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차 세계대전 중동 전선에서 싸운 서양의 세계 일주 모험가가 회고록을 썼다고 하면, 대부분은 '아라비아의 로렌스'를 떠올릴 것이다. 하지만 로렌스가 런던에서 지혜의 일곱 기둥 초판을 지인들에게만 한정 출간한 1922년보다 2년 앞선 1924년, 베네수엘라 출신 라파엘 데 노갈레스가 스페인어로 초승달 아래 4년을 출간해 오스만 군대에서의 경험을 기록했음을 아는 이는 드물다. 로렌스가 세계적 명성을 얻은 반면, 노갈레스의 파란만장한 생애는 거의 알려지지 않았다.
라파엘 노갈레스 멘데스의 생애와 기질
라파엘 데 노갈레스 멘데스(1877~1936)는 커피 사업을 하는 부유한 베네수엘라 가정에서 태어났다. 독일 기업들과 거래하던 가문 배경 덕분에 그는 독일, 벨기에, 스페인에서 군사 훈련을 받을 수 있었다. 1898년 스페인 편에서 싸우며 첫 실전을 치른 그는 이후 북아프리카, 사하라 이남 아프리카, 아시아, 영국, 미국을 전전하며 제1차 세계대전 전까지 여러 전쟁과 혁명에 참전했다. 안타깝게도 그가 저서에서 기술한 흥미진진한 사건들을 다른 사료로 입증하는 진지한 역사 연구는 아직 부족한 실정이다.
많은 곳에서 그를 '모험가'로 묘사하지만, 그는 스스로를 모험가로 여기지 않았다. 그에게 모험가는 "교양 없는 속물, 혹은 사회적으로 한가한 신사로, 행동하지 않으면서 직업도 없이 항상 돈벌 궁리만 하는 자"[1]였다. 그는 자신을 방랑 기사(knight errant)로 여겼다. "귀족 출신으로, 모든 자발적이고 이타적인 대담한 행동에 우아한 몸짓을 보인다. 직업 군인이지만 칼을 최고 입찰자에게 팔기엔 너무 고귀하고, 전쟁이 자기 차례가 오길 기다리기엔 너무 조급하다. 기다릴 수 없어 전쟁을 찾아내고, 만들고, 발명하고, 이끈다. 녹슨 갑옷과 평화로운 마음가짐 외에는 아무것도 증오하지 않는다. 이상을 위해 창을 부러뜨리러 세상에 나선다. 가장 강한 이상은 오래된 낭만적 문구에 깃들어 있다: 행동하거나 죽으라(act or die). 어떤 이들에게 행동하지 않는 것은 죽는 것, 불쾌한 영적 죽음이다"[2].
노갈레스의 여정: '좋은 전쟁'을 찾아서
제1차 세계대전 발발 소식을 카리브해 트리니다드 섬에서 접한 노갈레스는, 베네수엘라가 중립을 선언했음에도 "좋은 전쟁이 보이면 참전할 준비를 하라"는 좌우명대로 행동에 나섰다. 19세기 낭만주의에서 비롯된 '좋은 전쟁' 개념이 고야의 전쟁의 참화 판화 연작에서 이미 의문시되었음에도, 그에게 제1차 세계대전은 신사들 사이의 전쟁이 종말을 고하는 시작이었을 뿐이다.
자서전에서 그는 독일에서 성장하고 교육받았으며(두 누이가 독일인과 결혼), "라틴 민족을 위해, 하룻밤 사이에 약소국의 수호자가 된 작지만 영웅적인 벨기에에 봉사하고자 개인적 호감을 희생했다"[3]고 적었다. 하지만 연합국 국민이 아니라는 이유로 벨기에 군 입대가 거절당했고, 프랑스 군에서도 외인부대 입대만 제안받았다. 낙심하지 않고 유럽에서 '좋은 전쟁'을 계속 찾아 나선 그는 몬테네그로에 도달했다. 그는 다시금 약자에게 감정이입하며 몬테네그로를 낭만적으로 묘사한다. "그 산들에는 7세기 동안 모든 술탄의 권력에 저항해온 자유롭고 영웅적인 민족이 숨 쉬고 있었고, 당시에는 1만 5천 명도 안 되는 군대로 카타르에서 사라예보까지 오스트리아의 독수리에 도전하고 있었다"[4]. 하지만 몬테네그로 군 입대도 실패했다.
이후 중립국 불가리아에 이른 그는 독일 군부 인맥을 통해 터키 측의 복무를 수락받아 '노갈레스 베이'가 되어 중동의 여러 전선에서 싸우게 된다. 아이러니하게도 처음 입대하려 했던 측과 정반대 편에서, 몬테네그로인들이 저항했던 그 술탄들 편에서 장교로 싸우게 된 것이다.
코카서스 전선과 아르메니아 학살의 현장
노갈레스는 1915년 1월 오스만 제3군 소속으로 에르주룸(아나톨리아), 이른바 '터키의 시베리아'에서 러시아군을 상대로 코카서스 산맥을 따라 전투를 벌였다. 대다수 병사가 참호전에서 짧고 영광스러운 승리라는 세뇌와 달리 참혹한 현실을 직면했지만, 정규전과 비정규전 경험이 풍부한 직업 군인 노갈레스에게 이 전쟁의 첫인상은 이전 전역들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1915년 봄, 아르메니아인 봉기가 일어난 반(Van) 주로 파견되었을 때, 그는 이미 수많은 아르메니아인들의 훼손된 시신을 목격했고, 이곳이 러시아군과의 전투뿐 아니라 역사적 뿌리가 깊은 민족·종교·인종적 갈등이 뒤섞인 비정규전의 장임을 깨달았다. 초기엔 아르메니아인을 부정적으로 봐, 러시아 지원 아래 독립 아르메니아를 건설하려 "무력으로 터키의 비들리스, 반, 에르주룸 주를 장악하려 했다(이들 지역에서 아르메니아인은 평균 30%에 불과했다)"[5]고 비판했다. 그는 오스만 제국 내 아르메니아 문제의 가장 논리적이고 정의로운 해법은 자치라고 생각했다.
반 시티에 도착했을 때, 아르메니아인과 터키인이 전투를 벌이는 그곳에서 그는 터키 편에서 싸우는 유일한 기독교인이었다. 독일·오스트리아 장교들도 보이지 않았다. 이 전역에서 그는 전쟁 참여를 재고하게 된다. 아르메니아 민간인, 특히 노인·여성·아동에 대한 학살을 목격하며 터키 군에서 제대를 요청했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고, 터키가 학살 은폐를 위해 자신의 생명이 위태로울 것임을 느꼈다. 이 점은 앙카라대 메흐메트 네자티 쿠틀루 교수에 의해 반박되는데, 터키가 노갈레스를 죽이려 했다면 어렵지 않았을 것이며, 1915년 10월 마흐무트 카밀 장군의 문서에 따르면 노갈레스가 제대하더라도 군과 아르메니아인에 대한 부정적 출판물을 내더라도 해를 끼칠 수 없다고 명시되어 있다[6]. 물론 이 문서는 아르메니아인 집단학살과 그 국제적 인식이 태동하던 시점의 것으로, 2년 뒤라면 판단이 달랐을 것이다.
노갈레스는 19세기 낭만주의에서 나온 신사로, 로렌스처럼 20세기 전쟁의 가혹하고 어두운 현실과 맞닥뜨렸다. 그는 저서 전반에서 아르메니아인 학살의 잔혹함—시신 훼손, 여성·노인·아동 살해—을 생생히 묘사하며, 여러 차례 학살을 막고 생명을 구하려 했으나 좀처럼 성공하지 못했음을 적는다. 그는 학살의 책임을 정규 터키 군이 아닌, 디예브데드 베이(Djevded Bey) 주지사 같은 정치인들의 명령을 받은 쿠르드족 자원병과 민병대에게 돌린다. 디예브데드 베이는 "애국심, 광신, 혹은 잔혹한 본능, 뭐라고 부르든 간에 동부 주에서 아르메니아인의 말살 천사가 되었다"[7].
라파엘 노갈레스가 본 아르메니아인 집단학살
노갈레스가 아르메니아인 학살을 기술할 때, 그는 당시 전형적인 서양인의 시각에서 동방 민족을 잔혹하고 열등하게 여기는 태도를 보인다. 하지만 스스로 이슬람교도들과 함께 기독교인인 아르메니아인을 처형하는 집행자가 된 불운을 끊임없이 저주함이 드러난다. 터키 장교로서의 의무와 기독교인으로서의 아르메니아인 연대감 사이의 지속적 딜레마가 책 전반에 흐른다. 그의 집단학살 증언은 기독교인이자 터키군 복무 전문 군인이라는 이중적 위치에서, 양측 사이의 역사적 증오에 연루되지 않은 관점이라는 점에서 큰 가치를 지닌다.
그의 증언이 터키와 아르메니아 양측 모두에 의해 인용되었다는 사실이 그 흥미와 진실성을 입증한다. 첫 터키어 번역자 이스마일 하키는 노갈레스의 아르메니아 문제 기술에 강력히 비판하며 그를 "빌려준 칼을 문 조상 없는 외국 장교"라 비난했지만, 이 책은 터키 측 주장—아르메니아인에 대한 조치가 초기엔 오스만 제국에 대한 봉기에 대한 전시 대응이었다는 점, 아르메니아인 역시 무슬림 민간인에게 잔혹 행위를 저질렀다는 점—을 뒷받침한다. 한편 아르메니아 측도 그의 증언을 20세기 첫 집단학살의 피해자임을 입증하는 자료로 활용한다. 진실은 양측 모두에 있다. 노갈레스는 전투와 학살, 강제 이주로 아르메니아 민간인이 겪은 공포를 적나라하게 묘사하는 동시에, 아르메니아인이 러시아의 선동으로 터키에 무장 봉기했고 무방비 무슬림 민간인을 학살했음도 의심할 여지없는 사실로 기록한다.
노갈레스는 반 포위전 후 터키 군을 떠나지 않았지만, 제6 오스만 군으로 전속되어 이라크·이란 전선에서, 1916년엔 제4군 소속으로 시리아 전선에서 시나이, 가자, 아랍 봉기 진압전에 참전했다. 터키 군에서의 마지막 보직은 시나이 군사 총독이었으며, 1918년 10월 31일 이스탄불에서 터키의 항복을 지켜보았다.

제1차 세계대전 이후
우드로 윌슨 미국 대통령이 노갈레스를 "아르메니아의 처형자"라 부르며 미국 입국을 거부했지만, 그는 시종일관 전문 군인으로서 중동 전란의 소용돌이에 휘말린 민간인을 최대한 돕고자 했다. 그가 이 집단학살을 동방 민족의 야만성 탓으로만 돌렸기에 '좋은 전쟁'이 존재한다는 신념을 유지할 수 있었겠지만, 19세기 제국주의 전쟁과 제2차 세계대전이 증명하듯 집단학살과 민간인에 대한 극단적 잔혹 행위는 동방 민족만의 전유물이 아니었다.
대전 후 전장 경험을 집필한 그는 니카라과에서 종군 기자로 활약하며 산디노를 만났고, 니카라과의 약탈(1928)을 출간해 미국 제국주의를 고발했다. 이 책은 미국 정부에 의해 압수되었다. 1936년 파나마에서 병으로 생을 마감했다. 그의 묘소엔 금빛 월계관이 장식된 참나무 화환이 놓였는데, 네덜란드에 망명 중이던 빌헬름 2세 황제가 보낸 것이었다. 동봉된 카드에는 이렇게 적혀 있었다. "라파엘 데 노갈레스 멘데스, 대전쟁의 최고사령관, 내가 만난 가장 용감하고 고귀한 기사에게."
참고문헌
- Jasmina Jäckel de Aldana, "From the globetrotting adventurer to the Venezuelan national hero?", Asian and African Studies, Colegio de México, 2000년 1~4월. https://www.redalyc.uaemex.mx
- Mehmet Necati Kutlu, "A Latin American Officer in the Ottoman Army and Some New Documents", 1915 the longest year of the Ottoman Empire. A centennial look, National University of Costa Rica, 2015.
- Peter Englund, "The beauty and pain of battle: The First World War in 227 fragments", Editorial Roca, 2011.
- Rafael de Nogales Méndez, Memoirs, Volumes I and II, Editorial Fundación Biblioteca Ayacucho, La Expresion Americana Collection, 1991.
- Rafael de Nogales Méndez, Four years under the Media Luna, Editorial Foundation The Dog and the Frog, Caracas, 2006.
- Violeta Rojo, "Memoirs of a Venezuelan Adventurer: Rafael de Nogales Méndez", Contexto Virtual Magazine, No. 8, 2002. https://www.saber.ula.ve/bitstream/123456789/18898/1/violeta_rojo.pdf
주석
[1] Rafael de Nogales Méndez, Memories, p. 27.
[2] Ibid, p. 28.
[3] Rafael de Nogales Méndez, Four Years Under the Crescent, p. 31.
[4] Ibid, p. 34.
[5] Ibid, p. 44.
[6] Mehmet Necati Kutlu, "A Latin American officer in the Ottoman army and some new documents", p. 25.
[7] Rafael de Nogales Méndez, Four Years Under the Crescent, p. 13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