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대사

인콘피덴시아 미네이라: 포르투갈 지배에 맞선 브라질 최초의 독립 운동

인콘피덴시아 미네이라란?

포르투갈 왕실에 대한 반란 운동인 인콘피덴시아 미네이라(Inconfidência Mineira)는 18세기 브라질에서 가장 중요한 정치적 사건으로 평가받습니다.

인콘피덴시아 미네이라: 포르투갈 지배에 맞선 브라질 최초의 독립 운동

글: Me. Cláudio Fernandes

계몽주의 사상과 독립 열망

1780년대 당시 미나스제라이스 총독령에서 벌어진 이 운동의 주도 세력, 이른바 '인콘피덴치(inconfidentes)'는 포르투갈 본국에 대한 충성을 저버린 자들이라는 낙인이 찍힌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들은 18세기 계몽주의 사상의 깊은 영향 아래 있었는데, 이는 폼발 후작(Marquis of Pombal)이 포르투갈에서 추진한 개혁과, 브라질 엘리트층이 코임브라나 파리 같은 유럽 도시를 자주 오갔던 배경에서 비롯된 것이었습니다.

여기에 더해 1776년 미국 독립과 같은 충격적인 정치 사건들은 계몽주의 이념에 기반한 새로운 정치 체제를 세우려는 미나스제라이스 엘리트층의 열망을 크게 고취시켰습니다. 그들 역시 포르투갈 왕실의 지배에서 벗어나고자 했습니다.

금 생산량 감소와 조세 위기

이러한 사상이 확산되던 시기, 1770년대부터 미나스제라이스 사회는 금 생산량 감소로 점진적인 쇠퇴를 겪고 있었습니다. 이로 인해 매년 금 100아로바(arroba)를 요구하던 왕실 세금 납부조차 어려운 상황에 이르렀습니다. 이런 위기 속에서 지역 엘리트 일부는 군대부터 교회에 이르기까지 총독령 권력 구조 곳곳에서 점점 더 큰 영향력을 행사하기 시작했고, 미나스제라이스를 포르투갈로부터 독립된 나라, 즉 자체적인 정치 체계를 갖춘 국가로 만들려는 구상이 바로 이들로부터 나왔습니다.

음모에 가담한 인물들

공모자 가운데는 변호사, 광산업자, 신부, 고위 장교, 판사, 시인 등 다양한 인물이 있었습니다. 대표적인 인물은 다음과 같습니다.

  • 토마스 안토니오 곤자가(Tomás Antônio Gonzaga)
  • 클라우디우 마누엘 다 코스타(Cláudio Manuel da Costa)
  • 조아킹 조제 다 시우바 하비에르(Joaquim José da Silva Xavier), 일명 티라덴티스(Tiradentes)
  • 카를루스 코헤이아 드 톨레두 신부(Father Carlos Correia de Toledo)
  • 프란시스코 안토니오 드 올리베이라 로페스 대령(Colonel Francisco Antônio de Oliveira Lopes)
  • 조제 시우베리우 두스 헤이스 대령(Colonel José Silvério dos Reis) — 동료들을 밀고한 인물

총독 교체와 '데하마'의 부과

미나스 총독령의 위기는 1782년 루이스 다 쿠냐 메네제스(Luís da Cunha Meneses)가 총독으로 부임하면서 더욱 악화되었습니다. 그는 통치 과정에서 미나스 엘리트를 권력 구조에서 배제하고, 해당 지역에 대한 포르투갈 왕실의 통제권을 되찾았습니다.

그러나 상황은 그의 후계자인 바르바세나 자작(Viscount of Barbacena) 때 한층 심각해졌습니다. 그는 미나스제라이스 총독령의 부채를 회수하기 위해 임명된 인물로, 이미 귀해진 금 생산물 전량 징수에 더해 이른바 '데하마(Derrama)', 즉 총독령의 부채를 인구세에 묶어 걷어들이는 특별 세금 제도를 시행했습니다.

음모의 발각과 실패

이러한 사태는 인콘피덴치들의 반란 준비를 앞당겼습니다. 1788년, 티라덴티스 소위와 동료들은 다음 해 시행될 예정이던 데하마에 맞서는 음모를 준비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나 1789년 바르바세나는 데하마 시행을 중단하고 인콘피덴치들의 체포를 명령했습니다. 이는 '아우투 다 드바사(auto da Devassa)', 즉 왕실에 반역한 자들을 총독이 직접 심판하고 처벌할 수 있도록 허용하는 법적 근거에 따른 조치였습니다. 바르바세나에게 음모를 밀고한 것은 공모자 중 한 명인 시우베리우 두스 헤이스 대령으로, 그는 자신의 빚을 탕감받기 위해 동료를 팔았습니다.

티라덴티스의 체포와 처형

인콘피덴시아 진압 과정에서 가장 충격적인 사건은 단연 티라덴티스의 체포와 죽음이었습니다. 그는 혼자 모든 음모의 책임을 떠안았고, 당시 수도였던 리우데자네이루에서 1789년 체포되었지만 재판은 1792년에야 열렸습니다. 그는 1792년 4월 21일 교수형을 선고받았으며, 시신은 사지분해되는 혹독한 최후를 맞았습니다.

인콘피덴시아 미네이라: 포르투갈 지배에 맞선 브라질 최초의 독립 운동
리우데자네이루에서 체포되는 티라덴티스 *

자유의 순교자로 남다

티라덴티스의 죽음은 이후 상징적인 파장을 불러일으켰습니다. 특히 1889년 브라질 공화국 선포 이후, 인콘피덴시아 미네이라는 브라질의 자유주의·공화주의 이념의 선구로 재조명되었고, 티라덴티스는 자유의 순교자로 격상되며 그에 관한 신화가 만들어지기 시작했습니다.

*이미지 출처: Commons