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43년 5월 16일 밤, 영국 왕립공군(RAF) 한 개 편대는 독일의 산업 심장부인 루르 계곡에 위치한 두 개의 댐을 파괴하기 위해 독일 영토 깊숙이 침투하는 감행적인 작전을 수행했습니다.
이후 터진 홍수는 수력발전소 두 곳과 여러 공장·광산을 파괴하며 독일의 철강과 석탄 생산에 치명타를 입혔습니다. 이 작전은 '채스타이즈 작전(Operation Chastise, 징벌)'이라 명명되었습니다.
유럽 최대의 댐, 뫼네 댐
공격 목표 중 하나인 노르트라인베스트팔렌주의 뫼네(Möhne) 댐은 당시 유럽에서 가장 큰 댐이었습니다. 이 댐은 홍수 조절과 주변 광범위한 지역의 용수 공급을 위해 건설되었으며, 수력 발전에도 활용되고 있었습니다.

루르 계곡의 공장과 산업 시설들이 이 댐들이 생산하는 에너지에 크게 의존하고 있었기 때문에, 영국은 댐 파괴가 독일의 전쟁 물자 생산에 막대한 차질을 가져올 것으로 판단했습니다.
철저히 방비된 독일의 요새
독일 역시 저수지와 댐이 방어 체계의 약점임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댐 주변을 대공포로 빈틈없이 보호했고, 물속으로 투하된 어떤 발사체든 댐 벽에 닿기 전에 가로채도록 설계된 어뢰망까지 설치해 두었습니다.
처음에 영국은 상공에서 폭격하는 방안을 검토했지만, 댐을 무너뜨리려면 감당하기 어려울 만큼 거대한 폭탄이 필요했습니다. 반면 상대적으로 작은 폭약이라도 댐 벽 아래 수중에서 폭발시키면 같은 효과를 거둘 수 있었습니다. 문제는 어뢰망을 어떻게 통과하느냐였습니다.
천재적 발명품, 바운싱 폭탄
엔지니어 반스 월리스(Barnes Wallis)가 해답을 내놓았습니다. 바로 '바운싱 폭탄(bouncing bomb)', 즉 튀는 폭탄이었습니다. 월리스는 폭뢰처럼 수압식 신관을 장착한 원통형 4톤 폭탄을 고안해냈습니다. 이 폭탄은 극저공으로 비행하는 항공기에서 역회전(backspin)을 걸어 투하되어, 호수 수면 위를 통통 튀며 어뢰망을 피해 댐 벽에 부딪힌 뒤 가라앉아 기초 부분에서 폭발하도록 설계되었습니다. 이렇게 하면 최대한의 파괴력을 낼 수 있었습니다.

제617편대의 탄생
이 임무를 수행하기 위해 새로운 부대가 창설되었습니다. 바로 제617편대로, 훗날 댐 버스터스(Dam Busters)라 불리게 됩니다. 부대를 이끈 것은 폭격 및 야간 작전 170회 이상의 경험을 지닌 24세의 지휘관 가이 깁슨(Guy Gibson)이었습니다. 승무원은 영국, 캐나다, 호주, 뉴질랜드, 미국 출신 조종사들로 구성되었으며, 각자 베테랑다운 풍부한 경험을 갖추고 있었습니다.
치열한 사전 실험
RAF는 전국 곳곳에서 광범위한 실험을 진행했습니다. 그 결과 코드명 업킵(Upkeep)이라 불린 드럼형 폭탄은 분당 500회전의 역회전 상태에서 고도 20미터, 시속 370km의 속도로 투하해야 한다는 사실이 확인되었습니다.
투하가 정확하지 않으면 바운싱 폭탄은 작동하지 않았기 때문에 정밀성이 생사를 가르는 관건이었습니다. 현대적 기술이 없던 시절, RAF는 모든 기술적 난제에 독창적인 해결책을 내놓았습니다. 정확한 고도를 측정하기 위해 항공기 기수 아래와 동체 아래에 두 개의 집광등을 설치해, 올바른 고도에 도달하면 두 빛줄기가 수면 위 한 점에서 교차하도록 했습니다. 또한 정확한 투하 시점을 재기 위해 로프와 못으로 만든 특수 장치를 고안해냈습니다.
1943년 5월 16일, 작전 개시

1943년 5월 16일 밤, 19대의 랭커스터 폭격기에 탑승한 133명의 승무원이 세 개의 물결로 나뉘어 이륙했습니다. 목표는 뫼네 댐, 에더(Eder) 댐, 그리고 소르페(Sorpe) 댐 세 곳이었습니다. 편대들은 독일 공군기지와 알려진 대공포 진지를 능숙하게 우회하며 독일 영공을 드나든 뒤, 남쪽으로 방향을 틀어 뫼네 강을 향해 날아갔습니다.
레이더 탐지를 피하기 위해 폭격기들은 불과 30미터 고도로 비행했습니다. 어느 순간 조지 챔머스(George Chalmers) 하사는 자신의 조종사가 나무 꼭대기보다 낮은 고도로 산림 방화선을 따라 목표물을 향해 날아가는 것을 보고 깜짝 놀랐다고 전해집니다.
홍수가 삼킨 계곡
뫼네 댐이 무너지기까지 다섯 번의 시도가 필요했습니다. 공격으로 댐에는 지름 약 76미터(250피트)에 달하는 거대한 구멍이 뚫렸고, 그 틈으로 쏟아져내린 홍수는 계곡의 백여 개 공장과 거의 천 채의 주택, 그리고 수십 개의 도로·철도·교량을 집어삼켰습니다. 네하임-휴스텐(Neheim-Hüsten)이라는 작은 마을도 직격탄을 맞아 800명 이상의 희생자가 발생했습니다.
에더 댐에는 대공포 진지가 없었지만 지형이 험준하여 폭격 팀이 공격 각도를 맞추기 위해 여러 차례 접근을 반복해야 했습니다. 결국 에더 댐에도 폭 70미터의 구멍이 뚫렸고, 이로 인한 홍수는 하류 30km까지 계곡을 잠갔습니다. 반면 소르페 댐에 대한 공격은 실패로 끝났습니다.

값비싼 대가
RAF가 입은 손실은 막대했습니다. 작전에 참여한 19대의 폭격기 중 8대가 격추되었고, 승무원의 거의 절반이 목숨을 잃었습니다.
민간인 사망자는 1,500명을 넘는 것으로 추정됩니다. 특히 뫼네 댐 하류에 있던 수용소에 갇혀 있던 러시아 포로 다수가 희생되었습니다. 수천 마리의 소, 돼지, 말은 물론 염소와 양 같은 가축들까지 사람들과 함께 참변을 당했습니다.
전략적 성과와 한계
이 공격으로 독일의 석탄과 철강 생산에 상당한 타격이 입었지만, 전쟁의 흐름을 바꾸기에는 역부족이었습니다. 루르 지역의 철강 생산량은 4분의 1로 감소했고 석탄 생산량은 40만 톤 줄었는데, 이는 주로 폭탄이 두 곳의 수력발전소를 파괴해 해당 지역이 이틀간 어둠에 잠겼던 데서 비롯된 결과였습니다.
그러나 두 댐 모두 몇 달 안에 복구되었고, 재건을 방해할 추가 공습이 이어지지 않았습니다. 결국 채스타이즈 작전은 영국 육군부가 기대했던 장기적 생산 위기를 초래하는 데는 실패한 채, 전쟁사에 남는 기묘하고 용감한 작전으로 기억되고 있습니다.
이 글은 Amusing Planet에 게재된 글을 허락을 받아 번역·편집한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