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중해를 가로지르는 긴 항해 끝에 533년 가을, 벨리사리우스는 시칠리아에 상륙했다. 그곳에서 그는 반달족의 왕 겔리메르가 공격은커녕 본거지인 남부 도시 헤르미오네에 머물고 있으며, 해안에서 나흘 거리에 있다는 소식을 접했다. 또한 겔리메르가 동생 트자존에게 5,000명의 병력과 120척의 함선을 주어 고다스의 사르데냐 반란을 진압하게 했다는 사실도 알게 되었다. 아프리카에 안전하게 상륙할 수 있다는 소식에 고무된 벨리사리우스는 병력을 다시 배에 태우고 닻을 올렸다.
비잔티움 군대는 콘스탄티노플을 떠난 지 약 3개월 만에 북아프리카 해안, 렙티스 마그나 인근에 정박했다. 많은 학자들이 프로코피우스가 기록한 낮은 병력 수치를 따르지만, 면밀히 읽어보면 벨리사리우스가 상당한 병력을 지휘했음을 알 수 있다. 그의 군대는 보병 1만 명과 기병 5천 명으로, 정규군과 페데라티(연방군)가 각각 절반씩이었다. 여기에 파라스가 이끄는 헤룰리족 400명, 시니온과 발라스가 이끄는 훈족 600명이 포함되었다. 벨리사리우스의 친위대(부켈라리이와 코미타투스)도 동행했으나 그 규모는 기록되지 않았다. 이 군대를 수송하기 위해 칼로니모스가 지휘하는 3만 명의 선원이 탄 500척의 수송선과, 2천 명의 해병이 탑승한 92척의 전함(드로몬)이 동원되었다. 이것이 유스티니아누스가 반달족의 아프리카를 정복하기 위해 보낸 군대였다.
카르타고로의 진군과 전술적 배치
상륙 후 벨리사리우스는 카르타고를 향해 진군을 시작했다. 행군 대형으로 그는 아르메니아의 요한이 이끄는 300명의 부켈라리이를 선봉에 배치해 20스타디온(약 3.6km) 앞서 나가며 적의 동태를 정찰하게 했다. 좌익에는 시니온과 발라스의 훈족 600명이 역시 20스타디온 거리를 두고 본대와 평행하게 움직였다. 벨리사리우스는 나머지 친위대와 측근부대를 이끌고 후미를 지키며 겔리메르의 후방 공격에 대비했고, 주력 부대는 대열 중앙에서 행군했다. 함대는 해안 도로를 따라 움직이는 병력과 보조를 맞추도록 명령받았으며, 우익은 바다를 향하고 있어 함대의 보호를 받으므로 별도의 호위를 두지 않았다.
겔리메르가 벨리사리우스의 상륙 소식을 듣자 신속히 대응했다. 그는 카르타고에 남아 있던 동생 아마타스에게 병력을 모아 아드 데키뭄 고개에서 비잔티움군을 저지하라고 명령했다. 그곳은 가파른 언덕 사이로 길이 나 있는 요충지였다. 겔리메르 자신은 남방의 병력을 모아 동생과 합류하고자 했다.
하루 80스타디온(14.4km)의 속도로 진군한 비잔티움군은 렙티스와 하드루메툼을 점령하며 카르타고로 다가갔다. 마침내 카르타고에서 350스타디온(63km) 떨어진 그라세에 도착했는데, 이곳은 반달 왕의 궁전이 있는 곳이었다. 벨리사리우스는 반달족이 가까이 있음을 알았으나 그들의 병력과 위치는 불확실했다. 군대가 그라세에서 야영을 준비하던 중, 비잔티움군 후위부대 일부가 겔리메르의 선봉대와 조우해 짧은 교전을 벌였다. 양측 모두 진영으로 물러났지만, 벨리사리우스는 적어도 일부 반달족이 바로 뒤에서 추격하고 있음을 알게 되었다.
그라세를 떠난 벨리사리우스는 해안에서 멀어지는 내륙 길을 따라야 했기에 함대의 직접적인 지원을 받을 수 없었다. 그는 함대에 보니 곶을 돌아 카르타고에서 200스타디온(36km) 떨어진 곳에 대기하라고 명령했고, 상륙 나흘째 되는 날 군대를 아드 데키뭄으로 진군시켰다. 이때 그의 가용 병력은 최대 1만 8천 명 정도였다.
아드 데키뭄은 카르타고에서 70스타디온(12.6km) 떨어진 '좁은 길목'으로, 겔리메르가 비잔티움군을 매복 공격하기로 작정한 곳이었다. 그의 계획은 단순했다: 아마타스가 카르타고에서 나와 계곡의 북쪽 출구를 막고 비잔티움군 선봉이 빠져나오려 할 때 공격한다. 이로 인해 비잔티움군이 좁은 공간에서 혼란에 빠지는 사이, 겔리메르가 남쪽에서 본대를 이끌고 후방을 친다. 양방향에서 공격받고 조직이 무너진 벨리사리우스 군대는 궤멸될 것이었다. 계획은 간명하고 우아했으나 치명적인 약점이 있었다: 두 공격이 동시에 이뤄져야 했고, 이를 조율하기가 쉽지 않았다.
겔리메르와 아마타스의 병력 규모는 정확히 알 수 없다. 반달족 총병력은 이전 전쟁의 손실과 트자존이 사르데냐에 데려간 정예 5천 명을 제외하면 약 1만 5천 명 수준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상황의 긴박함과 동원 시간 탓에 전원을 집결시키긴 어려웠을 테니, 겔리메르 휘하에 1만~1만 2천 명, 아마타스 휘하에 3천~5천 명 정도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프로코피우스에 따르면 카르타고로 향하는 세 갈래 길이 인근에 있었는데, 언덕들에 가려 서로 보이지 않았다. 첫째는 비잔티움군이 따르던 해안로로 아드 데키뭄을 지나 카르타고로 이어진다. 둘째는 남쪽에서 오는 중앙로로, 겔리메르가 헤르미오네에서 진군하던 길이며 아드 데키뭄 직전에서 해안로와 만난다. 셋째는 더 내륙으로 계곡을 우회해 카르타고로 가는 길인데, 이 길이 겔리메르를 골치 아프게 했다. 아마타스가 왕의 지시를 따를 경우 카르타고는 무방비 상태가 된다: 적은 비잔티움 병력이라도 이 길로 무사히 카르타고까지 진격할 수 있고, 정통 기독교도인 시민들(반달족은 아리우스파)이 동교인인 적에게 성문을 열어줄 수도 있었다. 겔리메르는 계획을 바꿔 조카 기바문두스에게 2천 명을 주어 제3의 길과 카르타고를 지키게 했다.
반면 벨리사리우스는 전투를 원치 않았다. 그는 여전히 반달족 군대의 전력과 편제를 정확히 파악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에게 필요한 것은 정보였고, 이를 바탕으로 빨라도 내일에나 치를 전투를 계획하는 것이었다.
아드 데키뭄 전투
겔리메르의 지시에 따라 침공 나흘째 되는 날 아침, 아마타스는 병력을 이끌고 고개로 들어가 직접 지형을 살피며 배치를 정했다.
반달족이 데키뭄으로 향하는 동안 벨리사리우스도 계곡에 접근하고 있었다. 데키뭄에서 약 6km 지점에서 비잔티움군은 야영하기 좋은 위치를 발견했고, 벨리사리우스는 보병으로 하여금 진지를 구축하게 했다. 짐을 안전하게 둔 뒤 그는 가용 기병을 이끌고 반달족을 찾아 나섰다. 울리아리스가 친위대 800명을 이끌고 선봉에 섰고, 아르메니아의 요한과 그의 300기병은 주력보다 훨씬 앞서 나갔다. 좌익의 훈족도 비슷한 거리에서 병행했다. 적의 위치를 알 수 없었던 벨리사리우스는 솔로몬에게 나머지 페데라티를 맡겨 요한과 합류해 반달족의 위치를 파악하게 했다. 비잔티움 장군은 아직 요한의 선봉과 좌익의 훈족이 이미 적과 교전 중임을 모르고 있었다: 아드 데키뭄 전투가 시작된 것이다.
1단계: 기바문두스의 패배
두 차례 충돌은 거의 동시에 일어났다. 정오 무렵, 겔리메르의 조카 기바문두스와 그의 2천 명이 제3의 길을 행군하다 페디온 할론 인근, 데키뭄에서 40스타디온(7.2km) 떨어진 곳에서 600명의 훈족과 마주쳤다. 수적 우세에도 반달족은 한 훈족 기병이 앞서 나가 도발하자 멈칫했다. 프로코피우스는 그들이 훈족의 사나운 명성을 두려워했기 때문이라고 전한다. 이 머뭇거림이 훈족의 사기를 북돋웠고, 즉시 공격이 개시됐다. 제대로 저항 한번 못해보고 기바문두스가 전사하자 그의 부대는 궤멸당했다.
2단계: 아마타스의 패배
같은 시각, 아마타스는 소수 정예만 이끌고 데키뭄으로 나아가 전장을 답사했고, 나머지 병력은 30명 이하의 소규모 그룹으로 길게 늘어서 뒤따르고 있었다. 정오께 데키뭄에 다다른 아마타스는 뜻밖에 아르메니아의 요한과 그의 300 부켈라리이와 정면으로 맞닥뜨렸다. 아마타스는 12명의 부켈라리우스를 쓰러뜨리고 장렬히 전사했으나, 그의 소부대는 카르타고 방향으로 달아났다. 요한과 그의 추격에 뒤따라오던 반달족 소그룹들은 전열을 갖출 틈도 없이 도미노처럼 무너져 내렸고, 도망치는 무리는 카르타고 성문 앞까지 밀려들었다. 요한은 성문 앞까지 다다른 뒤 천천히 되돌아오며 반달족 시체를 수습했다.
3단계: 겔리메르의 도착
한편 요한과 연락하려 벨리사리우스가 보낸 솔로몬의 페데라티 부대가 아마타스와 교전이 벌어진 지점에 도착했다. 솔로몬은 현지 주민들에게 물어봐도 상황이 불분명하자 근처 언덕에 올라 전황을 살폈다. 남쪽에서 먼지구름이 일며 다가오고 있었다: 겔리메르와 반달족 주력이었다. 그는 즉시 전령을 보내 벨리사리우스에게 지원을 요청했다.
불행히도 솔로몬과 장교들은 반달족을 공격할지 말지 논쟁을 벌였고, 그 사이 양군 사이에 있는 이 일대 최고봉의 전략적 가치를 양측 병사들이 동시에 깨닫고 쟁탈전을 벌였다. 치열한 접전 끝에 반달족이 먼저 정상을 점령했고, 고지에서의 이점과 수적 우세를 앞세워 페데라티를 격파했다. 패잔병들은 벨리사리우스와 증원군을 찾아 도망쳤고, 앞서 나가던 울리아리스의 800명 진지에 합류했다. 페데라티는 친위대가 합세해 반격해주길 기대했으나, 패배 소식에 친위대마저 무너져 벨리사리우스 쪽으로 달아났다.
도망병들이 그의 위치에 이르자 벨리사리우스는 즉각 전열을 정비하고 도망병들을 질책한 뒤 보고를 들었다. 그는 겔리메르가 멈춰 섰고, 상당수 반달족이 이미 격파됐으며, 아군 병력이 수적으로 우세할 것이라 판단했다. 반달족에게 결정타를 날릴 기회라 보고 전군에 데키뭄으로 전속 전진을 명령했다.
그 사이 겔리메르도 결단을 내려야 했다: 페데라티를 추격할지, 카르타고로 진격할지. 그는 언덕에서 내려와 고개에서 동생 아마타스의 시신을 발견했다. 행동을 취하는 대신 그는 슬퍼하며 장례를 준비했고, 반달족 병력은 진영을 풀고 고개 여기저기로 흩어졌다. 프로코피우스의 전승대로라면 이것이 전부지만, 겔리메르에게는 또 다른 고민이 있었다: 동생이 고작 300명에게 패했다는 사실을 몰랐기에, 비잔티움 주력이 예상보다 빨리 다가와 아마타스를 덮쳤다고 판단했을 것이다. 그는 비잔티움 주력이 카르타고로 치닫고 있다고 보고 대응을 고심하던 중, 재앙이 닥쳤다.
4단계: 벨리사리우스의 도착과 겔리메르의 패배
벨리사리우스가 정돈된 대열로 도착해 흩어진 반달족을 기습했다. 놀란 반달족은 도망쳤으나 카르타고 방향이 아니었다: 이미 로마군이 그쪽으로 진격했다고 여겨 양쪽에서 포위당할까 두려웠기 때문이다. 그들은 불 불라 평원과 누미디아로 통하는 길 쪽으로 달아났다.
아드 데키뭄 전투는 끝났고, 카르타고는 승자의 수중으로 떨어졌다. 겔리메르와 주력이 도시에서 멀어졌고, 성안엔 비잔티움군의 공세를 막거나 시민들의 성문 개방을 막을 병력이 남아 있지 않았다. 벨리사리우스는 개선하며 카르타고에 입성했다. 1라운드는 그의 승리였다.
트리카메룸 전투
아프리카 상륙 약 3개월 후, 카르타고에서 방비를 수리하고 병력을 재정비한 벨리사리우스는 결전을 위해 도시를 나섰다. 그는 500명만 남기고 모든 기병과 부켈라리이를 아르메니아의 요한 지휘하에 트리카메룸의 반달족 진영으로 보냈다. 요한에게는 기회가 되면 교란하되 본격적인 결전은 피하라는 명령이 내려졌다. 이튿날 벨리사리우스는 남은 기병과 보병을 이끌고 뒤따랐다. 그동안 비잔티움 기병은 적 진영에서 멀리 떨어진 곳에 진을 치고 있었다.
아드 데키뭄 전투 후, 겔리메르의 동생 트자존이 사르데냐에서 5천 명을 이끌고 귀환했고, 반달 왕은 회심의 일전을 결심했다. 비잔티움군 도착 이튿날 정오 직전, 겔리메르는 병력을 진영 밖으로 빼내 작은 개울 뒤에 진을 쳤다. 중앙에는 사르데냐 원정 베테랑들을 거느린 트자존이, 양익에는 반달족 킬리아르히(천인대장)들이 나머지 병력을 배치했다. 그들은 비잔티움군이 중앙에 집중하고 약한 양익은 건드리지 않을 것이라 예상했으며, 병력 규모도 비슷할 것으로 봤다. 반달족 중앙 뒤에는 규모 미상의 무어족 연합군이 포진했다. 그들은 전투에 가담하러 왔으나 승패가 갈릴 때까지 관망하며 전투에 휘말리지 않을 거리에서 사태를 지켜보기로 했다.
반달족의 배치는 비잔티움측에 의외였다. 아르메니아의 요한은 개울 건너편에 대열을 갖추게 했다. 좌익엔 기병 궁수 일부와 근접전용 무장만 한 페데라티가 배치돼 약 3,500~4천 명, 우익엔 나머지 기병 최대 4천 명, 중앙엔 부켈라리이와 군기가 자리했다. 겔리메르는 그동안 벨리사리우스의 훈족에게 전향을 권유해왔기에, 무어족처럼 훈족도 비잔티움군 본대와 별도로 배치돼 승패를 보고 편을 정할 수 있게 했다.
벨리사리우스는 보병을 남겨두고 부켈라리이와 함께 전장으로 달려가 전투 개시 직전에 도착했다.
전투는 비잔티움군이 소부대를 보내 반달족 중앙을 괴롭히며 시작됐다. 전열을 흐트리거나 개울을 건너며 기세가 꺾일 반격을 유도하려는 의도였다. 트자존은 이를 간파하고 제한적인 돌격으로 비잔티움 척후병을 물리쳤으나 개울은 건너지 않았다.
요한이나 벨리사리우스는 중요한 결론을 내렸다: 반달족이 미끼를 물지 않지만, 중앙이 비잔티움 궁병의 공세에 약해지고 있으며, 양익이 트자존을 지원하러 움직이지 않고 있다. 결단을 내린 요한은 거의 모든 코미타투스를 이끌고 반달족 중앙으로 정면 돌격했다. 격렬한 백병전 끝에 반달족 지휘관 트자존이 전사했다.
반달족 중앙이 무너지자 양익은 비잔티움군 전선에 발이 묶여 중앙을 도울 수 없었다. 바로 그 순간 벨리사리우스가 총공격을 명령했다. 반달족 중앙이 붕괴되며 도망치자 공포가 양익으로 번졌고, 순식간에 반달족 대군은 공포에 질려 와해됐다. 훈족은 추격에 합류하며 벨리사리우스에게 충성을 선언했다.
추격은 오래가지 않았다: 반달족은 진영으로 숨어들었고, 보병이 아직 도착하지 않은 탓에 벨리사리우스는 진영을 공격할 병력이 없었다. 대신 비잔티움군은 적 시신을 수습하는 데 그쳤다. 프로코피우스는 비잔티움군 전사자 50명, 반달족 800명으로 기록한다. 트리카메룸 전투는 이렇게 끝났다.
전투 후 겔리메르는 진영에서 달아나 산중으로 피신했다. 얼마 뒤 신변 안전을 보장받고 항복했고, 반달족의 저항은 무너졌다. 단 3개월 만에 벨리사리우스는 반달족을 격파하고, 유스티니아누스를 위해 고대 아프리카 속주를 수복했으며, 자신은 불멸의 명성을 얻었다.
참고 문헌
- 프로코피우스: 전쟁사. 반달 전쟁, 3~4권, 플로레스 루비오 역, 그레도스(2000).
참고 서적
- 그레이트렉스, G. (1998): 로마와 페르시아의 전쟁, 502~532, 프랜시스 케언스.
- 휴즈, I. (2009): 벨리사리우스: 최후의 로마 장군, 반슬리.
- 릴링턴-마틴, C. (2007): "다라 협곡 인근 전투(AD 530)에 대한 고고학적·문헌적 증거: 지형, 텍스트, 참호", BAR –S1717, 299~311쪽.
- 트레드골드, W. (1995): 비잔티움과 그 군대, 284~1081, 스탠퍼드.
본 기사는 데스페르타 페로 안티과 이 메디에발 17호에 다음 호 예고로 게재되었으며, 데스페르타 페로 안티과 이 메디에발 18호 유스티니아누스 1세 대제 특집의 일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