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25 전쟁은 1950년부터 1953년까지 남북한 간에 벌어진 전쟁이다. 1950년 6월 25일 새벽 북한군의 기습 남침으로 시작된 이 전쟁은 냉전 체제 속에서 미국이 주도하는 유엔군의 개입으로 확대되었다. 유엔군은 대한민국을 지원했고, 이에 맞서 중국이 북한의 동맹국으로 참전했다. 불과 1년여 만에 한반도는 두 진영이 번갈아 거의 전역을 장악하는 국면을 반복했지만, 어느 쪽도 결정적 승리를 거두지 못했다. 이후 전선은 38선 부근에서 약 2년간 교착 상태에 빠졌고, 1953년 7월 27일 휴전협정 서명으로 전쟁은 막을 내렸다. 휴전선은 오늘날까지 남북한의 새로운 경계선으로 남아 있다.
한국전쟁의 발발 배경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나면서 1910년 이후 일본의 지배를 받아온 한반도는 두 개의 점령 지역으로 분할되었다. 38도선 이북은 소련의 관할, 이남은 미국의 관할이었다. 자유선거를 통해 통일 정부를 수립한다는 계획이 있었으나 모스크바와 워싱턴 간 입장 차이가 좁혀지지 않으면서 1948년 남북한은 최종적으로 분단되었다. 평양에서는 소련의 지원 아래 전직 공산주의 항일 독립운동가였던 김일성이 권력을 장악했고, 남쪽에서는 미국이 과거의 민족주의 지도자 이승만을 옹립했다. 양측 정권은 모두 권위주의적 성격을 띠면서도 한반도 전체의 유일한 정통 정부임을 주장하는 공통점이 있었다.
북한과 서울은 냉전의 긴장 속에서 서로를 견제하며 2년간 대치했다. 소련과 중국은 처음에는 김일성의 무력 통일 요구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러나 1950년 초 모스크바는 분석 끝에 무력 충돌 시 북한이 신속하게 승리할 수 있다고 판단했다. 당시 조선인민군은 검증된 장비(T-34 전차, 강력한 포병 화력, 현대식 항공기)를 갖춘 약 20만 명의 병력을 운용할 수 있었다.
이에 맞서는 한국군은 경무장 병력 95,000명에 불과했다. 일본 점령 임무로 병력 여유가 없던 미국이 서울에 파견할 수 있는 병력 역시 극소수였다. 이러한 세력 균형을 고려한 스탈린은 마침내 김일성의 무력 도발을 승인했다.
북한의 기습 남침과 미국의 대응
1950년 6월 25일, 한국전쟁이 시작되었다. '고요한 아침의 나라'라 불리던 한반도는 이후 3년간 참혹한 폐허로 변하고 말았다. 새벽 4시, 남북을 가르는 국경선 전역에서 수천 문의 포문이 일제히 열렸고, 북한군은 포격 엄호 아래 남하를 개시했다. 남침 소식은 워싱턴을 충격에 빠뜨렸고, 초기 북한군의 진격은 막을 수 없는 듯 보였다. 서울은 불과 3일 만에 함락되었고, 가을이 시작될 무렵 한국군은 남동부 부산 일대의 작은 방어선만을 유지하고 있었다. 그러나 미국은 가만히 있지 않았다.

6월 25일 유엔 안전보장이사회가 침공을 규탄한 데 이어(당시 소련 대표의 부재로 안건이 통과됨) 워싱턴은 북한군을 격퇴하기 위한 다국적군 파견을 유엔으로부터 위임받았다.
유엔군은 미 제8군을 중심으로 16개국 병력(영연방 국가가 대부분이었으나 프랑스 대대도 포함)으로 구성되었고, 전체 작전은 당시 일본 점령군 최고사령관이던 더글러스 맥아더 장군의 지휘 아래 진행되었다. 1950년 9월 중순, 부산 방어선을 돌파하려는 북한군의 공세가 실패로 돌아가자 맥아더 부대는 적의 후방인 인천에 기습 상륙했다.
크로마이트 작전(인천상륙작전)은 대성공이었다. 유엔군은 제공권과 미 해군의 강력한 지원을 등에 업고 북한군을 포위 위기에 몰아넣었다. 후방이 끊긴 북한군은 무질서하게 후퇴했고, 유엔군은 1950년 9월 26일 서울을 탈환했다. 이어 10월 26일에는 중국 국경에 인접한 압록강에 도달했다.
중국의 개입과 전쟁의 교착
김일성 정권의 생존은 전적으로 중화인민공화국의 개입 덕분이었다. 국공내전에서 승리를 거둔 마오쩌둥은 아시아에서 주도적 역할을 수행할 명분과 여력을 갖추고 있었다. 그리하여 11월 초, 약 50개 사단에 달하는 중공군이 압록강을 건넜다. 공식적으로는 '자원병'이었지만 실상은 베이징이 직접 파견한 정규군이었다. 공중전에서도 북한군 기로 식별된 항공기의 상당수는 사실 소련의 통제를 받는 것이었으며, 당대 최강의 전투기였던 MiG-15는 연합군 항공기를 압도했다.
이러한 대규모 병력 투입 앞에서 맥아더의 부대는 후퇴할 수밖에 없었고, 북한은 중공군에 의해 재차 장악되었다. 상황이 너무나 심각해지자 맥아더는 트루먼 대통령에게 만주에 대한 핵공격까지 요청했지만, 이러한 급진적 주장은 오히려 그가 1951년 4월 리지웨이 장군으로 교체되는 결과를 낳았다. 1950~1951년 겨울의 위기 이후 유엔군과 한국군은 전세를 회복하며 기동전을 벌였지만, 전쟁은 점차 막대한 비용이 드는 소모전으로 변질되었다. 1953년 여름, 전선은 38도선 부근에서 안정세를 찾았다.
'아무것도 바꾸지 못한 전쟁'?
미국과 소련 외교관이 주도한 협상 끝에 1953년 7월 27일 휴전이 성립되었다. 남북한 사이에 최종 평화조약이 체결되지 않은 상태였음에도 이 합의는 한반도의 전쟁을 종식시켰다. 판문점에서 서명된 휴전협정은 1950년의 상황과 큰 영토 변화 없이 한반도 분단을 사실상 확인하는 결과를 낳았다.
한국전쟁은 극도로 치명적인 전쟁이었다. 유엔군 병력 약 18,500명(미군 포함), 대한민국 국군 약 7만 명, 북한군과 중공군 약 200만 명이 전사했으며, 폭격과 전염병 등으로 약 300만 명의 민간인이 희생되었다. 이 분쟁은 처음부터 국제적 성격을 띠었다. 개전 초기에는 제3차 세계대전 발발에 대한 우려가 제기되었지만, 북한의 공격 계획을 사전에 알고 있으면서도 국지전에 머물기를 바랐던 소련은 자제했고, 미국의 결의가 확인되자 개입을 확대했다.
두 초강대국은 직접 충돌을 피하려는 의지를 분명히 했다. 미국 정부는 맥아더 해임(1951년 4월)을 단행하며 중국과의 전면전 위험을 배제했다. 결국 미국의 정책은 한국전쟁에도 불구하고 1947년 이후 유럽에 부여해 온 우선순위를 그대로 유지했으며, 이는 유럽 동맹국들의 우려와는 다른 방향이었다.
한국전쟁은 냉전의 격랑 속에서 벌어진 대표적 국지전이었다. 미국과 소련이 사실상 직접 맞붙을 뻔했던 극소수의 고강도 분쟁 중 하나였으며, '고요한 아침의 나라'에 찾아온 진정한 재앙이었다. 그 여파는 오늘날에도 평양과 서울, 그리고 군사분계선에서 여전히 생생하게 느껴지고 있다.
함께 읽으면 좋은 자료
- 『한국전쟁』, 이반 카도(Ivan Cadeau) 저, 탕피스(Tempus), 2016.
- 『1950-1953 한국전쟁, 동아시아의 냉전』, 패트릭 수티(Patrick Souty) 저, PUF, 2002.
- 『20세기의 전쟁 Vol.2: 한국전쟁』, 다큐멘터리 DVD, 200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