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66년 노르만 정복 이전의 잉글랜드는 오늘날처럼 완전히 중앙집권화된 국가가 아니라 여러 왕국과 백작령이 얽힌 정치적 집합체였습니다. 웨식스 왕국을 중심으로 점차 통합되어 갔지만, 국왕과 지방 귀족, 교회 사이의 복잡한 권력 관계 속에서 운영되었습니다. 이 글에서는 당시 잉글랜드 사회를 구성하던 주요 제도들을 하나씩 살펴봅니다.
왕국과 백작령
1066년 이전 잉글랜드는 단일 통일 왕국이라기보다 작은 왕국들과 백작령(얼덤)들의 집합체에 가까웠습니다. 각 왕국은 국왕이 다스렸고, 각 백작령은 백작(얼)이 통치했습니다. 이들 영토의 경계는 이웃 세력에 의해 정복되거나 합병되는 일이 잦아 유동적으로 변했습니다. 이 시기 가장 강력한 세력은 에드워드 참회왕(King Edward the Confessor)이 다스리던 웨식스 왕국이었습니다.
참고로 9~10세기 무렵 앵글로색슨 칠왕국(헵타키)은 웨식스를 중심으로 하나로 통합되어 갔으며, 11세기에는 이미 전 잉글랜드를 아우르는 단일 군주 체제가 자리 잡은 상태였습니다. 다만 지역마다 백작의 권한이 매우 컸기 때문에 여전히 분권적인 성격을 띠었습니다.
왕실 궁정
왕실 궁정(Royal Court)은 왕권의 중심지 역할을 했습니다. 국왕 또는 여왕과 그 가족, 그리고 가장 신뢰하는 측근들로 구성되었으며, 왕국을 통치하고 사법 업무를 집행하는 기능도 함께 수행했습니다. 궁정은 단순한 왕의 거처가 아니라 정치·행정·사법이 모두 이루어지는 실질적인 정부였던 셈입니다.
왕의 평의회
왕의 평의회(King's Council)는 국왕이 직접 임명한 고문단으로, 왕국 통치를 보좌하는 역할을 맡았습니다. 평의회는 백작, 주교, 그 밖의 유력 인사들로 구성되었으며, 정기적으로 회합을 열어 중대한 국정 현안을 논의하고 국왕을 대신해 결정을 내렸습니다.
위탄(Witan)
위탄(Witan)은 국왕에게 조언하기 위해 정기적으로 모이던 유력자 집단이었습니다. 백작, 주교, 대수도원장 등 권력층 인물들이 참여했으며, 중대 범죄에 대한 재판을 열거나 법률을 제정하는 기능도 수행했습니다. 위탄은 새 국왕의 선출 과정에도 영향력을 행사했는데, 1066년 해럴드 고드윈슨이 왕위에 오를 수 있었던 배경에도 위탄의 승인이 있었다는 점이 주목할 만합니다.
앵글로색슨 교회
앵글로색슨 교회는 당시 잉글랜드 사회에서 매우 중요한 역할을 담당했습니다. 종교 교육은 물론 일반 교육과 의료 서비스까지 제공했을 뿐만 아니라 정치에도 상당한 영향력을 행사했습니다. 잉글랜드에서 가장 강력한 성직자는 캔터베리 대주교(Archbishop of Canterbury)였습니다.
봉건 제도
봉건 제도(Feudal System)는 토지 소유를 기반으로 한 사회·경제 체계였습니다. 이 체계 아래에서 국왕은 잉글랜드의 모든 토지를 소유하고, 영주들에게 충성과 군사 복무를 조건으로 토지를 하사했습니다. 영주는 다시 기사들에게 같은 조건으로 토지를 나누어 주었습니다. 이렇게 형성된 계층 구조는 정점에 국왕, 최하층에 농민이 있는 피라미드 형태였습니다.
다만 오늘날 우리가 아는 완성된 형태의 봉건 제도는 1066년 노르만 정복 이후 윌리엄 1세에 의해 본격적으로 정착했다는 점을 덧붙일 필요가 있습니다. 노르만 정복 이전의 잉글랜드는 대륙 유럽에 비해 비교적 중앙집권화된 체제를 유지하고 있었습니다.
농민과 노예
농민과 노예는 잉글랜드 인구의 압도적 다수를 차지했습니다. 농민(peasant)은 자유신분으로 토지를 경작하며 생계를 유지했지만, 노예(slave)는 주인의 소유물로 취급되어 어떤 권리도 인정받지 못했습니다. 앵글로색슨 시대 말기에는 노예 인구가 상당한 비중을 차지했으나, 노르만 정복 이후에는 점차 농노(villein) 제도로 대체되어 갔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