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럽의 역사

1923년 에브로스 군대, 콘스탄티노플 점령은 가능했을까?

1923년 에브로스 군대, 콘스탄티노플 점령은 가능했을까?

그리스 여론의 압도적 다수는 1922년 소아시아 참패 이후 체결된 로잔 조약이 1923년부터 오늘날까지 그리스와 터키의 국경을 규정해 왔다고 믿고 있다. 그러나 소아시아 참패(1922년 8월 말)부터 1923년 7월 24일 로잔 조약 체결에 이르는 기간에는 그 운명을 바꿀 뻔했던 수많은 중요한 사건들이 벌어졌다.

1922년 9월, 군과 함대의 혁명

1922년 9월 13일(당시 그리스 구력으로는 9월 26일), 키오스와 미틸레니에서 니콜라오스 플라스티라스 대령, 스틸리아노스 고나타스 대령, 그리고 디미트리오스 포카스 대위가 주도하는 군·해군 혁명이 일어났다. 혁명 세력은 아티카와 피레우스로 진격하여 콘스탄티노스 국왕을 축출하고 동트라키아를 지켜내고자 했다.

소아시아의 비극을 직접 목격한 캐나다 신문 '토론토 스타(Toronto Star)'의 특파원, 훗날 노벨 문학상 수상자가 되는 어니스트 헤밍웨이는 당시 상황을 이렇게 기록했다.
"'22년의 혁명은 배신당했다고 여긴 군대가 자신들을 배신한 자들에게 일으킨 반란이었다."

전쟁 열기 속의 에브로스 군대 재건

베니젤로스파 장교들이 복귀하며 에브로스 군대가 재편되었다. 1922년의 그리스에게 트라키아는 마른 전투와 같은 의미였다. 즉, 승부가 갈리고 최종적으로 이겨야 할 전장이었다. 그 광경은 충격적이었다. 온 나라가 전쟁 열기에 들끓었고, 열차는 끊임없이 병사들을 실어 날랐다.

그런데 예상치 못한 일이 벌어졌다. 연합국이 동트라키아를 터키에 넘기기로 하고, 그리스인들에게 단 사흘만에 철수할 것을 요구한 것이다.

혁명 정부의 목표와 새 총리의 등장

1922년 9월 15일, 소아시아에서 철수한 1만 2천 명의 병사들이 지친 몸으로도 정연하게 대열을 이룬 모습을 영국 대사가 목격하며, 그들은 아테네의 중심 거리를 행진했다. 즉각 성립된 혁명 정부의 목표는 명확했다. 콘스탄티노스 국왕의 퇴위, 국민의회 해산, "협상국(Entente)에 흔들림 없고 신뢰를 불러일으키는" 정부 수립, 그리고 트라키아 방어였다.

이에 따라 트리안타필라코스 정부는 물러났고, 소티리오스 크로키다스가 총리직을 맡았다.

영·프 대사와의 회담, 그리고 좌절

플라스티라스와 고나타스는 영국과 프랑스 대사를 만났다. 두 군인은 양국 대사에게 매우 우호적인 태도로 임했지만, 콘스탄티노스가 물러나면 두 나라의 태도가 달라질 것이라 믿었던 그들의 기대는 배신당했다. 동트라키아를 터키에 넘긴다는 최종 결정이 이미 내려져 있었기 때문이다.

영국 대사는 1920년 선거 이후 너무나 많은 사건이 있었기 때문에, 그리스의 정권 교체가 열강들의 태도를 급격히 바꾸지는 못할 것이라고 말했다. 또한 그리스는 협상국으로부터 어떠한 지원도 기대해서는 안 된다는 점을 강조했다.

트라키아 문제와 베니젤로스의 역할

이러한 현실 앞에서 혁명 지도부는 트라키아 문제에 대해 더 이상 이의를 제기하지 않았다. 혁명 정부는 엘레프테리오스 베니젤로스를 그리스의 해외 대표로 임명하며, 국제 무대에서의 외교적 생존을 도모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