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럽의 역사

나폴레옹의 여자들 – 폴란드의 정부 마리아 발레프스카와 황후 마리 루이즈

엘바 섬으로 떠난 나폴레옹, 그리고 찾아온 또 다른 여자

1814년 4월, 패전한 나폴레옹이 엘바 섬으로 유배를 떠날 때 그는 아내 마리 루이즈가 자신과 함께해 주기를 간절히 기대했습니다. 그러나 기대는 허무하게 무너졌고, 대신 엘바 섬을 찾아온 이는 다름 아닌 마리아 발레프스카였습니다.

나폴레옹은 이 방문 자체는 반가웠지만, 진심으로 사랑했던 아내의 배신에 크게 상처받았습니다. 한편 폴란드인들에게 옛 연인이 엘바 섬까지 찾아왔다는 사실은 보나파르트와 마리아 사이에 여전히 깊은 유대가 남아 있음을 보여주는 증거였습니다. 이는 프랑스 황제에게 막대한 영향력을 행사했고 바르샤바 공국 수립에도 일조한 것으로 알려진 용감한 여인 발레프스카의 신화를 더욱 굳건하게 만들어 주었습니다.

마리아 발레프스카 – 전설과 실화 사이

두 사람의 관계 시작에는 낭만적인 버전이 전해집니다. 1807년 나폴레옹이 바르샤바로 향하던 길에 야브워나 역참에서 두 사람이 처음 마주쳤다는 이야기입니다. 황제의 마차는 잠시 휴식을 위해 멈춰 섰다고 합니다.

"무거운 눈보라가 내리고 있었지만, 곧 수많은 사람들이 마차 주위에 몰려들어 그를 환영했습니다. 크리스토퍼 히버트는 이 장면을 이렇게 묘사합니다. '그중에는 털코트를 입은, 예외적으로 아름다운 금발의 젊은 여인도 있었다. 나폴레옹은 그녀를 시골 처녀로 오해했지만, 그녀가 유창한 프랑스어로 뒤록 장군에게 말을 걸어 "폴란드 해방을 약속하고 자국의 억압자인 오스트리아, 프로이센, 러시아를 격파한 분"에게 자신을 소개해 달라고 청하는 순간 오해는 풀렸다.'

보나파르트는 창문을 열자마자 꽃다발을 던져 주었고, 마리아가 선물에 대한 감사를 전하자 그는 이렇게 화답했다고 합니다. "그럼 나는 당신의 아름다운 입술에서 감사의 말을 훔쳐가겠소!"

나폴레옹은 부하들에게 이 젊은 여인의 신원을 확인하라고 지시했습니다. 밝혀진 사실은 이랬습니다. 그녀의 이름은 마리아, 나이 18세, 어린 아들이 하나 있습니다. 그녀는 임신으로 인한 스캔들을 피하기 위해 결혼한, 72세의 아나스타지 콜론나 발레프스키 백작의 세 번째 아내였습니다. 마음을 빼앗긴 나폴레옹은 그녀를 바르샤바의 무도회에 초청했습니다.

나폴레옹의 여자들 – 폴란드의 정부 마리아 발레프스카와 황후 마리 루이즈

발레프스카와 나폴레옹은 함께 3주를 보냈고, 그동안 이 폴란드 여인은 황제에게 마음을 빼앗기고 말았습니다.

그러나 야로스와프 추바티 교수는 이러한 통설에 동의하지 않습니다. PAP와의 인터뷰에서 그는 두 사람의 만남은 당시 폴란드 귀족층을 나폴레옹 편으로 끌어들이던 프랑스 외무장관 샤를 탈레랑이 주최한 바르샤바의 무도회에서 이루어졌다고 밝혔습니다. 탈레랑은 보나파르트 곁에 둘 매력적이고 아름다운 동반자를 물색하고 있었고, 폴란드 애국자들은 젊은 백작부인을 후보로 내세웠습니다. 그들은 늙은 발레프스키 백작을 설득했습니다. "프랑스 진영에 폴란드 애국자가 있다면 그보다 값진 것이 없을 것입니다. 폴란드가 러시아와 프로이센이라는 적으로부터 해방되려면 프랑스가 필요합니다." 백작은 아내를 바르샤바에 남겨 두는 데 동의했습니다.

콰드리유 춤을 추고 난 뒤 나폴레옹은 이 폴란드 여인에게 완전히 빠져버렸습니다. 그는 그녀를 침실로 끌고 가려고 뒤쫓았습니다. 경악한 발레프스카는 저항했지만, '모든 것은 대의를 위해'라는 명언으로 유명한 유제프 포니아토프스키의 연인 앙리에트 드 보방 부인의 설득에 마음을 돌리게 됩니다. 어느 날 밤 그녀는 나폴레옹이 머물던 왕성을 찾아 스스로를 바치러 갔습니다. 그러나 황제가 너무 성급하게 굴자 그녀는 다시 저항하기 시작했고, 격한 감정 속에 기절하고 말았습니다. 눈을 떴을 때는 이미 모든 일이 끝난 뒤였습니다.

이후 발레프스카와 나폴레옹은 3주간 함께 지냈고, 그동안 폴란드 여인은 이 남자에게 진심으로 반하게 되었습니다. 그렇다면 그녀는 바르샤바 공국 수립에 실제로 관여했을까요? 추바티 교수는 이렇게 답합니다.

"제 생각에 그녀는 이른바 '소프트 파워'의 형태로 황제에게 어느 정도 영향을 미쳤습니다. 즉, 나폴레옹의 폴란드와 폴란드인에 대한 감정에 어떤 식으로든 작용할 수 있었다는 것입니다."

1810년 5월, 마리아는 황제의 아들을 출산했습니다. 이제 나폴레옹은 자신이 자식을 가질 수 있는 남자라는 것을 더 이상 의심하지 않았습니다. 조제핀과의 결혼 생활에서는 자녀를 얻지 못했으니까요. 그는 아내와 이혼하고 새 혼인을 통해 아들을 얻어 왕좌를 물려주기로 결심했으며, 동시에 발레프스카와 아이의 생계를 재정적으로 보장해 주었습니다.

오스트리아 공주 마리 루이즈

보나파르트는 유럽의 왕가들 사이에서 새 아내를 물색했습니다. 처음에는 러시아 황제 알렉산드르 1세의 막내동생 안나 파블로브나 대공녀에게 청혼했지만, 차르의 모후는 딸을 '코르시카 출신 솟구친 자'에게 시집보내기를 거부했습니다.

나폴레옹은 이어 오스트리아 황제 프란츠 2세에게 눈을 돌렸고, 황제는 딸 마리 루이즈(1791~1847)와의 결혼을 승낙했습니다. 이 결합은 빈과 오스트리아 전역에서 크게 반발을 산 혼사였습니다. 1792년 이래 프랑스와 오스트리아는 계속 전쟁 중이었고, 오스트리아는 수차례의 패배 끝에 영토의 절반 이상을 잃은 상태였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오스트리아 외무장관 클레멘스 폰 메테르니히는 이 혼인이 바람직하다고 판단했습니다. 나폴레옹의 추가적인 침공으로부터 나라를 지킬 수 있는 유일한 길이었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1810년 3월 마리 루이즈는 황제의 아내가 되었고, 나폴레옹은 파리 시민들이 결혼식을 환호하도록 여러 공을 들였습니다. 각 동네마다 수천 마리의 닭과 거위, 로스트용 고기가 주민들에게 나눠졌고, 광장에는 포도주 통이 놓였으며, 교회의 종이 울려 퍼졌습니다. 1811년 3월, 마리 루이즈는 남편이 간절히 바라던 후계자를 낳았습니다. 나폴레옹은 전처 조제핀에게 이렇게 알렸습니다. "우리 아들은 통통하고 나는 몸 상태가 좋네. 아들은 내 가슴과 입술, 그리고 눈을 물려받았어."

나폴레옹의 여자들 – 폴란드의 정부 마리아 발레프스카와 황후 마리 루이즈

나폴레옹과 마리 루이즈의 결혼식

황제와 마리 루이즈의 결혼이 왕조적 계산에서 비롯된 것임은 분명하지만, 시간이 흐르면서 두 사람 사이에 진심 어린 애정이 싹텄습니다. 나폴레옹 자신도 아름답고 교양 있으며 재치 넘치는 아내에게 매료되어 가족과 친구들에게 보내는 편지에서 그녀를 '세상에서 가장 훌륭한 여인'이라 불렀습니다. 마리 루이즈 역시 황제인 남편에게 깊은 호감을 품고 있었습니다.

러시아 원정의 참패와 마리 루이즈의 배신

그동안의 정복 사업을 완성해야 했던 모스크바 원정은 참담한 재앙으로 끝났습니다. 러시아인들은 나폴레옹의 지배에서 자국을 해방했을 뿐 아니라, 동맹군과 함께 유럽의 나머지 지역까지 되찾아 냈습니다. 프랑스 황제는 패배를 인정하고 퇴위해야 했고, 앞서 언급했듯 엘바 섬으로 유배되었습니다.

유배지에서 그는 아내와 아들이 자신에게 합류해 주기를 기대했습니다. 주변 사람들에게 그런 말을 자주 했고, 실제로 맞이할 방들까지 마련해 두었습니다. 그중 한 방의 천장에는 나폴레옹의 요청으로 화가가 부부의 정절을 상징하는 우화를 그려 넣었습니다. 구름으로 가려져 서로를 볼 수 없지만 리본으로 이어져 있는 두 마리 비둘기, 그리고 서로 멀어질수록 그 매듭이 더 단단히 조여지는 형상이었습니다. 몰락한 황제는 빈에 있는 아내에게 자주 편지를 보내며 자신에게 올 것을 재촉했습니다. 그러나 마리 루이즈는 아버지가 반대한다는 핑계를 대며 마음 내키지 않는 모습이었습니다. 실상은 몰락한 황제 곁에서 엘바 섬의 초라한 생활을 하느니, 아버지의 화려한 궁정의 영화를 포기하고 싶지 않았던 것입니다.

나폴레옹의 여자들 – 폴란드의 정부 마리아 발레프스카와 황후 마리 루이즈

세인트헬레나 섬의 나폴레옹

옛 연인을 다시 만나고 싶어 하던 발레프스카 역시 나폴레옹에게 편지를 보냈습니다. 보나파르트는 이를 받아들였고, 1814년 9월 폴란드 여인과 황제의 서자가 섬에 도착했습니다. 주목할 점은 몰락한 황제가 아내가 이 방문 소식을 듣지 못하도록 할 수 있는 모든 조치를 취했다는 사실입니다. 그는 여전히 아내와 아이와 재회할 희망을 버리지 않았던 것입니다. 그러나 그 희망은 끝내 이루어지지 않았습니다. 나폴레옹은 아들과 아내를 다시는 만나지 못했습니다. 대신 폴란드 여인과는 한 번 더 만났는데, 엘바 섬 탈출부터 세인트헬레나 섬 유배 사이, 이른바 '백일천하' 시기였습니다.

마리 루이즈는 빈 회의의 결정에 따라 파르마, 피아첸차, 구아스탈라 공국을 하사받았습니다. 나폴레옹 사후 그녀는 두 번 재혼하여 여러 자녀를 낳았습니다. 한편 마리아 발레프스카는 1816년 나폴레옹의 육촌이자 프랑스 원수인 필리프 도르노 백작과 결혼했습니다. 1817년 5월 아들을 낳았지만, 6개월 뒤 신장결석으로 세상을 떠났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