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 속에는 전쟁에 두드러지게 참여한 여성들이 적지 않습니다. 바이킹, 웨일스, 브르타뉴 여성들부터 다양한 국적의 여성들이 전장의 기록에 이름을 남겼으며, 그중에는 스페인 여성들도 여럿 포함되어 있습니다. 오늘 우리는 15세기 말 카스티야 왕위 계승 전쟁에서 가문의 명예를 위해 갑옷과 검을 든 레온의 귀족 영애, '아린테로의 여인' 후아나의 이야기를 되짚어보고자 합니다.
작은 산골 마을, 아린테로와 가르시아 백작
아린테로는 레온 주 발데루게로스(Valdelugueros) 시에 속한 작은 마을로, 칸타브리아 산맥 깊은 곳에 자리 잡고 있습니다. 오늘날 주민은 고작 십여 명에 불과하지만, 544년 전만 해도 백여 명 정도가 살던 제법 규모 있는 곳이었습니다.
이곳의 영주는 '태양 사면(四面)의 히달고(Hidalgo de solar)'라 불리는 가르시아 백작이었습니다. 이는 조부모 4대가 모두 히달고(하급 귀족) 신분이 입증된 명문가임을 의미했습니다. 이러한 신분적 의무에 따라 그는 왕실 군대에 무장한 기사 한 명을 보내야 할 책무가 있었습니다.
카스티야 왕위 계승 전쟁의 소용돌이
레온은 카스티야 왕관령에 속해 있었는데, 1474년 엔리케 4세가 후사 없이 사망하면서 왕위를 둘러싼 내전이 발발했습니다. 엔리케 4세에게는 후아나 데 트라스타마라라는 외동딸이 있었으나, 그녀가 왕의 총신 벨트란 데 라 쿠에바의 딸이라는 소문('라 벨트라네하')이 퍼지면서 정통성이 의심받았습니다. 이에 반발한 귀족들은 왕의 이복동생 알폰소 왕자를 옹립하려 했으나, 그가 급사하자 알폰소의 누이인 이사벨이 그 대의를 이어받았습니다.
이사벨은 아라곤의 페르난도 왕세자와 혼인하며 독자적인 세력을 구축했고, 1474년 12월 엔리케 4세가 사망하자 양측은 각자 여왕을 자처하며 내전에 돌입했습니다. '후아니스타(후아나 파)'는 포르투갈 알폰소 5세와 프랑스의 지지를, '이사벨파'는 아라곤과 동맹을 맺고 맞섰습니다.
아버지를 대신해 전장으로: 디에고 올리베로스의 탄생
포르투갈군이 플라센시아를 통해 진격해 오자, 이사벨 파는 카스티야 전역에 소집령을 내렸습니다. 소식이 아린테로에도 닿았지만, 가르시아 백작은 아들이 없고 딸만 다섯(혹은 일곱) 명이었으며, 본인 역시 노쇠하여 참전할 수 없는 처지였습니다. 이웃 히달고의 자제들이 출전하는 모습을 보며 좌절하던 백작에게, 딸 후아나가 나섰습니다. "제가 가문의 대표로 나가겠습니다."
처음에는 완강히 반대하던 백작도 대안이 없음을 깨닫고 허락했습니다. 왕의 전령이 전국을 도느라 약 두 달의 여유가 있었고, 후아나는 그 기간 동안 말 다루기, 검과 창술, 갑옷 입기 등 기사로서의 혹독한 훈련을 소화해냈습니다. 긴 머리카락을 자르고 '아린테로의 디에고 올리베로스(Diego Oliveros de Arintero)'라는 가명으로 벤타베네에 집결한 그녀는 누구도 그녀의 정체를 의심하지 못했습니다.
토로 전투에서의 활약과 정체 발각
약 1년간 실전 경험을 쌓으며 베테랑 못지않은 기량을 선보이던 후아나. 1476년 2월, 이사벨과 페르난도 부부는 포르투갈군이 점거한 사모라를 포위 공격해 함락시켰습니다. 포르투갈군은 토로로 퇴각했고, 페르난도는 이들을 추격해 펠레아곤살로 인근에서 격돌했습니다. 이것이 유명한 토로 전투(Battle of Toro)입니다.
후아나는 동료 기사들과 돌격하여 적 부대장의 군기를 노렸으나, 세 명의 적에게 포위되었습니다. 둘을 물리쳤으나 마지막 한 명과의 격투 끝에 언덕 아래로 굴러 떨어지며 무기를 잃고 부상을 입었습니다. 전설에 따르면 이때 저고리 단추가 풀리며 가슴이 드러나 여성임이 밝혀졌다고 하나, 갑옷을 입은 상태로는 불가능에 가깝습니다. 또 다른 설로는 두에로 강에서 목욕하다 들켰다는 이야기도 있으나, 가장 유력한 것은 기절해 있는 그녀를 치료하려던 군의관들에 의해 발각되었다는 것입니다.
페르난도 왕의 관용과 아린테로에 내린 특권
소문은 카스티야 제독의 귀에 들어갔고, 중세 법전 <라스 시에테 파르티다스(Las Siete Partidas)>에 따라 여성의 전쟁 참여가 금기시되던 시대였기에 큰 문제가 되었습니다. 페르난도 왕은 직접 후아나를 불러들여 자초지종을 들었습니다. 왕은 그녀의 용기에 감탄하여 기만 행위를 용서했을 뿐 아니라, 파격적인 은전을 베풀었습니다.
- 아린테로 전 주민에게 히달고 신분 부여: 세금 면제(페체로 금지)와 병역 의무(혈세) 면제.
- 연례 박람회 개최권: 당시 중요한 경제적 특권.
- 토로 승리 기념 축제 개최권: 전투는 무승부에 가까웠으나, 이사벨의 왕위 확정이라는 정치적 승리로 기념.
- 가문 문장 변경: 창과 방패를 든 귀부인의 형상을 가문 문장에 추가할 수 있도록 허가.
이후 그녀의 생가(1936-39년 내전 때 소실되어 재건됨)에는 다음과 같은 시구가 새겨져 전해집니다.
"용기 있는 여인, 아린테로의 영광 / 남자의 갑옷 입고 조국을 지켰네 / 왕의 은총으로 마을은 자유를 얻고 / 그녀의 이름은 역사에 남으리라."
전설과 역사의 경계, 그리고 비극적 최후
이 이야기는 펠리페 5세 시대에 아린테로 당국이 특권을 주장하며 제출한 편지 한 통 외에는 확실한 문헌 기록이 남아 있지 않아, 어디까지가 사실이고 어디부터가 로맨스(전설)인지 구분하기 어렵습니다. 그녀의 최후 역시 두 가지 버전으로 전해집니다.
- 버전 1 (우발적 죽음): 귀향길에 라 칸다나 마을에서 볼링을 하던 병사들이 그녀의 특권 증서를 빼앗으려다 저항하는 그녀를 살해했다는 설.
- 버전 2 (정치적 숙청): 여성의 참전 용인과 세금 면제 등의 선례가 왕권 안정에 해가 된다고 판단한 자문관들의 건의, 혹은 이사벨 여왕의 질투나 법질서 엄수 의지로 인해 사자들이 파견되어 증서 반환을 강요하다 그녀를 죽였다는 설.
어떤 결말이 진실이든, 후아나 데 아린테로는 남성 중심의 중세 사회에서 가문의 의무와 개인의 명예를 위해 성별의 금기를 깬 용기 있는 여성으로, 레온 지방의 자랑스러운 전설로 남아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