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학문에 대한 헌신보다 더 나은 것을 알지 못한다. 학문은 다른 모든 기예보다 우월하며, 사람들은 학문이 인간 세상의 가장 높은 것임을 안다. 지위가 높은 사람일수록 참된 학문이 그 유용성이나 이익 여부와 상관없이 월등히 가치 있고 존엄한 것임을 인정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그것을 통해 위대한 무언가를 이룰 수 있으리라 늘 희망한다. 그 위대함과 고귀함, 찬란한 아름다움 앞에서 우리가 무엇을 이루었는지 영혼 속에 자리 매김할 수 없고 말로 표현하지도 못할 뿐이다. 어떤 이들은 학문이 하늘로 올라가는 빛과 같다고 믿을 정도다."
학문과 철학 지식에 대한 이 놀라운 찬사는 아부 바크르 무함마드 이븐 야흐야 이븐 알사이그(Abu Bakr Muhammad ibn Yahya ibn al-Sa'ig)의 펜에서 나왔다. 그는 아벰파스(Avempace), 곧 아랍어로 이븐 바즈자(Ibn Bajja)라는 이름으로 더 널리 알려진 인물이다. 물론 오늘날 그의 이름은 낯설게 느껴질 수 있다. 그러나 그는 알안달루스(Al-Andalus)가 배출한 가장 빛나는 철학자 중 한 사람이었다. 당시의 '철학자'란 거의 모든 학문을 섭렵한 완전한 지성인을 일컫는 말이었다. 의학, 천문학, 물리학, 식물학은 물론 시와 음악, 논리학과 신학, 심지어 정치학까지. 이 방대한 문화적 유산은 훗날 코르도바 출신의 아베로에스와 마이모니데스 같은 중세의 위대한 인물들, 나아가 기독교 스콜라 철학자들에게 강력한 영향을 미쳤다.
분열의 시대, 자라고사에서 피어난 학문
아벰파스가 살았던 시대는 결코 평탄하지 않았다. 이베리아 반도의 무슬림 영토가 이미 여러 타이파(taifa) 왕국으로 분열되어 있던 무라비트 왕조 시기였기 때문이다. 아벰파스는 1080년, 금세공인 집안의 아들로 타이파 왕국 중 하나인 자라고사에서 태어났다. 당시 이 도시는 이슬람 권력의 중심축에서 멀리 떨어져 있었고, 바로 그 덕분에 문화가 크게 융성할 수 있었다. 다른 지역에서 이단으로 배척받던 학설도 용납되었고, 무슬림과 기독교인, 프랑크인 사이에는 어느 정도의 공존이 이루어졌다.
위대한 고전들을 되살리는 왕성한 학문 활동을 펼치기에 더없이 좋은 환경이었다. 아벰파스는 무엇보다 아리스토텔레스와 플라톤을 깊이 연구했으며, 테미스티오스, 알렉산드로스 폴뤼히스톨, 니콜라오스 다마스키노스처럼 상대적으로 덜 알려진 주석가들도 폭넓게 섭렵했다. 아울러 자신만큼 다재다능하여 이들 고전을 아랍 세계에 널리 알린 선배 학자 아비켄나(이븐 시나)의 업적도 이어받았다.
사색을 통한 순수한 앎, 팔라시파의 이상
글 서두에 인용한 리살라트 알와다(Risalat al-wada, 작별의 편지)의 한 구절에서 알 수 있듯, 아벰파스는 인간의 이상이 사색을 통한 순수한 앎에 있다고 보았다. 실용적인 목적이 아니라 그 자체로 앎을 추구할 때 인간은 신에 가까워진다는 것이다. 이러한 사유는 팔라시파(falasifa)라 불렸으며, 당대 지배적이던 신학 중심의 철학과 결별했다는 점에서 진정으로 혁명적이었다.
그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인간관을 계승하면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지적 인간(Intellectual Man)'이라는 개념을 제시했다. 신비주의적이고 초합리적이며 준신적인 경지에 오른 인간으로서, 과학적 차원은 물론 일반 대중의 차원 위에 서는 존재였다. 그러나 그러한 경지에 도달하기가 극히 어렵기에, 그는 훗날 금욕주의자의 원형이 되는 삶의 방식을 제안했다. 이를 통해 완전한 사람들로 이루어진 정신적 공동체가 실현될 수 있는데, 이는 부분적으로 플라톤의 국가를 연상시키지만, 그리스 철학자가 제시한 엄밀한 시민·정치적 범위를 넘어선 것이었다.
플라톤주의와 아리스토텔레스주의의 이 독특한 융합은 타드비르 알무타와히다(Tadbir al-mutawahid, 홀로 있는 자의 통치)와 리살라 잇티살 알아클 비알인산(Risala ittisal al-aql bi-l-insan, 지성과 인간의 결합에 관한 논문) 등의 저작에서 표현되었으며, 한 세기 뒤 토마스 아퀴나스에게 상당한 영향을 끼쳤다. 물론 아퀴나스는 그를 일부 반박하는 형태였지만 말이다.
재상의 자리에서 유배 생활까지
1115년 무라비트 군대가 자라고사에 입성했다. 시인과 학자들을 곁에 두던 에미르 이븐 티필위트는 아벰파스를 재상으로 임명했다. 그러나 그의 강직한 성격은 상관과의 충돌을 낳았고, 재상직에 겨우 2년을 머문 뒤 파면당한 데 이어 한동안 투옥되기도 했다. 이후 아라곤 국왕 알폰소 1세가 도시를 포위하여 1118년 말 함락시키자, 철학자는 망명길에 올랐다. 그는 남부와 동부 레반테 지방을 떠돌았다. 그라나다와 세비야에서도 의사 아벤즈카르와 작가 아벤하오안 같은 저명한 동료들과 갈등을 빚으며 거듭 어려움을 겪었고, 결국 먼 길을 떠나 페즈(Fez)에 이르렀다. '이르렀다'는 말이 결코 과장이 아니었다. 그는 1138년에서 1140년 사이 이곳에서 생을 마쳤는데, 소문에 따르면 독살이었다고 한다.
약 70편의 저작이 남긴 유산
그가 세상에 남긴 것은 대부분 유실된 약 70편의 저작이라는 방대한 문화적 유산이었으며, 여러 분야에서 중요한 이론들이 제시되었다. 천문학에서는 그때까지의 행성 체계 표상을 재고했고, 시에서는 구어체 시구와 음악을 결합한 제헬(zéjel)의 창시자로 평가받는다(이 장르는 훗날 기독교인들에게 계승되었다). 식물학 분야에서는 의사라는 본업과 맞물려 약리학과 약초학에 주목했다.
이러한 이유로 아벰파스는, 의사로서 더 유명했던 아비켄나와 달리, 알안달루스 자체의 최초의 철학자로 인정받는다. 그의 후계자인 이븐 투파일, 유대인 사상가 마이모니데스, 그리고 그의 이론을 체계화하고 정리한 아베로에스 역시 그를 그렇게 높이 평가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