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대사

발키리 작전: 히틀러 암살 시도와 실패로 끝난 쿠데타의 전말

발키리 작전(Operation Valkyrie)은 독일의 지도자 아돌프 히틀러를 암살하는 것을 목표로 나치 독일군 장교들이 실행한 계획입니다. 이들은 전쟁과 히틀러의 통치 방식에 깊은 불만을 품고 있었으며, 1944년 7월 그를 제거한 뒤 권력을 장악하고 연합국과 독일의 항복을 협상하려 했습니다. 그러나 이 작전은 실패로 끝났고, 관련자들은 나치의 가혹한 보복에 직면해야 했습니다.

히틀러에 대한 불만

발키리 작전은 독일 국방군(Wehrmacht) 장교들을 규합하여 히틀러를 제거하고 전쟁을 종식시키려는 목적으로 추진되었습니다. 나치당과 독일군 내부에서 히틀러에 대한 반감은 새로운 것이 아니었지만, 독일이 전쟁에서 연이어 패배하고 홀로코스트라는 유대인 학살이 자행되면서 그 불만은 더욱 커졌습니다.

군 내부의 반힐러 움직임은 1938년 주데텐란트 위기에서 비롯되었습니다. 당시 히틀러는 체코슬로바키아 영토였던 주데텐란트를 침공하여 독일에 병합하겠다는 의사를 공개하며 유럽 전역에 큰 외교적 갈등을 일으켰고, 이 위기는 뮌헨 회담으로 일단락되었습니다.

많은 장교들은 이 위기가 전쟁으로 번질 위험성에 불만을 품었습니다. 하지만 전쟁이 시작된 후 독일군이 유럽 대륙에서 연승을 거두면서 이들의 목소리는 힘을 잃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부 장교들은 은밀하게 히틀러에게 반대 입장을 유지했습니다.

구체적인 반대 인물로는 외교관 울리히 폰 하셀(Ulrich von Hassell), 법조인 겸 외교관 아담 폰 트로츠 추 솔츠(Adam von Trott zu Solz), 그리고 독일 국방군 장교 루트비히 베크(Ludwig Beck) 등이 있습니다. 민간인 사회에서도 반대 세력이 존재했으며, 이들은 경우에 따라 장교들과 힘을 합쳐 히틀러 축출 방안을 논의하기도 했습니다. 더욱 극단적인 사례로는 1939년 11월 게오르크 엘저(Georg Elser)가 뮌헨의 한 맥주집에 설치한 폭탄으로 나치 독재자를 암살하려던 시도를 들 수 있습니다.

발키리 작전을 통해 히틀러를 제거하려 한 이들은 독일 저항 세력의 일원으로, 1941년 중반부터 다시 결속하기 시작했습니다. 이 과정의 핵심 인물은 헤닝 폰 트레스코프(Henning von Tresckow) 장군으로, 그는 국방군이 소련 장교들(정위라고 불림)을 처우하는 방식에 분노를 느낀 인물이었습니다. 하셀과 베크 같은 인물들 역시 독일 저항 운동을 재정비하는 데 기여했습니다.

왜 히틀러를 죽여야 했는가?

독일 저항 세력은 히틀러에 불만을 품은 나치 장교들로 구성되었으며, 그 불만의 이유는 다양했습니다. 반히틀러 운동은 1941년부터, 특히 1942년부터 본격화되었는데, 여기에는 두 가지 핵심 요인이 작용했습니다. 바로 전쟁의 상황과 동유럽에서 독일군이 자행한 잔혹 행위였습니다.

전쟁의 흐름과 관련해서는 1941년 말부터 상황이 급격히 악화되었다는 점을 고려해야 합니다. 1941년 6월 소련 침공 이후 소련군의 강한 저항으로 독일군은 막대한 손실을 입었고, 공산주의 국가를 격퇴할 만큼 충분한 자원도 확보하지 못했습니다.

이러한 정보는 나치 지도부에 1941년 말까지 알려졌고, 전쟁 결과에 대한 두려움은 일부 장교들이 지도자에 맞서 모의하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한편, 또 다른 이들은 독일군의 전쟁 잔혹성에 분노했습니다. 소련 관료들의 총살과 유대인에 대한 폭력은 일부 이들에게 큰 충격을 안겨주었습니다.

물론 유대인 박해 자체에는 문제 삼지 않으면서도 나치의 처우 방식에 거부감을 느낀 장교들도 있었습니다. 결국 군사적 패배와 독일 멸망에 대한 두려움, 그리고 홀로코스트의 폭력에 대한 분노가 결합되면서 독일 장교들이 독재자에 맞서 음모를 꾸미게 된 것입니다.

흥미롭게도 독일 저항 세력 내부에서도 히틀러 암살에 대한 의견은 일치하지 않았습니다. 프로이센 원수 출신의 헬무트 폰 몰트케(Helmuth von Moltke)처럼, 암살이 성공하더라도 오히려 히틀러를 순교자로 만들 수 있다는 이유로 반대한 인물도 있었습니다. 그 외 저항 세력의 주요 인물로는 신학자 디트리히 본회퍼(Dietrich Bonhoeffer), 프로이센 재무장관 요하네스 포피츠(Johannes Popitz), 정치인 칼 괴르델러(Carl Goerdeler) 등이 있습니다.

발키리 작전의 계획

발키리 작전이라 불리는 히틀러 암살 음모는 1943년부터 본격적으로 조직되기 시작했습니다. 배후에는 헤닝 폰 트레스코프, 클라우스 셴크 그라프 폰 슈타우펜베르크(Claus Schenk Graf von Stauffenberg), 프리드리히 올브리히트(Friedrich Olbricht) 등 독일군 장교들이 있었습니다. 이들은 히틀러가 제거된 후 독일에서 군사 쿠데타를 일으키고, 이어서 독일의 전쟁 항복을 협상하려 했습니다.

참여자 중 일부는 연합국과의 협상을 통해 전쟁 기간 독일이 점령한 영토의 안보를 유지할 수 있기를 희망했습니다. 그러나 역사학자 이언 커쇼(Ian Kershaw)에 따르면, 연합국 입장에서는 1942~1943년부터 이미 전세가 자신들에게 유리했기 때문에 협상 타결이나 독일의 영토 유지 가능성은 고려 대상이 아니었습니다.

작전 참여자들은 독일군 내부에서 히틀러에 불만을 품은 다른 인사들을 물색했고, 조직이 어느 정도 갖춰지자 암살 계획을 구체화했습니다. 1943년에도 여러 차례 시도가 있었지만, 상황이 여의치 않아 실패하거나 중단되곤 했습니다.

이러한 실패 이후, 공모자들은 히틀러가 가장 경계하지 않을 곳, 즉 그의 사령부 안에서 공격을 감행하기로 결정했습니다. 이 결정으로 슈타우펜베르크는 음모의 핵심 인물로 부상했습니다. 그는 1942~1943년경 홀로코스트에 대한 반감과 히틀러가 독일을 파멸로 이끌고 있다는 판단 때문에 저항 세력에 합류했습니다.

슈타우펜베르크는 프리드리히 프롬(Friedrich Fromm) 휘하에서 육군총사령부 참모차장으로 임명된 후 암살 임무를 자원했습니다. 프롬은 음모의 존재를 알고 있었지만 직접 가담하지는 않은 인물이었습니다. 이 새로운 직책 덕분에 슈타우펜베르크는 나치의 지도자에게 직접 접근할 수 있었고, 암살 성공 가능성도 높아졌습니다.

암살 시도는 어떻게 진행되었나?

공모자들은 폭탄 투척 날짜를 1944년 7월 20일로 정했고, 장소는 히틀러의 사령부인 '늑대의 굴(Wolfsschanze)'로 정했습니다. 이곳은 당시 동프로이센의 라스텐부르크(현 폴란드 영토)에 위치해 있었습니다. 슈타우펜베르크는 이전에도 여러 차례 히틀러를 암살하려 시도했지만 성공하지 못했습니다.

늑대의 굴에서의 공격을 위해 두 개의 폭탄이 준비되었지만, 당시 슈타우펜베르크는 한 개만 장치하고 가져갈 시간이 있었습니다. 폭탄은 서류가방에 담겨 회의실로 옮겨졌고, 폭발 몇 분 전 슈타우펜베르크는 전화를 받겠다는 핑계로 회의실을 빠져나왔습니다.

폭탄이 터지면서 회의실은 큰 피해를 입었습니다. 여러 명이 부상을 입고 네 명이 사망했지만, 히틀러는 살아남았습니다. 그는 신체 일부에 화상을 입고 고막이 파열되는 경미한 부상만 입었습니다. 폭발 직후 슈타우펜베르크는 베를린에 전화를 걸어 그 정도의 폭발 강도로는 히틀러가 생존하기 어렵다고 통보했습니다.

그러나 그의 판단은 틀렸습니다. 폭탄이 히틀러가 앉은 위치 반대편에 놓였기 때문에, 폭발 순간 무거운 회의용 테이블이 독재자를 보호해 준 것입니다. 암살이 성공했다고 판단한 슈타우펜베르크는 곧바로 베를린행 비행기에 올랐습니다.

작전 실패와 잔혹한 보복

슈타우펜베르크의 통보 직후 수도 베를린에서 군사 쿠데타가 개시되었지만, 히틀러 생존 소식이 확인되면서 이마저도 실패하고 말았습니다. 같은 날 프리드리히 폰 프롬은 '서류 소각' 작전을 시작하고 부대를 동원해 작전 관련자들을 체포했습니다.

프롬의 의도는 작전과 관련된 어떤 정보도 새어 나가지 않도록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의 조치로 7월 21일 슈타우펜베르크와 올브리히트, 그리고 다른 두 사람은 즉결 처형되었습니다. 베크와 트레스코프를 비롯한 다른 관련자들은 이 참패 이후 자살로 생을 마감했습니다.

히틀러가 명령한 보복은 무자비했습니다. 독일 비밀경찰 게슈타포는 파리, 빈, 프라하 등지의 저항 조직을 철저히 분쇄했으며, 이번 보복으로 총 5,000명이 목숨을 잃었습니다.

참고 자료

KERSHAW, Ian. Hitler. São Paulo: Companhia das Letras, 2010, p. 85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