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오아니스 카포디스트리아스는 그리스 역사상 가장 위대한 인물 중 한 명이었다. 어쩌면 바로 이 때문에 그는 너무나 이른 나이에, 국가에 비참한 결과만 안겨주는 방식으로 무참히 살해당하고 말았다. 폐허가 된 그리스를 통치하겠다고 수락한 순간부터 카포디스트리아스는 자신의 모든 것을 조국에 바쳤다.
그의 치정 과정에서 그는 국내외 이해관계 세력들과 정면으로 충돌했고, 이들은 그를 제거하기 위해 음모를 꾸몄으며 암살에 상당 부분 공모했다. 천 가지 문제와 싸워야 했던 카포디스트리아스는 재임 3년도 되지 않는 짧은 기간 동안 몇 가지 오류에도 불구하고 놀랄 만큼 풍부한 업적을 남기는 데 성공했다. 그러나 그의 업적은 내부로부터 전복될 운명이었고, 아마도 영국과 프랑스의 '도움'이 뒤에 있었을 것이다.
어쨌든 마브로미할리스 형제가 카포디스트리아스를 살해했다는 견해—일부 학자들은 이조차 의문을 제기한다—나 다른 자들이 범행을 저질렀다는 견해와 무관하게, 이 암살의 도덕적 가해자는 결코 그리스인만은 아니었다. 페트로베이스 마브로미할리스 본인이 1840년, 카포디스트리아스를 비난하는 이를 듣고 이렇게 답했다. "선생님은 잘못 재고 있습니다… 저주받을 곳은 영프(英佛)입니다. 그들이 원인이 되어 나는 내 핏줄을 잃었고, 나라는 다시는 얻지 못할 위대한 인물을 잃었습니다. 그의 피가 지금까지 저를 짓누릅니다…"
국유지 분배와 강대국의 개입
카포디스트리아스가 가난한 참전 용사들에게 국유지를 분배하기로 결정한 것은 총독과 그리스 유력자들, 외국 채권자들 사이의 또 다른 마찰점이 되었다. 국유지는 그리스 국가의 유일한 자산이었고, 따라서 그리스에 부과된 가혹한 차관의 상환 담보였기 때문이다.
한편 페트로베이스 마브로미할리스가 완전히 장악한 마니는 카포디스트리아스에 반기를 들고 무장 부대를 준비하고 있었다. 카포디스트리아스는 페트로베이스를 체포했지만, 히드라의 반란으로 상황은 더욱 악화되었다. 쿤투리오티스 가문의 지휘와 알렉산드로스 마브로코르다토스의 정치적 주도 아래 히드라 주민들은 1821년 독립전쟁에 지출한 돈을 돌려달라고 요구하며 봉기했고, 안드레아스 미아울리스가 이끄는 그들은 포로스 해군 기지를 점거해 함대의 배들에 불을 질렀다. 그중에는 호위함 '엘라스(Hellas)'도 포함되어 있었다.
영국과 프랑스라는 강대국이 반란세력을 사실상 부추겼다는 사실은 완전히 입증되어 있다. 페트로베이스 마브로미할리스는 프랑스 공사의 공개적 지원을 받았고, 쿤투리오티스 가문과 마브로코르다토스는 그리스 내 영국 이익의 절대적 대변인이었다. 양국 모두 카포디스트리아스를 지중해에서 러시아 정책의 성가신 도구로 간주했다.
음모를 알면서도 참았던 총독
카포디스트리아스 본인도 특정 강대국이 자신을 겨냥해 꾸미는 음모를 알고 있었다. 1831년 7월 31일 프랑스 제독 랄랑드에게 보낸 서한에서 그는 이렇게 밝혔다. "저 또한 귀국의 모든 술책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저는 어떤 경우에도 귀국과의 협력 관계를 끊지 않기로 결심했습니다. 그리스의 회복과 재건을 최우선으로 여겼기 때문입니다. 소위 보호국들과의 관계를 끊는 것은 그리스에 손해가 될 터라, 저는 어떤 경우에도 양심에 짐을 더하고 싶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일들은 스스로 말하게 두었습니다…"
두 달 후 그는 파리 주재 그리스 대사 알렉산드로스 수토스에게 서한을 보내, 히드라와 마니의 반정부 활동에 프랑스가 개입한 사실과 영국파·프랑스파에 속한 반정부 세력에 대한 프랑스의 공개적 협력과 지원에 대해 프랑스 정부에 항의 교섭을 벌여줄 것을 요청했다.
암살의 조직과 이전의 독살 미수
결국 카포디스트리아스 암살은 프랑스 공사 루앙과 영국 공사 도킨스가 각자의 정부 지시에 따라 조직한 것으로 보인다. 그들은 이미 그전에 마브로코르다토스를 통해 총독을 죽이려 시도한 적이 있었다.
마브로코르다토스는 당시 카포디스트리아스의 하인 니콜레토에게 2만 5천 그로시아를 지불하고 총독을 독살하도록 꾀었다. 니콜레토는 처음에는 받아들였지만 마음을 바꿔 오히려 카포디스트리아스에게 이 사실을 알렸다. 이 시도가 실패로 돌아가자 프랑스군의 지원을 받은 마니에서 반란이 일어났고, 히드라에서도 봉기가 터졌다.
방임된 경계와 무기 구입
페트로베이스의 동생 콘스탄티노스와 조카 게오르기오스는 경찰의 감시 대상이 되었다. 당시 경찰 책임자를 일컫던 폴리타르키스는 매주 마브로미할리스 형제를 호위하는 헌병 두 명을 교체하라는 지시를 받았지만, 무려 40일 동안 그대로 방치했다. 결국 그 헌병들은 공범이 되었다. 카포디스트리아스 암살 며칠 전, 마브로미할리스 일행은 호위 헌병들과 함께 나우플리오의 파크시마디스 총포상에서 새로운 무기를 구입했다.
1831년 9월 27일, 아기오스 스피리돈 교회 앞에서
9월 25일 금요일, 한 노파가 경찰에 신고했다. 콘스탄티노스와 게오르기오스 마브로미할리스가 호위 헌병 두 명과 담소하며 '토요일 26일, 교회 앞에서 카포디스트리아스를 죽여야 한다'고 말하는 것을 들었다는 것이었다. 신고는 경찰 책임자에게 전달되었지만 그는 아무런 조치를 취하지 않았다.
그러나 토요일에 카포디스트리아스는 몸이 좋지 않아 집을 나서지 않았고, 작전은 다음 날로 연기되었다. 1831년 9월 27일 아침, 이오아니스 카포디스트리아스는 나우플리오의 자택을 나서 아기오스 스피리돈 교회로 향했다. 마브로미할리스 형제와 헌병 두 명이 그곳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넷 모두가 그를 습격한 것으로 추정되지만, 일부 학자들은 마브로미할리스가 총독을 공격하지도 않았다고 주장하며 이를 의문시한다.
암살 계획은 아마도 당시 정규군 사령관이던 프랑스 장군 제라르가 세웠을 것으로 보이며, 포티오스 안젤리데스 대위 같은 그리스 장교들도 개입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암살 두 달 전, 펠로폰네소스반도 주둔 프랑스 원정군 장교들은 회담에서 '카포디스트리아스를 제거할 날이 다가왔다'고 확인한 바 있다.
콘스탄티노스 마브로미할리스의 마지막 말 또한 시사하는 바가 크다. 카소울리스 장군의 회고록에 따르면, 총독의 호위병에게 총을 맞고 군중에게 구타까지 당한 마브로미할리스는 쓰러지며 이렇게 외쳤다. "내 잘못이 아니다, 병사들아. 다른 사람들이 나를 덫에 빠뜨린 것이다."
암살 이후 드러난 열강의 태도
암살 직후 프랑스 공사 루앙이 게오르기오스 마브로미할리스에게 망명을 허가하고, 나우플리온 수비대장인 포르투갈 출신 알메이다 대령에게 그를 인도하기를 거부한 태도는 하나의 명백한 증거다. 카소울리스에 따르면 게오르기오스 마브로미할리스는 프랑스 공사에게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우리는 폭군을 죽였습니다. 우리는 프랑스의 명예를 믿습니다. 여기 우리의 무기가 있습니다."
그럼에도 프랑스는 공사와 무관을 통해 피의자들의 변호를 멈추지 않았다. 프랑스 무관은 게오르기오스 마브로미할리스와 공범 두 명을 심판하는 그리스 군사법관들에게 감히 그들을 처벌하지 말라고 노골적으로 위협하기까지 했다.
영국 공사 역시 총독의 죽음에 영국이 공동 책임이 있다고 여긴 나우플리오 시민들의 격론이 멈추지 않으면 그리스와의 외교 관계를 단절하겠다고 위협했다. 러시아 공사의 증언도 결정적이다. 그는 암살에 관한 보고서에서 이렇게 적었다. "…나는 살해의 손이 영국 이외의 다른 누군가에게 무장되었음을 의심하지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