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랑스의 샤를, 루이 11세의 끊임없는 반역자
프랑스의 샤를(Charles de France, 1446~1472)은 1446년 투르에서 태어나 1472년 보르도에서 생을 마감한 발루아 왕조의 왕족입니다. 그는 샤를 7세와 앙주의 마리 사이에서 태어난 넷째 아들이며, 프랑스 국왕 루이 11세의 친동생이기도 했습니다.
성격이 나약하고 무능하며 늘 불만을 품고 있던 샤를은 여러 차례, 형에게 반감을 가진 봉건 귀족들에 의해 반란의 선봉에 세워지곤 했습니다. 스스로 주도권을 쥐기보다는 반왕권 세력의 명분적인 구심점 역할을 한 셈입니다.
공익 동맹의 명목상 지도자
베리 공작이었던 샤를은 1465년, 왕권 강화에 반발한 대귀족들의 연합인 '공익 동맹'의 명목상 지도자로 추대되었습니다. 이 반란이 수습된 후 그는 기존 영지 베리를 내놓는 조건으로 노르망디 공작령을 받게 됩니다.
그러나 그는 노르망디를 오래 누리지 못했습니다. 1466년 루이 11세는 노르망디를 다시 거두었고, 그 대신 피레네 인근의 루시용 지방을 제안했습니다.
기옌 공작 임명과 재차 일으킨 모반
샤를은 루시용 수령을 거부하고 곧바로 새로운 음모를 꾸미기 시작했으며, 1469년에는 기옌(아키텐) 공작으로 임명되었습니다. 하지만 이는 명예로운 칭호에 가까웠고, 실질적인 권력 행사에는 큰 한계가 있었습니다.
1471년 그는 또다시 형 루이 11세에 맞서 들고일어섰습니다. 당시 그는 부르고뉴의 용담공 샤를의 딸과의 혼인을 구상하기도 했으며, 1472년 초에는 용담공 샤를과 잉글랜드의 에드워드 4세 등이 포함된 새로운 대연합에 가담하여 왕권에 대한 도전을 이어갔습니다.
의문사와 독살설
그러나 1472년, 샤를은 보르도에서 갑작스럽게 요절하고 맙니다. 그의 참모였던 오데 다디(Odet d'Aydie)는 국왕 루이 11세가 동생을 독살했다고 주장했습니다. 정적 제거에 어떤 수단도 마다하지 않던 루이 11세의 이미지 때문에 이 주장은 당시에도 널리 믿어졌습니다. 결정적인 증거는 남아 있지 않지만, 그의 갑작스러운 죽음은 프랑스 왕실 역사에 의문을 남긴 사건으로 기록되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