할링 작전(Operation Harling)은 제2차 세계대전 중 그리스에서 감행된 전략적 다리 폭파 작전의 코드명으로, 엘 알라메인 전선의 로멜 군에 대한 보급 차단을 노린 것이었다. 점령지의 레지스탕스 조직들을 총괄하던 영국 특수작전집행부(SOE)는 다리를 통째로 날려 버리기로 결심한다.
엘 알라메인을 위한 발칸의 방아쇠
1942년 가을, 전쟁의 귀추가 북아프리카 사막에서 판가름 나고 있었다. 영국 제8군이 엘 알라메인에서 대반격을 준비하는 동안, 런던의 전략가들은 에르빈 롬멜 장군의 아프리카 군단으로 이어지는 보급로를 끊을 방법을 찾고 있었다. 그 대안으로 떠오른 곳이 축국의 후방 기지 역할을 하던 그리스였고, 그리스를 종단하는 철도의 요충지인 고르고포타모스 강 철교가 목표로 지목되었다.
13명의 공작대, 세 개의 조
파괴 공작 요원들은 세 개 조로 나뉘어 그리스에 잠입했다. 첫 번째 조는 에디 마이어스(Eddie Myers) 중령이, 두 번째 조는 크리스 우드하우스(Chris Woodhouse) 소령이, 세 번째 조는 존 쿡(John Cook) 소령이 이끌었다. 모두 13명으로 구성된 이 팀에는 테미스 마리노스(Themis Marinos) 소위라는 그리스인 장교가 한 명 포함되어 있었다.
영국 공작대는 1942년 9월 30일, 제8군이 엘 알라메인 반격을 준비하던 바로 그 시점에 기오나(Giona) 산지에 낙하산으로 투하되었다. 후보 목표는 세 곳이었다. 고르고포타모스 다리, 아소포스(Asopos) 다리, 그리고 파파디아(Papadia) 다리였다.
경비병과 레지스탕스 사이
최종 선택된 목표는 고르고포타모스 다리였다. 그러나 문제가 있었다. 다리에는 이탈리아군 1개 중대가 경비로 배치되어 있었고, 13명의 공작대만으로는 역부족이었다. 영국은 그리스 저항 세력의 협조가 절실한 상황이었다.
영국 공작대는 11월 2일, 제8군이 로멜의 방어선을 돌파한 바로 그날, 나폴레온 제르바스(Napoleon Zervas)가 이끄는 공화주의 계열 저항조직 EDES와 접촉에 성공했다. 반면 공산 계열의 ELAS와 그 현장 지휘관 아리스 벨루키오티스(Aris Velouchiotis)와의 접촉은 11월 14일에야 이루어졌다. 그 무렵 로멜은 이미 리비야로 후퇴한 뒤였다.
제르바스는 쉽게, EAM은 어렵게
제르바스는 비교적 수월하게 설득에 응했고 참여를 선언했다. 그러나 벨루키오티스를 움직이는 일, 정확히는 그 배후의 EAM(민족해방전선) 지도부를 설득하는 일은 고된 몫이었다. 영국이 기대한 것은 군사적 실익보다 정치적 효과였다. 비록 실질적 중요성은 없더라도, 이 파괴 공작이 그리스인들의 사기를 북돋우고 저항 조직들을 하나로 묶는 계기가 되기를 바랐던 것이다.
1942년 11월 25일, 다리는 무너지다
작전이 실행된 것은 그해 11월 25일이었다. EDES와 ELAS 게릴라로 구성된 혼성 분견대의 지원을 받아 진행된 이 공격은 성공했고, 다리는 폭음과 함께 허물어졌다. 공격대는 단 네 명의 부상자만 남기고 아무런 제지도 받지 않은 채 철수했다. 그러나 독일 점령당국은 보복으로 그리스인 16명을 처형했다.
성공했지만, 무용했던 작전
파괴 공작 자체는 대성공이었고, 점령 유럽에서 수행된 같은 유형의 공격 중 가장 이른 사례 중 하나로 기록되었다. 하지만 그 결과가 지닌 실질적 가치는 거의 없었다. 남은 것은 오직 도덕적 효과뿐이었다. 설령 로멜이 그리스 경유 보급을 원했더라도, 그 시점에는 이미 불가능한 일이었다.
신화의 값
그리고 그리스 안에서의 도덕적 효과마저 오래가지 못했다. ELAS는 얼마 지나지 않아 산악 지대에서 ‘첫 번째 내전’이라 불릴 동족 갈등을 일으키며 저항의 주도권을 독점하려 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그리스 사회는 타조식 자기합리를 이어오며, 오늘날까지도 “이 작전 덕분에 로멜의 보급이 끊겼다”는 이야기를 반복하고 있다.
고르고포타모스 다리 폭파는 그리스 저항운동의 상징적 서막으로 추앙받지만, 그 군사적 성과는 과장되었다는 것이 중론이다. 할링 작전이 남긴 진짜 유산은 폭발한 철교가 아니라, 함께 싸웠다가 곧 칼을 겨눈 저항 세력들의 단란한 환상이었는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