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럽의 역사

역사상 가장 사치스러운 가문, 메디치는 재산을 어디에 썼을까?

메디치 가문은 세계 최고의 은행가로 명성을 얻었습니다. 전설에 따르면 이들은 단 몇 세대 만에 평범한 숯장이에서 이탈리아 최고 명문가로 올라섰다고 합니다. 꾸준히 세력을 확장하며 역사상 손꼽히는 거대한 재산을 축적했는데, 과연 메디치 가문은 그 돈을 어디에 썼을까요?

피렌체는 공식적으로 메디치 가문의 소유가 아니었지만, 누구나 이들이 상상을 초월하는 부를 자랑하는 상업과 금융의 중심 도시를 실질적으로 지배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습니다. 교황조차 예외는 아니었습니다. 메리 홀링스워스가 저서 『메디치: 왕조의 비밀사』에서 밝힌 바에 따르면, 1458년부터 1464년까지 교회를 이끈 교황 비오 2세는 코시모 데 메디치를 "평범한 시민이라기보다는 오히려 도시의 주인"이며 "이름만 빼면 모든 면에서 통치자"라고 평했습니다. 이러한 지위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명문가다운 기지와 결단력, 그리고 무엇보다 위세를 뽐내는 일이 필요했습니다.

역사상 가장 사치스러운 가문, 메디치는 재산을 어디에 썼을까?

메디치 저택(사진: 퍼블릭 도메인)

다행히도 메디치 가문의 은행 업무 수완은 이를 감당할 만큼 충분한 자금을 안겨주었습니다. 그리고 이들은 아낌없이 쓰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았습니다. 자비를 들여 피렌체 시민들을 위한 화려한 경기와 오락을 주관했습니다.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죠. 조반니 보테로는 1589년 이렇게 적었습니다.

"평민들은 불안감과 새로움에 대한 갈망에 사로잡혀 있기 때문에, 군주가 어떤 변화라도 제공하지 않으면 스스로 그것을 찾아 나서며 정부와 통치자마저 바꿔버릴 것이다."

황금으로 장식된 벽?

가문의 격을 드러내기 위해 코시모는 웅장한 궁전의 건축을 명했습니다. 공사는 1444년, 중세 건물 20채를 철거하면서 시작되었습니다. 외관은 의외로 상당히 소박해 보였습니다. 메디치 가문에게 자금이 부족해서가 아니었습니다. 피렌체를 비롯한 여러 도시에서는 소위 레지 순투아리에(leggi suntuarie), 즉 불필요한 사치 과시를 억제하기 위한 규정이 시행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오늘날까지 남아 있는 건물의 파사드는 과장된 장식 없이 담백하게 지어졌습니다.

역사상 가장 사치스러운 가문, 메디치는 재산을 어디에 썼을까?

화려한 내부 장식을 감추고 있는 메디치 궁전의 소박한 외관(사진: Sailko, CC BY-SA 3.0 라이선스)

그러나 르네상스 요새 같은 건물 안으로 들어서는 순간, 그 특별함은 압도적으로 다가왔습니다. 메디치 궁전은 대륙에서 가장 부유한 사람들의 집일 뿐만 아니라, 여러 세대에 걸쳐 모은 보물들을 간직한 보고이기도 했습니다.

코시모의 손자이자 1469년부터 1492년까지 피렌체를 통치한 로렌초 데 메디치에 관한 리처드 스테이플포드의 저서에 따르면, 건물 안에는 진귀한 골동품, 서적, 보석, 고대 화폐, 카메오, 희귀한 꽃병들이 가득했습니다. 무엇보다도 가문 저택의 벽에는 값나가는 예술 작품들이 장식되어 있었습니다.

궁전이 완공된 후 메디치 가문은 불과 몇 년 만에 내부를 치장했습니다. 이 일은 코시모의 아들 피에로가 맡았습니다. 예배당에는 아름다운 프레스코화가 그려졌고, 성경 인물들의 얼굴은 가족 구성원들이 모델이 되어주었습니다. 홀과 방들의 천장은 기발한 그림으로 장식되었고, 곳곳이 황금으로 반짝였습니다. 궁전이 돌아가기 위해서는 수십 명의 하인들이 필요했습니다. 메리 홀링스워스는 저서에서 이렇게 묘사합니다.

"메디치 가문의 부모와 자녀들은 호화롭게 생활했다. 코시모의 계산으로는 하인이 노예 네 명을 포함해 약 50명에 달했고, 아이들의 교육을 맡은 유모와 가정교사도 있었다. 식탁에는 금과 은으로 된 그릇과 리넨 냅킨이 차려졌다. 벽에는 브뤼헤 지점 은행장이 보내준 값비싼 플랑드르 태피스트리가 걸렸다. 가족 예배당에서는 베노초 고촐리의 금박 프레스코화로 화려하게 장식된 공간에서 미사가 봉헌되었다 [...]"

가족들은 저녁에 아무 침대나 펴고 잠지 않았습니다. 메디치 가문 사람들은 가문 문장으로 장식된 웅장한 침대에서 잠을 잤습니다. 비록 귀족 혈통은 아니었지만, 실크 위에 왕처럼 누웠습니다. 부는 복장에서도 드러났습니다. 반짝이는 장식, 모피 깃 달린 외투, 진주가 흐르는 드레스, 금 장식 허리띠, 보석까지—지나가는 행인이 망설임 없이 상대가 누구인지 알아볼 수 있도록 하는 것이 목적이었습니다.

예술의 후원자

메디치 가문은 예술 작품에 막대한 재산을 쏟아부은 것으로 유명합니다. 이들은 화가들의 작업실 전체를 후원했고, 보티첼리나 미켈란젤로처럼 오늘날까지 이름이 알려진 거장들의 조각과 회화를 수집했습니다. 그중에서도 로렌초는 특별한 위치를 차지했으며, 그의 사치는 왕공족마저 감탄하게 만들었습니다. 메리 홀링스워스는 이렇게 전합니다.

"[...] 그의 목표는 진정으로 놀라운 컬렉션을 만드는 것이었다. 고대 조각, 보석을 박아 넣은 꽃병, 보석 세공품, 메달, 화폐, 카메오, 희귀 필사본 등 모두 수천 플로린의 가치가 있었다. 귀족적 위신의 상징물에 대한 그의 지출은 에르콜레 1세 데스테 공작에게 큰 인상을 남겼다. 1487년 5월 로마로 가는 길에 메디치 궁전에 머물렀던 공작은 '메달, 카메오 및 기타 대단한 가치를 지닌 고귀한 물건들'로 가득한 컬렉션을 선보임을 받았다."

역사상 가장 사치스러운 가문, 메디치는 재산을 어디에 썼을까?

일리상(로렌초) 데 메디치(사진: 퍼블릭 도메인)

이 모든 사치는 단순히 명문가 구성원들의 허영심을 달래기 위한 것만은 아니었습니다. 로렌초는 1480년대 말, 겨우 13살에 불과한 아들 조반니에게 추기경 모자를 따내기 위해 지갑을 활짝 열었습니다.

그는 사치스러운 연회를 열고, 위신을 위해 경주용 마구간을 운영했으며, 갖가지 '부탁'을 들어주고 뇌물로 많은 돈을 쥐여주었습니다. 마침내 1488년 3월 8일, 조반니는 추기경 부제가 되었습니다. 아직 어린아이였던 그는 이후 3년 동안 추기경의 휘장을 착용하는 것이 허락되지 않았고, 그 시간을 신학 공부에 바쳤습니다. 1492년 3월 23일, 그는 정식으로 추기경단에 입회했습니다. 로렌초는 몇 주 뒤 세상을 떠나 자신의 투자가 진짜로 결실을 맺는 순간을 보지 못했습니다. 1513년, 그의 아들이 교황이 되었으니까요.

성 베드로의 자리에 오른 조반니 데 메디치, 즉 교황 레오 10세는 아버지의 혈통을 그대로 이어받았음을 증명했습니다. 교황청의 금고를 마음껏 쓸 수 있게 되자 그는 지출을 절제하지 않았고, 불과 2년 만에 금고를 완전히 텅 비게 만들었습니다. 그는 가문의 다른 이들처럼 예술 작품에 거액을 쓰는 등 유난히 낭비벽이 심했고, 동시에 가족과 친구들에게도 돈이 강물처럼 흘러갔습니다.

그는 빠르게 교황청을 거대한 빚더미에 빠뜨렸습니다. 상황이 너무 심각해지자 그는 메디치 가문의 사촌 중 한 명을 불러들여 교황의 보석, 가구, 식기, 심지어 종교 조각상까지 팔도록 명령했습니다. 자신을 구제하기 위해 추기경 자리마저 팔았습니다. 여기에 거액의 대출까지 받았는데, 이는 그의 사후 많은 은행가들을 파산으로 몰아넣는 결과를 낳았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