희생으로 가득했던 삶, 50대에야 펼쳐진 커리어, 그리고 전설의 반열까지. 광기였을까, 아니면 꿈의 실현이었을까? 웃음 가득한 헌병 역할로 사랑받은 한 남자의 인생은 어떻게 그려져 왔을까?
1960년대, 프랑스 출신 한 코미디언의 이름은 온 세계에 울려 퍼졌다. 영국 주간지 타임즈는 한 리뷰에서 그를 '프랑스의 채플린'이라 불렀다. 바로 루이 드 퓌네스(Louis de Funès)다. 그는 대무대 데뷔를 꿈꾸는 모든 후배 배우들의 롤모델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영화 '마드리드의 토토'에서 루이 드 퓌네스와 토토
그는 평생을 연기에 바쳤지만, 커리어가 본격적으로 궤도에 오른 것은 50대에 접어든 무렵이었다. 영화 '생트로페의 헌병'에서 주연을 맡은 것이 바로 그 시절이었다. 그 이전에도 '바르비존의 유혹'으로 스크린에 모습을 드러낸 적은 있었지만, 드 퓌네스가 등장하는 장면은 고작 32초짜리 단역에 불과했다. 그럼에도 이 작품은 그의 인생에 전환점이 되었고, 명성으로 가는 길을 열어주었다.
전부를 건 판돈
루이 드 퓌네스는 1914년 7월 31일에 태어났다. 홀어머니 밑에서 자란 형제자매 중 막내였고, 집안 형편은 넉넉하지 못했다. '푸푸(Fufu)'라는 애칭으로 불리던 어린 루이는 학업을 접고 생계를 위해 여러 직장을 전전했다. 군대 입대도 시도했지만, 신장 164cm에 몸무게 55kg이라는 이유로 거절당했다.
그 무렵 그는 전직 테니스 챔피언 제르멘 카루아예르와 결혼해 아들 다니엘을 얻었다. 하지만 그는 좋은 아버지가 아니었다. 자녀 양육에 관심이 없었고, 집에 머무는 일도 드물었다. 1939년 프랑스군에 소집되었으나 곧 예비역으로 전환되었고, 이 덕분에 술집과 클럽에서 공연하며 연기 실력을 갈고닦을 수 있었다.

새로운 사랑을 만난 드 퓌네스는 모든 것을 한 판에 걸기로 한다. 인생 최대의 꿈을 이루겠다는 결심이었다.
당시 그는 가족을 소홀히 한 채 연기에 대한 꿈에만 집중했다. 1943년 두 번째 아내 잔 오귀스틴 바르텔미를 만나 훗날 아들 파트릭과 올리비에를 얻었다. 그는 제르멘과의 이혼을 결심했고, 다니엘과의 관계도 끊었다. 훗날 다니엘은 이렇게 털어놓았다. "저는 그를 아빠라고 부를 수 없었어요. 그냥 루이라고 불렀죠."
드 퓌네스는 술집 공연과 부업으로 생계를 이어가던 생활을 정리하고 연극학교에 입학했다. 그곳에서 기량을 완성했고, 업계의 영향력 있는 인사들과 인연을 쌓았다.
1946년 영화 '바르비존의 유혹'에 출연하며 커리어의 문이 열렸다. 극단에서 코믹 역할 제안이 이어졌고, 비평가들은 그를 호평했으며 관객들은 그를 사랑했다. 1956년에는 영화 '파리의 암시장'에 캐스팅되었다. 프랑스 전역이 그의 이름을 알게 되었고, 그는 대중에게 인식되기 시작하며 스크린에 정기적으로 등장했다.
참고로 이때 그는 이미 40대였다. 이 때문에 많은 감독들이 그에게 조연 역할만 제안하며 외면했다. 이런 상황에서 국제적 명성은 꿈처럼만 보일 수밖에 없었다…
세계를 매료시킨 헌병
1960년대, 같은 나이대 배우 대부분이 이미 화려한 경력을 쌓은 뒤였을 때, 루이 드 퓌네스는 이제 막 출발선에 섰다. 그는 주류와 반대로 흘러갔고, 모두가 그를 반긴 것은 아니었다. 게다가 그가 맡은 역할들은 상당히 독특했다.
이 계기를 마련한 사람은 각본가 리샤르 발뒤치였다. 그는 특별한 헌병에 관한 영화를 구상했는데, 자신의 카메라가 도난당했을 때 경찰이 별다른 조치에 나서지 않았던 경험에서 영감을 얻은 것이다. 이 역할의 적임자는 단 한 사람, 드 퓌네스뿐이었다.

코미디 영화 '꼬마 수영선수' 촬영 현장의 루이 드 퓌네스
그의 연기 스타일은 빠르게 성공의 방정식임이 입증되었고, 그것도 국가를 넘어선 성공이었다. 첫 번째 대작은 관객들을 극장으로 몰아넣은 '생트로페의 헌병'이었다. 동시에 그가 출연한 또 다른 작품도 개봉되었다. 바로 컬트적인 명성을 얻은 '판토마'였다.
극장은 만원을 이루었고, 모두의 입에 오르내리던 그에게 더 이상 조연 제안은 오지 않았다. 2년 뒤인 1966년, 루이 드 퓌네스는 '위대한 방랑자'에 출연해 오스카상 후보에 올랐고, 영화는 약 1,800만 명의 관객을 동원했다. 그전까지 프랑스의 어느 배우나 감독도 이런 기록을 세워본 적이 없었다. 이 기록은 1998년 '타이타닉'이 개봉되면서야 깨졌다.
세계는 드 퓌네스의 프랑스 코미디에 주목하기 시작했고, 그의 독창적인 연기 스타일은 화제가 되었다. 그는 범죄와 싸우려다 늘 엉망이 되는 신경질적이고 급한 성격의 헌병을 연기했다. 이 캐릭터는 그의 대표 연기가 되어 역사에 남았다. 그는 이 아이디어를 극도로 신경질적인 성격이었던 자신의 어머니에게서 얻었다고 밝힌 바 있다.
죽음이 우리를 가를 때까지
루이 드 퓌네스는 일의 거인이었다. 촬영장에서의 긴 시간에도, 건강이 악화되고 나이가 들어감에도 멈추려 하지 않았다. 그러나 몸은 다른 방향으로 흘러갔고, 1970년대 중반 그는 심장마비를 겪었다. 이후 식단을 바꾸고 담배를 끊었지만, 연기를 접을 생각은 없었다.
그는 여전히 새 영화 제안을 받아들였고, 관객들의 사랑도 식지 않았다. 그럼에도 건강을 우려한 프로듀서들이 하나둘 저명한 배우와의 작업을 포기하기 시작했다. 과연 그것이 맞는 선택이었을까? 답은 1980년에 나왔다. 배우는 두 번째 심장마비를 겪은 것이다. 이제 끝이고 은퇴할 때라고들 여겨졌다. 그러나 전혀 아니었다. 루이 드 퓌네스는 커리어를 계속 이어가고 싶어 했다.

아들 올리비에와 함께한 드 퓌네스
모두가 이를 반기지는 않았다. 특히 그는 코미디언 치고는 업계에서 큰 인기를 누리지 못했는데, 아마도 그의 성격 탓이었을 것이다. 그는 파티나 연회에 참석하지 않았고, 새로운 친구를 사귀려 들지 않았다. 퇴근 후에는 정원에서 장미를 가꾸거나 낚시를 떠났다. 꽃은 그의 두 번째 큰 열정이었다. 그는 심지어 '드 퓌네스'라는 이름의 주황빛 장미 품종을 직접 개발하기도 했다.
1982년, 헌병 크루쇼의 모험을 담은 새 시리즈가 극장에 개봉되었다. 일부 비평가들은 이미 이 소재가 진부하다고 지적했고, 배우 본인도 '한 가지 역할만 하는 배우'라는 비판을 받았다. 그럼에도 영화는 높은 관객 동원력을 자랑했다. 비판에 잘 대처하지 못했던 드 퓌네스는 열정과 검소한 생활 사이에서 균형을 잡아가야 했다. 그해 말, 그는 가족과 함께 값진 휴가를 떠났다. 하지만 여행은 순탄하지 않았다. 그는 감기에 걸렸고 집으로 돌아오기로 했다. 이미 다음 작품들을 계획하느라 빨리 회복하고 싶어 했지만, 뜻밖에 세 번째 심장마비를 겪고 세상을 떠났다.
드 퓌네스의 영화는 오늘날에도 여전히 사랑받고 있으며, 클래식 영화로 가끔 TV에서 방영되기도 한다. 그의 연기 스타일을 사랑하는 팬들이 지금도 많고, 한편으로는 그의 기법을 의심하며 '한 역할뿐인 배우'였다고 주장하는 회의론자들도 있다. 그러나 양측 모두, 그가 성공을 향해 나아가는 젊은 배우들의 롤모델로 여겨진다는 점에는 동의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