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위스 중앙동부 그라우뷘덴(Graubünden)주에 자리한 발텐스부르크(Waltensburg) 코뮌은 오늘날 주민 수가 300명에 불과한 조용한 마을입니다. 그러나 중세 시대에는 이 일대에서 손꼽히는 요충지였으며, 실제로 요르겐베르크(Jörgenberg), 그뤼넨펠스(Grünenfels), 포겔베르크(Vogelberg), 크로펜슈타인(Kropfenstein)까지 무려 4개의 성이 들어선 곳이었습니다.
이 성들은 지금은 모두 폐허로 남아 있습니다. 그중에서도 크로펜슈타인이 각별히 주목받는 이유는 바로 위치 때문입니다. 이 성은 해발 1,130m에 달하는 깎아지른 듯한 절벽 위에 세워졌습니다. 세계 곳곳에서 비슷한 입지의 수도원과 건축물을 찾아볼 수 있지만, 크로펜슈타인은 그중에서도 3층 높이의 방어 건축물이라는 점에서 독보적입니다.

거대한 암벽이 곧 성벽, '동굴 성(Grottenburg)'의 정체
크로펜슈타인은 장엄한 수직 암벽의 천연 암석을 건물 구조의 핵심으로 활용했기 때문에 '동굴 성(Grottenburg)'으로 분류됩니다. 스위스에도 동굴을 품고 지어진 다른 동굴 성들이 존재하지만, 크로펜슈타인처럼 암벽과 건물이 하나로 융합된 사례는 드뭅니다.
성의 이름은 이미 14세기 중세 문서에서 확인되는데, 독일어 '크로프(Kropf)'에서 유래한 이 명칭은 '혹처럼 불룩하게 돌출된 부분'을 뜻합니다. 바위벽에 착 달라붙어 돌출된 성의 생김새를 그대로 담은 이름입니다.
목재 연대 측정으로 밝혀진 건립 시기: 1312년경
정확한 건축 연도는 기록으로 남아 있지 않지만, 연구자들은 건물에 아직 남아 있는 목재 기둥의 연륜연대측정(수목년대학) 분석을 근거로 이 성이 14세기 초, 좀 더 구체적으로는 1312년경에 지어졌다는 데 의견을 모았습니다.
성은 매우 가파른 벽면을 가진 수직 절벽의 가장자리, 좁고 길쭉한 동굴 안쪽에 마치 독수리 둥지처럼 솟아 있습니다. 불규칙한 평면을 가진 단일 건물 구조로, 자연 지형을 극한까지 활용한 중세 방어 건축의 전형적인 사례로 꼽힙니다.

천연 암반 덮개 덕분에 살아남은 석조 디테일
성 대부분을 덮고 있는 암석의 천연 보호 덮개 덕분에 석조 공사는 악천후에 거의 영향을 받지 않았습니다. 그 결과 700여 년이 지난 지금도 볼 만한 건축 세부 요소가 상당수 남아 있어 당시의 모습을 생생히 엿볼 수 있습니다.
건물 구조: 동쪽은 방어·저장, 서쪽은 거주 공간
동쪽 구역 전체는 폭이 1.5~2m에 불과할 만큼 좁아 저장고나 방어용 공간으로 사용되었을 것으로 추정됩니다. 남쪽 벽은 암석의 자연스러운 경로를 따라 여러 번 단절되어 있으며, 내부 채광을 위한 수많은 나팔 모양 창문과 약 70×50cm 크기의 더 큰 개구부가 난 사각형 창문이 눈에 띕니다.

반면 내부 폭이 약 6m에 달하는 서쪽 구역은 거주 공간으로 설계되었습니다. 앉을 수 있는 틈새가 딸린 창문이 있었고, 부조와 아마도 벽화로 추정되는 예술적 장식이 더해져 있었습니다. 오래된 목재 들보 잔해에는 톱질 흔적이 남아 있는데, 이는 어느 시점에 건물을 철거할 계획이 있었다는 증거로 해석됩니다.
성의 주인, 폰 크로펜슈타인(von Kropfenstein) 가문
이 성을 지은 사람들이 누구인지에 관해 연구자들은 이곳이 발텐스부르크와 루벤(Ruben) 공동체의 영토를 통치하고 집행관과 토지 판사를 배출했던 귀족 가문의 거처였을 가능성이 높다고 봅니다. 성의 이름을 딴(혹은 얻은) 방계 가문이 이곳에 자리 잡고 살았고, 본가는 계속 루벤 인근에 머물렀을 것으로 추정됩니다.

'폰 크로펜슈타인(von Kropfenstein)'이라는 성씨를 가진 인물들은 중세 문서 곳곳에 등장합니다. 1335년 판사 뷔르클린 폰 크롭펜슈타인(Bürklín von Cropfenstein), 1396년 주교령 판사 알브레히트 폰 크로펜슈타인(Albrecht von Kropfenstein), 1401년 플로린 폰 크로펜슈타인(Florin von Kropfenstein), 1437년 한스 폰 크로펜슈타인(Hans von Kropfenstein) 등이 그 예입니다.
마지막이자 가장 널리 알려진 크로펜슈타인 가문의 인물은 마르쿠아르트(Marquart, 1438~1443년 그라우어 분트 판사)와 예르크(Jörg)입니다. 예르크는 1473년 이 가문의 마지막 후손이었으며, 성을 소유하고 거주한 마지막 인물이었을 것으로 여겨집니다. 그가 떠난 뒤 성은 방치되었고, 서서히 훼손되기 시작했습니다.

오늘날의 크로펜슈타인: 도보 15분의 탐방 코스
성이 사용되던 시절에는 독특한 입지 탓에 이 일대에서 가장 접근하기 어려운 성 중 하나였습니다. 하지만 오늘날에는 생각보다 쉽게 갈 수 있습니다. 발텐스부르크 마을에서 출발하는 탐방로가 있으며, 도보 약 15분이면 성에 도착합니다. 다소 가파르고 마지막 구간은 바위에 새긴 길이지만, 1950년대에 폭을 넓히고 난간을 설치해 안전성을 높였습니다.
참고 자료
스위스 성 | Grottenburg Kropfenstein(부르겐벨트) | 마리아-레티치아 보스카딘, 크로펜슈타인 | 시드니 토이, 기원전 3000년부터 AD 1700년까지 요새화의 역사 | 아르민 툴세, 서양 세계의 성: 240개의 일러스트 포함 | 위키피디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