패튼 장군의 편견과 블랙 팬서의 첫인상
"첫인상은 나쁘지 않았다. 하지만 그 인종이 타고난 전투력에 대해서는 아무런 믿음이 없다."
1944년, 제761전차대대가 실전 배치를 앞두고 있을 때 조지 S. 패튼 장군이 남긴 평가였습니다. 당시 미군 지휘관들 사이에서 만연했던 흑인 병사에 대한 편견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발언으로, 이러한 시각은 흑인 병사들이 별도의 분리 부대로 편성되는 결과로 이어졌습니다.
그러나 "싸우러 나가자(Go out to fight)"라는 각오를 내건 이들은 뛰어난 활약으로 300개가 넘는 훈장을 받았고, 블랙 팬서(Black Panthers)라는 별명에 걸맞은 명성을 쌓아올렸습니다.

모순된 마음을 지닌 패튼
흥미롭게도 패튼 역시 다른 많은 지휘관들처럼 상당히 모순적인 감정을 안고 있었습니다. 앞서 언급한 발언에는 당대 특유의 인종차별적 뉘앙스가 담겨 있었고, 그는 회고록 《내가 아는 전쟁(War as I Knew It)》에서도 "흑인 병사는 장갑차 전투에 필요한 속도만큼 빠르게 사고하지 못한다"고 기록하며 차별적 견해를 굽히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전쟁 전 엘파소 수비 사령관 시절, 그는 흑인 병사가 린치당할 위기에 처하자 이를 막아낸 바 있습니다. 게다가 1944년 그는 어떤 증원이라도 절실히 필요한 상황이었기에 제761전차대대에게 신뢰의 표를 던졌습니다.
부대 소식지에는 그가 직접 쓴 감동적인 훈계문까지 실렸습니다. 요컨대 패튼은 흑인을 집단으로서는 불신하면서도 개개인이 훌륭한 병사가 될 수 있다는 점은 인정했고, 병력 부족에 몰린 그는 그들을 거두지 않을 여유가 없었습니다.
흑인 병사들의 오랜 역사
흑인 부대의 전장 참여가 금지되었던 것은 다소 기묘한 상황이었는데, 사실 남북전쟁 때 이미 흑인 부대가 최전선에서 싸운 적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1862년 10월 29일, 최초의 흑인 자원 연대였던 제1캔자스 유색인 자원보병연대가 아일랜드 마운드 교전(Island Mound Skirmish)에서 최전선에 섰습니다.
또한 영화 《영광의 깃발》로도 널리 알려진 제54매사추세츠 연대와 제10기병연대에도 흑인 병사들이 복무했습니다. 후자의 병사들은 버팔로 솔저(Buffalo Soldiers)라 불렸는데, 이는 곱슬머리가 들소 털을 연상시킨다고 하여 키오와족이 붙인 이름으로 전해집니다. 이후 이 명칭은 미국 유색인 부대(United States Colored Troops)의 다른 연대에도 확대 적용되었으며, 이들은 인디언 전쟁, 1898년 미서전쟁, 1916년 멕시코 개입, 필리핀 반란 진압 작전에 참전했습니다.
다만 제1차 세계대전에는 참전하지 못했습니다. 20세기에 들어서면서 앞서 언급한 예외를 제외하고는 흑인 병사들이 주로 근무 지원 임무에 배치되었기 때문입니다.

맥네어의 혁명적 결단
제2차 세계대전이 시작될 무렵 초기 상황도 비슷했습니다. 지휘관들의 유보적인 태도가 계속되던 중, 전쟁이 본격화된 후 레슬리 제임스 맥네어(Lesley James McNair) 중장이 상황을 바꿔놓았습니다.
맥네어는 육상군 최고사령관으로서 새로운 시대에 맞게 미군을 설계·재편한 인물로 "미군의 건축가"라는 별명을 얻었습니다. 전사자에 대한 개별 보충제 도입, 실전형 훈련 방법 적용, 정지전이 아닌 기동전 개념 확립 등이 그의 대표적인 업적입니다.
맥네어는 인구 비율에 맞춰 흑인 병사를 군에 두어야 한다고 판단했고, 각 군종마다 분리된 부대를 창설하고 그 구성원들이 장교로 승진하여 부대를 지휘할 수 있는 길을 열었습니다. 부대가 별도로 창설된 이유는 흑인 장교들이 학교에서 받은 교육 수준이 낮아 백인들보다 뒤처질 것이라는 믿음 때문이었지만, 때로는 유색인 장교가 부족하여 백인으로 충원해야 하는 경우도 있었습니다. 참모본부가 백인 10.6명당 흑인 1명의 비율로 기존 부대에 분산 배치하자는 초기안을 제출했으나, 이는 거부되었습니다.

제761전차대대의 창설과 훈련
이러한 혁신적 조치는 1941년 현실이 되었고 국내 언론에도 널리 보도되었습니다. 2년 후에는 약 17만 명의 흑인이 군 복무 중에 있었으며, 이는 육군 전체의 10.5%로 미국 인구 비율(10~11%)과 거의 일치하는 수치였습니다.
이들은 당시 말로 "유색인" 부대라 불린 제90 및 제92보병사단, 제2기병연대, 제452방공포병대대, 제555낙하보병대대, 그리고 이 글의 주인공인 제761전차대대 등에 나뉘어 배속되었습니다.
제761전차대대는 1942년 3월 15일 창설되었고, 다음 달부터 루이지애나주에 위치한 93㎢ 규모의 캠프 클레이번(Camp Claiborne)에서 훈련을 시작했습니다. 이곳은 1930년부터 부대 훈련과 준비를 위한 기지로 사용되어 온 곳입니다.
신병들은 M5 경전차로 훈련을 받았습니다. 이 국산 경전차는 남부연합 장군 J.E.B. 스튜어트(Jeb Stuart)의 이름을 따 스튜어트(Stuart)라 불렸으며, 37mm 포와 브라우닝 M1919 기관총 3정으로 무장하고 있었습니다. 훈련의 마지막 단계는 또 다른 남부연합 장군의 이름을 딴 텍사스주의 포트 후드(Fort Hood)에서 진행되었습니다. 이곳에서 대원들은 M4 셔먼(Sherman) 중전차 운용을 배웠습니다. 이번에는 북부 장군의 이름을 딴 것으로, 75mm 포, 서로 다른 구경의 기관총 3정, 2인치 박격포를 갖추고 있었습니다.
분리 법령 속에서의 갈등과 재키 로빈슨 사건
두 기지 모두 인종 분리 법령이 여전히 유지되던 남부에 있었기에, 현지 주민은 물론 다른 부대의 장교와 병사들과도 관련한 분쟁이 끊이지 않았습니다. 1942년 1월 10일 루이지애나에서 서로 다른 부대의 백인과 흑인 병사들 간 집단 난투극이 벌어진 후, 제761전차대대 대원들은 반란을 일으켜 전차 6대를 탈취하려다가 폴 L. 베이츠(Paul L. Bates) 대령의 개입으로 저지되기도 했습니다.
베이츠 대령은 버스 뒷좌석에 앉기를 거부했다가 포트 후드 헌병에게 체포된 흑인 장교에 대해 군사재판에 회부하기를 거부하기도 했습니다. 그 장교의 이름은 재키 로빈슨(Jackie Robinson). 상사의 변호에도 불구하고 결국 군사재판에 넘겨졌지만 무혐의 판결을 받았고, 제761전차대대를 떠나야 했습니다. 그리고 그는 미국 야구 역사상 가장 위대한 스타 중 한 명이 되었습니다. 재키 로빈슨은 대령의 지지를 결코 잊지 않았습니다.
마침내 전장으로: 노르망디 상륙
그러나 블랙 팬서들을 정말 분노하게 만든 것은 훈련이 훨씬 덜 된 백인 부대들이 먼저 최전선에 파견되는 동안 자신들은 계속 대기만 해야 한다는 사실이었습니다. 그러다 마침내 그 순간이 왔습니다.
제2군을 지휘하며 훈련을 담당하던 벤자민 리어(Benjamin Lear) 장군—신병들이 트럭을 타고 지나가며 그가 반바지 차림으로 골프를 치는 모습을 보고 휘파람을 불었다 하여 유-후(Yoo-Hoo)라는 별명이 붙었습니다—는 제761전차대대가 전투 준비를 마쳤다고 판단하고 영국으로 보냈습니다. 그곳에서 대륙 침공 작전이 계획되고 있었습니다.
실제로 1944년 10월 10일, 흑인 병사들은 4개월 전 피로 물든 샌드백이 된 노르망디 오마하 해변에 상륙했습니다.

블랙 팬서의 첫 전투와 아르덴 대반격
흑인 장교 30명과 백인 장교 6명, 총 676명으로 구성된 이 부대는 월터 크루거에서 패튼으로 지휘관이 바뀐 미 제3군에 배속되었습니다. 패튼은 증원이 절실했기에 우려에도 불구하고 검열 후 제761전차대대의 편입을 승인했습니다.
이들은 11월 7일 전투에 투입되어 무아앙빅(Moyenvic), 빅쉬르세유(Vic-sur-Seille), 모르빌레빅(Morville-lès-Vic) 등 프랑스 여러 도시에서 거의 항상 최전선에서 싸웠습니다. 아이러니하게도 부대의 첫 부상자는 흑인 병사가 아니라 지휘관인 베이츠 대령이었습니다.
그러나 진정한 영광의 순간은 다음 달에 찾아왔습니다. 독일군이 아르덴 대반격을 감행하면서였습니다. 적이 미군 제복을 입고 잠입하여 감시 초소를 교란하려 한다는 경고가 접수되자, 패튼은 흑인 병사들에게 이 검문소들을 배치하고 의심스러운 목표물에는 발포하라고 명령함으로써 문제를 해결했습니다.
벌지 전투(Battle of the Bulge)는 혹독하고 피비린내 나는 전투였습니다. 제761전차대대는 156명의 사상자를 기록했는데, 그중 24명이 전사하고 81명이 부상당했으며 나머지 44명은 질병으로 인한 것이었습니다. 또한 전차 14대를 잃고 20여 대가 손상되었습니다.
바스토뉴 구원과 독일 진공
임무를 완수한 후, 예비 부대 성격상 필요한 곳 어디든 파견되던 제761전차대대는 바스토뉴로 향했습니다. 혹독한 기후 조건 속에서 필사적으로 버티고 있던 제101공수사단 병력을 지원하는 임무였습니다.
독일의 공세는 1945년 1월 25일 실패로 끝났고, 블랙 팬서는 미 제4기갑사단의 선봉으로서 계속 전진하며 제3군을 이끌고 지크프리트 선(Siegfried Line)을 돌파해 독일 본토로 진입하는 임무를 맡았습니다.

영예로운 전적과 역사적 평가
183일간 쉼 없이 전역에 종사한 이 병사들이 보여준 수많은 용맹함은 자색심장훈장 296개, 은성훈장 11개, 동성훈장 69개로 이어졌습니다. 여기에 부상에서 회복한 베이츠 대령에게 명예훈장이 추가로 수여되었고, 세르잔트 루벤 리버스(Ruben Rivers)와 일병 워렌 G.H. 크레이(Warren GH. Crecy)—후자는 "제761의 가장 사나운 남자(The Baddest Man in 761)"라는 비꼬는 듯한 별명으로 불렸습니다—에게는 추서 훈장이 주어졌습니다.
1978년, 지미 카터 대통령은 여러 참전 용사들의 요청에 응해 "전투에서 보여준 비범한 영웅적 행위"를 이유로 부대에 대통령 부대 표창(Presidential Unit Citation)을 수여했습니다. 이는 고국으로 돌아왔을 때 백인 병사들처럼 따뜻한 환영을 받지 못했던 수많은 참전 용사들의 오랜 염원이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이들이 최전선에서 보여준 행보는 너무나 설득력이 컸고, 결국 트루먼 대통령은 군 내 인종 분리를 종식시키는 명령을 내렸습니다. 이렇게 제761전차대대는 해체되었고, 대원들은 다른 부대에 통합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