할 수밖에 없었다.
브렌누스는 이후 지역 주민들에게 그리스인들이 파괴한 다리를 재건하도록 강요했고, 갈리아군은 그 다리를 통해 스페르키오스 강을 전력 도하했다. 갈리아인들은 지역을 유린하고 마주치는 그리스인들을 학살한 뒤 헤라클레이아로 진격했으나, 이 도시를 함락시키지는 못했다.
다음 날, 갈리아군은 신성한 테르모필레에서 연합 그리스군과 정면으로 마주쳤다. 그들은 광적인 전투 함성을 지르며 곧바로 공격해왔으나, 조직력 없는 난공이었다. 그리스군은 절대적인 침묵 속에서 팔랑크스 진형으로 그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경무장 그리스 병사들은 활과 투석구로 적의 대군을 화망에 가두고 투창을 던지며 중장보병을 지원했다. 파우사니아스가 『포키스편』에서 기록했듯이, 양측의 기병은 좁은 지형 탓에 전투에 투입되지 못했다.
갈리아인들의 방패는 충분한 보호를 제공하지 못했고 밀집 진형을 유지할 수도 없었기에, 무장 면에서 그리스인들에게 열세였다. 그럼에도 그들은 먼저 투창을 던진 뒤 긴 검을 들고 돌격하는 등 필사적으로 싸웠다. 심지어 몸에 꽂힌 화살과 창을 뽑아 그리스인들에게 되던지는 극한의 모습까지 보였다.
한편 아테네 함선들은 최대한 해안에 접근했고, 승선한 병사들은 사용 가능한 모든 무기로 갈리아인들을 포격했다. 피바다를 흘린 일련의 맹공 끝에 갈리아인들은 그리스 팔랑크스의 압도적인 힘 앞에서 후퇴할 수밖에 없었다. 후퇴는 극도로 무질서했고, 많은 병사가 동료들에게 짓밟혀 처참한 최후를 맞았으며, 일부는 주변 늪지에 빠져 목숨을 잃었다.
그리스군 중에서는 아테네인들이 가장 두각을 나타냈다. 모두 중 가장 용맹한 이는 영웅적으로 싸우다 전사한 젊은 키디아스(Kydias)였다. 키디아스를 포함해 그리스군의 전사자는 단 39명에 불과했다. 수천 명의 야만인을 상대로 한 놀라운 결과였다. 반면 갈리아군의 정확한 피해 규모는 확인되지 않았다.
피를 빠는 야만인들
전투 7일 후, 갈라티아 분견대가 오이타 산을 오르려 시도했으나 텔레사르코스(Telesarchus)가 지휘하는 그리스군에게 격퇴당했다. 텔레사르코스는 이 전투에서 장렬히 전사했다. 교착 상태에 몰린 브렌누스는 오레스토리우스와 콤부티에게 4만 명의 군단을 맡겨 에톨리아 지방을 공격하도록 명령했다. 에톨리아인들이 고향을 지키러 테르모필레에서 철수하도록 만들어 그리스군을 약화시키기 위한 작전이었다.
야만인다운 만행을 저지른 갈리아인들은 작은 도시 칼리온(Callion)을 점령했다. 그곳에서 저지른 죄악은 인간의 언어로 표현하기조차 어려웠다. 파우사니아스에 따르면, 야만인들은 남자들을 몰살했고 갓난아기조차 살려두지 않았다. 여성들은 할 수 있는 한 스스로 목숨을 끊었으며, 나머지는 온갖 잔혹한 방식으로 학살당했다. 파우사니아스는 갈리아인들이 아이들의 피를 마셨고, 죽어가거나 이미 숨진 여성들조차 성폭행했다고 기록했다.
그 결과 에톨리아인들은 테르모필레에서 철수했지만, 노인과 여성, 아이들까지 총동원해 "콕칼리아"(Kokkalia, 오늘날 팀프리스토스의 팔레오호리)라는 곳에서 야만인들을 역습해 섬멸했다. 복수에 불타는 그리스인들의 손에 2만 명이 넘는 갈리아인이 참살당했다. 나머지 패잔병들은 브렌누스의 본대에 합류했다.
샛길과 델포이의 최후
한편 브렌누스는 기원전 480년 페르시아군이 통과했던 바로 그 샛길의 존재를 알아차리고, 테르모필레의 그리스군을 포위하는 데 나섰다. 샛길을 다시 지키던 포키스인들은 영웅적으로 싸웠으나 적의 대군을 감당하지 못하고 아래로 물러나며 테르모필레의 그리스군에게 경보를 전했다. 이에 연합 그리스군은 아테네 함선에 탑승해 단 한 명의 손실도 없이 안전하게 철수했다.
브렌누스의 갈리아군은 델포이 신전을 약탈할 목적으로 행군을 계속했다. 그러나 그곳에서 그들은 참혹한 재앙을 만났다. 용감한 알렉시마코스(Aleximachus)가 이끄는 포키스인들이 기동전을 펼쳐 공황에 빠진 갈리아군의 배후에 침투, 그들을 몰살시킨 것이다. 알렉시마코스는 전사했고, 그의 시신 주위에는 죽은 갈리아인들이 층층이 쌓였다고 전해진다.
밤이 되자 그리스군은 새로운 공격을 개시했고, 갈라티아 군대는 완전한 공황 상태에 빠졌다. 야만인들은 어둠 속에서 서로를 베어 죽이는 참극이 벌어졌다. 이후 아테네인과 보이오티아인이 포키스인들을 구원하러 달려왔고, 갈리아군은 궤멸했다. 파우사니아스는 이 과정에서 델포이에서 일어난 여러 '신현(神顯)' 현상들을 생생하게 묘사한다.
파우사니아스는 포키스 지방에서만 3만 6,000명의 야만인이 몰살당했다고 기록한다. 한편 에톨리아인들은 콕칼리아의 승리에 힘입어, 테르모필레 지역에 주둔 중이던 아키코리우스(Akichorius) 휘하의 갈리아 분견대마저 공격했다.
연이은 참패 속에 갈리아인들은 총궤주했고, 지도자 브렌누스는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에톨리아인과 테살리아인, 말리아인의 추격을 받은 갈리아인들은 또다시 참화를 겪었으며, 살아남아 도망친 야만인은 극소수에 불과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