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경: 프랑스 식민 제국과 서인도 제도
프랑스 혁명 전야, 프랑스의 식민 제국은 세 대륙에 걸쳐 펼쳐져 있었습니다. 그중에서도 마르티니크, 과들루프, 상도망(Saint-Domingue)으로 이루어진 프랑스령 서인도 제도는 본국 경제의 핵심이었습니다. 이 식민지들 덕분에 프랑스는 유럽 최대의 설탕과 커피 생산국으로서의 지위를 누릴 수 있었습니다.
서인도 제도 사회에서 피부색은 곧 사회적 지위를 의미했습니다. 사람들은 '백인', '자유 유색인', 그리고 흑인 또는 혼혈 노예로 엄격하게 구분되었습니다.
프랑스 혁명과 인간과 시민의 권리 선언은 노예들에게 자유의 희망을 안겨주었습니다. 그러나 노예제의 폐지는 저절로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정치와 군사가 얽힌 격렬한 갈등의 결과였습니다. 서인도 제도에서는 1789년 8월 생피에르에서, 이어 1790년과 1791년에는 과들루프에서 봉기의 물결이 일어났지만, 모두 실패하고 혹독한 탄압에 직면했습니다.
1791년, 산토도밍고의 노예 대반란
주요 인물
- 투생 루베르튀르(Toussaint Louverture)
- 나폴레옹 보나파르트(Napoleon Bonaparte)
경과
1791년 8월 22일 밤부터 23일 새벽까지, 산토도밍고 섬에서 노예 반란이 일어났습니다. 당시 백인 정착민과 자유 유색인 사이에는 첨예한 대립이 존재했습니다. 자유 유색인들은 자신들의 정치적 권리를 요구했으나 백인들은 이를 끝내 거부했습니다. 백인 플랜테이션 농장주들이 다수를 차지한 식민지 의회가 자유 유색인과 노예의 처우에 관해 입법할 수 있는 유일한 기구였기 때문입니다.
노예들의 압도적인 수적 우세와 백인·자유 유색인 진영의 분열(자유 유색인 중에도 노예 소유자가 있었습니다)은 봉기를 부추겼고, 반란은 실질적인 내전으로 번졌습니다. 약 30세 무렵 해방되어 교육의 혜택을 받았던 투생 루베르튀르가 노예 반군의 지휘를 맡았습니다.
봉기를 종식시키기 위해 입법의회는 1792년 3월 자유 유색인의 정치적 권리를 인정하기로 결정했습니다. 그러나 이 양보로도 상황은 진정되지 않았습니다. 게다가 1793년 2월부터 프랑스는 프랑스령 영토를 위협하는 영국과 전쟁 중이었습니다. 사태가 극도로 어려워지자 국민공회는 마침내 1794년 2월 4일 노예제 폐지를 법령으로 선포했습니다.
결과와 여파
- 프랑스 혁명이 식민지의 노예에게 즉각적인 자유와 개인 간의 진정한 평등을 가져다준 것은 아니었습니다. 노예제 폐지는 오랜 정치적 투쟁의 산물이었으며, 그 서막은 인간과 시민의 권리 선언과 노예제를 규탄한 1793년 헌법과 함께 열렸습니다.
- 투생 루베르튀르는 1801년 섬의 총독이 되었고, 권위주의적 통치 체제를 확립하기 위해 섬 전체를 대대적으로 재편했습니다.
- 집권한 나폴레옹 보나파르트는 식민지형 경제를 회복하고 노예제를 부활시키려 했습니다. 1802년 2월, 23,000명의 병력이 산토도밍고 섬 탈환을 위해 상륙했습니다. 유색인 병사들은 무장 해제당했고, 투생 루베르튀르는 체포되어 프랑스로 압송된 뒤 1803년 4월 7일 생을 마쳤습니다.
- 그러나 황열병이 나폴레옹 원정군을 초토화하면서 봉기가 다시 불타올랐고, 드디어 1804년 1월 1일 산토도밍고 섬은 '아이티'라는 이름으로 독립을 선포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